조폭의 전형적 욕망 그려 하지만 주변일상도 생생
‘독특함’ 빛나느 조폭영화
‘독특함’ 빛나느 조폭영화
조폭(조직폭력배)이 자주 나오는 한국 영화에서 사람을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조폭과 민간인. 이게 우스개만이 아닌 건, 조폭은 영화 속에서는 친밀한 존재이지만 여전히 현실에서는 낯선 타자에 가깝기 때문이다. 조폭과 민간인의 사랑을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설정한 멜로드라마이든, 조폭의 남다른 언어와 생활 방식을 과장한 코미디이든 영화는 조폭의 낯섬을 십분 활용해왔다. <초록물고기>처럼 한 인간의 욕망과 좌절을 사실적으로 그릴 때도 조폭을 주인공으로 삼으면 세상을 온통 비정한 잿빛으로 칠해 놓아야만 했다.
16일 개봉하는 유하 감독의 세번째 영화 <비열한 거리>는 조폭의 욕망과 좌절을 그리는 전형적인 조폭 영화다. 그런데 어딘가 남다르다. 영화의 주인공 병두(조인성)는 어떨 땐 낯선 조폭의 세계에 있다가, 어떨 땐 관객 옆 친숙한 일상의 세계로 나와 앉는다. 영화 속 세상도 누아르 영화의 잿빛을 띠다가 한가하고 지루한 도시의 햇빛 속에 들어오기를 되풀이한다.
웨이터 출신으로 조폭이 된 병두는 홀어머니와 학교 다니는 두 동생이 철거촌에 산다. 행동대장쯤 되는 그의 밑에 딸린 조직원도 대여섯명쯤 된다. 돈을 벌어야 할 필요성이 절박하지만 중간 보스가 좀처럼 병두를 키워주지 않는다. 병두는 중간 보스를 제치고 직접 보스와 거래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중간 보스까지 제거한다. 의리를 내세우면서 냉정한 계산에 따라 등돌리고 배신하는, 교활한 질서의 묘사가 정치한다. 이런 질서의 재생산은 결국 병두도 제거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까지도 갖게 한다. 하지만 이런 구도는 조폭 영화에서 많이 보아온 것이기도 하다.
영화는 병두의 가족, 초등학교 동창 현주(이보영)와의 연애, 조폭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려고 병두를 취재하는 영화감독 지망생 친구(남궁민) 등 병두 주변의 ‘민간인’ 세계를 조폭 세계와 병행해 보여준다. 그 교차편집에서 <비열한 거리>는 남달라진다. 이 민간인들도 저마다 모순된 욕망을 지니고 있고 그 점에서 조폭 세계와 유사하기도 하지만, 영화 속 두 세계의 만남에선 낮은 파열음이 일어난다. 좀 과장하면 재현의 세계(조폭)와 일상의 세계(민간인)를 번갈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두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 파열음이 쌓이다가 어느 순간 질적으로 도약한다.
병두는 민간인 세계에 사는 현주와의 거리를 좁히려 하지만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유부남과 연애했던 현주의 사연이, 부지불식간에 터져나오는 병두의 폭력성이 자꾸만 둘 사이를 막는다. 여전히 두 세계는 멀리 있고 언제 지뢰가 터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어느 순간 이 둘 사이가 뚫리고 병두의 인생이 힘을 받는다. 불안한 세상에 주인공의 희노애락의 감정선이 안착하는 순간, 이질적인 두 세계가 그 거리를 그대로 둔 채 한 공간 안에 녹아든다. 그때 전해지는 사실감은 구체적이고 역동적이다.
<비열한 거리>는 조폭영화이면서 동시에 조폭의 과잉된 이미지에 대한 감독의 자의식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독특한 영화다. 두 마리 토끼를 좇는 듯 불안정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순간 순간 빛나는 장면을 빚어낸다. 사시미칼과 쇠몽둥이가 오가는 살벌한 싸움 속에서도 ‘민간인’들의 지루하고 비루한 욕망의 드라마가 기죽지 않는다. 그건 한국 조폭 영화에서 드물게 만나는 반가운 모습이다.
임범 기자 isman@hani.co.kr, 사진 유쾌한 확성기 제공
“왜 또 조폭이냐고?” “인간이 나오냐 아니냐 차이
자본주의의 폭력성 다룬 안티 조폭영화 만든 셈”
유하(43) 감독이 조폭영화를 만들었다는 건 아무래도 뜻밖이다. 전작 <결혼은 미친 짓이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멜로나 성장드라마의 틀을 입었지만 관객에게 동시대의 문제를 털어놓는 영화였다. 거기 담긴 감독의 시선은 진솔하고 사실적이었다. 진솔하고 사실적으로 동시대를 말하는 조폭영화가 가능할까? 단서가 있기는 하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주인공이 쌍절곤을 휘두르며 폭압적인 선도부원들을 물리치는 판타지를 선사하면서도 기분이 씁쓸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대리만족과 반성을 동시에 하게 하는, 장르 영화의 쾌감과 그 허구성의 허전함을 동시에 전하는 묘한 성취가 있었다. 지난 9일 만난 유하 감독에 따르면 <비열한 거리>는 거기서부터 출발한 것 같았다.
-왜 조폭영화를 택했나?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말죽거리…>에서 마초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길러진다. 소심, 평범한 학생이 학교 생활도 별볼일 없고 첫사랑에도 차이고 그 상실감을 해결하는 게 기껏 옥상 가서 그것도 정면 대결이 아니고 뒤통수 먼저 때리는 폭력이었다. 그게 폭력성의 탄생이었다면, 그걸 더 따라가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폭력성을 만들고 소비하는가를 다뤄보자, 그렇게 시작됐다.
-조폭영화는 이미 굳어진 관성이 강한 장르 아닌가.
=왜 또 조폭이냐? 변별성이 뭐냐? 내 생각엔 거기에 인간이 나오냐 아니냐이다. 기존의 조폭영화는 인간이 없고 판타지화된 마초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싸움도 멋있고 영웅적이고. 나는 민간인과 조폭의 경계가 특별히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으로서의 건달, 그걸 살리고 싶었다. 그래서 취재를 하다 보니까 반추가 되더라. 나도 ‘조폭이야기’라는 이야기의 노다지, 엘도라도를 찾아 떠나는 비루한 욕망을 가진 영화감독 아닌가. 내 모습 자체가 이야깃거리였다. 그래서 영화 속에 영화 감독이 들어오게 됐고.
-영화에서 조폭영화 자체에 대한 자의식이 보인다.
=일부러 다른 조폭영화의 구조를 인용, 차용, 패러디해서 관습의 집합처럼 의도했다. 그 속에 이야기의 엘도라도인 조폭성의 탄생과 소비를 이야기의 운명처럼 풀어보고 싶었다. 병두가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헤라자데이고, 재밌는 이야기를 마치면 죽고, 새 조폭이 나오면 새 이야기가 펼쳐지고. 우리 사회의 조폭성이 그런 식으로 살아 남는다. 조폭성의 소비와 매혹을 아라비안 나이트의 구도로 패러디해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안티 조폭 영화로 생각하고 만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상업영화이고 관객이 기존 관습에 녹아들면서 재밌는 이야기로 봐주길 바란다. 조폭 생활이 나랑 비슷하네, 이런 자기동일시를 통해 되돌아볼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면 더 좋고.
-의도적인 관습의 집합이라고 했지만, 관객이 상투적으로 볼 위험성이 있지 않나.
=얼마나 설득력 있게 가느냐가 중요하지, 그게 낯익냐 아니냐는 덜 중요하다고 본다. 낯익은 상황이라고 해도,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 그걸 만들어가는 건 창조이지 답습이 아니다. 그런 믿음이 있다. 나는 이야기를 신뢰하는 사람이니까. 또 갈수록 상식적인 얘기에 관심이 간다. 기발한 것보다 뻔한 것, 거기서 오는 아이러니…. 이건 한국영화가 몬도가네식, 뮤직비디오식으로 가는 데 대한 반발심이기도 하다.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으로 가자. 그게 지금은 더 새로운 시도가 아닐까.
글 임범 기자,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왜 또 조폭이냐고?” “인간이 나오냐 아니냐 차이
자본주의의 폭력성 다룬 안티 조폭영화 만든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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