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어람 제공
6년의 외압설, 32년의 슬픔을 이긴 영화 <26년> 촬영 현장
광주의 아들딸이 ‘그 분’을 암살하는 내용, ‘소셜 펀딩’으로 태어나
광주의 아들딸이 ‘그 분’을 암살하는 내용, ‘소셜 펀딩’으로 태어나
7월21일 오후 3시, 햇볕은 사나운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혹독한 더위였다. 대전시 산성치안센터 안은 더욱 그랬다. 카메라만으로 꽉 차는 좁은 파출소에서는 12월22일 한겨울의 장면을 촬영 중이었다. “컷!” 사인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배우 한혜진과 이상훈이 두꺼운 외투와 털옷을 입은 채 난롯불 앞에 바짝 다가앉았다. 조명 뒤에서 스태프들도 어깨를 빼곡히 붙이고 앉아 감독의 사인을 기다리고 있다.
“큐!” 사인 직전, 한혜진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출연자들에게 '도대체 왜, 언제, 누가, 어떻게, 무엇을?’ 따져 물어도 하나도 무섭지 않던 그다. 그러나 파출소에서 뒹굴며 “다 쏴죽이라”고 외치고 있는 아버지를 보는 표정은 복잡하다. 국가대표 사격 선수인 그는 아버지 소식에 전지훈련을 접고 파출소로 온 참이었다. “아빠… 또 못 갔다, 전지훈련. 아빠 땜에.” 미진의 아버지는 못 들은 척 돌아눕는다. 더위보다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미진이 속삭이듯 말한다. “아빠, 그냥 죽어라… 죽어버려라.” 때론 싸늘하게, 때론 다정하게, 수십 번 아빠에게 죽어버리라고 했다. 마침내 조근현 감독의 사인이 떨어졌다. “오케이, 좋습니다.” 오후 6시, 한혜진의 첫 촬영이 끝났다.
#1. 한혜진 “이 영화 찍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날 촬영한 것은 한혜진(심미진)이 아버지(이상훈)가 난동을 부리다가 파출소에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를 데리러 가는 장면이었다. 아버지가 엉망진창이 된 채 파출소에 널브러진 이유는 그날 텔레비전에서 광주시민에게 발포한 최종 책임자를 국민화합을 명분으로 사면한다는 뉴스를 접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미진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눈앞에서 “광주 폭도를 진압하러 내려온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가 등에 업혀 있었다. 그날로 딸은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는 과거에 갇혔다. 만화 <26년>의 표현대로라면, 그날로 역사는 진도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
강풀 작가의 웹툰 <26년>을 원작으로 한 영화 <26년>도 오랫동안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강 작가가 포털 사이트 다음에 연재할 당시 “당초 이 만화의 원제는 <23년>이었다”고 밝힌 일이 있었다. 강 작가는 2003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내 재산은 통장 잔액 29만원뿐”이라며 29만1천원을 추징금으로 납부했다는 뉴스를 듣고 이 만화를 기획했다고 한다. 강 작가는 “5·18을 과거의 이야기로 치부하지 않고 현재의 이야기로 끌어와서 진행하는 것이 오히려 더 현실적”이라는 뜻을 누누이 밝혔다. 처음엔 연재를 시작한 시기에 맞춰 <26년>으로 제목이 바뀌었다가 2년 뒤 영화 <29년> 제작이 추진됐다. 그러나 석연치 않은 이유로 제작이 무산됐다. 이 영화는 태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커졌다. 지난해 다시 <30년> 제작이 시도됐지만 크랭크인하지도 못했다. 2012년 7월19일에야 원래의 이름 <26년>을 달고 첫 촬영에 들어갔다. ‘26년’에 그리려고 했던 현실이 ‘32년’이 되어서야 태어나게 된 셈이다. 작가는 전화 통화에서 “다른 작품보다 빨리 영화화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졌지만 유독 이 영화만 좌초되는 현실에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그사이 배우와 제작진도 3번 바뀌었다. ‘그 사람’의 머리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미진 역은 많은 여배우가 탐내면서도 두려워하는 역할이었다. 한 제작진이 전하는 캐스팅 배경은 이렇다. 배우 한혜진은 캐스팅 소식을 들으며 ‘왜 내겐 저런 역할이 안 들어오지’ 하며 부러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대본을 보냈으니 읽어봐달라”는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바로 그가 부러워했던 역할이었다. 두말없이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배우 한혜진의 주가가 급상승해 영화에 쏠린 눈이 더욱 커졌다. 한 제작진은 “촬영에 들어가면서 한혜진씨가 소속사 대표에게 ‘이 영화 찍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고 들었다. 불리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역할에 뛰어들게 해줬다는 뜻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2. 26년에 휩쓸린 사람들 “분노? 그 이상이다”
분분한 외압설 속에서 촬영 2주 전까지 진통을 겪은 끝에 최종적으로 주요 배우들이 확정됐다. 광주에서 아버지를 잃은 조직폭력배 곽진배 역은 영화 <모비딕>의 주연이었던 진구다. 진구는 4년 전 처음 영화 제작이 결정됐을 때는 조연으로 캐스팅됐다가 그사이 성장을 거듭하며 주연을 맡았다. 제작이 무산됐을 때도 다시 만들어진다면 영화에 출연하겠다는 의지를 끊임없이 밝혀온 배우로 전해진다. <26년>은 계엄군으로 광주시민에게 총을 겨눴던 김갑세(이경영)가 죽음을 앞두고 광주항쟁에서 부모를 잃은 자식들을 찾아 학살의 최종 책임자를 직접 암살할 것을 모의·실행하는 이야기다. 김갑세의 아들 역은 배우 배수빈이, 아버지를 위해 책임자 처벌에 가담하는 교통순경 권정혁 역은 그룹 2AM의 임슬옹이 맡는다. 결코 사죄하지 않는 ‘그 사람’ 역은 영화 <도가니>에서 교장으로 출연했던 배우 장광에게 돌아갔다.
많은 강풀 만화가 그렇듯 원작은 각각의 과거를 지닌 여러 명의 캐릭터가 한데 모이며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조직폭력배, 경찰, 사격 선수, 기업인 등 “살면서 한 번도 만날 일 없는 사람들이 처음 본 순간 어쩐지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을 갖는 것은 5·18의 상처를 깊이 간직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이들의 다기한 이력과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는 집중력은 어떻게 가능할까? 촬영 현장에서 만난 영화사 청어람 최용배 대표는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라 밝힐 수 없다”면서도 “6명 주인공의 과거를 각각 한 가지 신으로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특수한 기법을 사용할 것”이라는 힌트를 남겼다. 조근현 감독은 “영화는 원작과 콘셉트만 같고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심미진의 과거에 속하는 배우 이상훈은 “이 더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음주에는 광주에서 분신한다”며 결연한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분신은 영화에서 심미진이 끝까지 ‘그 사람’을 조준하게 되는 강력한 동기가 될 듯하다. 이상호는 “몇 년 전 처음 캐스팅됐을 때 바로 광주로 내려가 금남로를 며칠 떠돌았다“며 “그때 들은 이야기는 분노 이상이다. 이 영화가 오랜 무기력을 해소하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26년>은 화석화된 5·18의 역사에서 도대체 누가 왜 그 사람을 비호하는지를 들여다보려고 하는 웹툰이었다. 7월21일 오전 대전의 촬영장에선 ‘그 사람’의 집 안 촬영이 있었다. 경호실장과 비서실장이 5·18을 앞두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광주 진압군으로 참여했지만 김갑세와는 달리 ‘그 사람’을 보위하는 쪽을 택한 경호실장 마상렬(조덕제)은 무표정하지만 누구보다도 끈질기게 그분을 지킨다. “이분은 역사다! 이분이 잘못된 것이라면 나의 모든 과거가 잘못된 것이기에 이분은 보호받아야 한다!” 분장실에서 만난 배우 조덕제는 “경호실장은 5·18의 트라우마와 항상 내부적으로 갈등하는 불안정한 인물이다. 직업과 과거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마음으로 연기한다”고 했다. 경호실장의 캐릭터는 겉으로 견고해 보이는 권력의 균열을 드러내는 역할을 할 것이다.
#3. 최용배·조근현·강풀 “태어나야만 하는 영화”
강풀 작가의 다른 웹툰들이 유료화됐지만 만화 <26년>은 무료 공개다. 연재할 때도 ‘펌질을 권장하는 카피레프트 만화’였다. <한겨레21>과의 전화 통화에서 강 작가는 “5월이 되면 이 만화를 학습이나 토론 자료로 활용해도 되겠냐는 메일이 많다. 교실에서 아이들이 다 같이 이 만화를 보기도 한다고 들었다”고 했다. 작가가 이 작품을 더는 개인의 창작물로 여길 수 없었던 것처럼 영화의 운명도 그랬다.
조근현 감독은 4년 전에는 <26년>의 미술감독으로 영화에 합류했다. 서울대 서양화과를 나온 조 감독은 <마이웨이> <음란서생> <장화홍련> 등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를 지닌 영화들의 실력 있는 미술감독이었다. 여러 차례 투자가 좌초돼 제작비를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그가 시나리오를 다시 썼다. 영화사 청어람 최용배 대표가 “오랜 현장 경험을 가진 데다 영화의 메시지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는” 그를 설득해서 감독을 맡겼다. <26년>으로 감독에 입봉하게 된 조 감독은 “이 영화는 태어나야만 하는 영화다. 누구든 연출을 맡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며 “영화에서도 감독의 의지를 관철하기보다는 인물들의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26년>은 외압설이 무성한 가운데 몇 차례 투자가 좌절되자 시민들이 제작비 마련에 참여하는 ‘소셜 펀딩’으로 방향을 틀었다. 촬영 3주 전부터 마련된 영화 제작비를 후원하는 온라인 홈페이지(www.26years.co.kr)에선 2억3천만원이 모였다. 영화가 개봉하면 후원자들에게 시사회 표를 주는 제도로, 예비관객을 확보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윗선’의 눈치를 보던 투자기업의 자리를 가수 이승환씨를 비롯한 개인투자자들이 대신했다. 최용배 대표는 제작비 46억원 중 절반 수준의 투자확정액을 들고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 원작이 지닌 여러 가지 취지를 잘 살리기 위해 더는 제작비를 줄일 생각이 없다. ‘그 사람’ 집의 안과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규모 있게 연출해야 한다. 사회적 메시지만큼이나 장르 영화로서 완성도를 갖췄으면 한다”고 했다. 청어람은 지금 영화 <괴물>의 후속편을 제작하고 있기도 하다. 영화 <26년>에서 절정은 심미진이 차를 타고 지나가는 ‘그 사람’을 저격하는 장면이 될 듯하다. 이 장면만 엿새에 걸쳐 촬영할 예정이다.
#4. 그 사람들 ‘…’
그러나 웹툰 <26년>이 저격한 것은 사회적 화합이라는 이름으로 다물어버린 우리의 무책임한 역사의식이다. ‘책임자 처벌’에 둔감한 채 무기력만 키웠던 피해자와 공범자 모두다. “글을 쓰는 자는 글로, 노래를 하는 자는 노래로, 만화를 업으로 하는 자는 만화로” 저격에 나섰다. 이상훈은 “영화가 만들어지면 ‘그 사람’이 시사를 보러 왔으면 좋겠다. 이 영화가 그분들에게 영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최 대표는 “투자자든 기부자든 정치인은 단 한 명도 없다. 갈수록 사람들이 더 눈치를 보고 알아서 기는 느낌이다”고 했다. 권력의 심장부는 아직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누군가는 이 불온한 영화가 태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영화는 50회 촬영을 마치고 11월 말 개봉할 예정이다.
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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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압설이 무성한 가운데 영화 <26년>의 출연진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그 사람'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심미진 역할은 최종적으로 배우 한혜진이 맡았다. 사진 청어람 제공
광주의 역사를 현재로 불러온 <26년>은 5월 광주에 있었던 사람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따라가는 '팩션'이다. 영화 속 두 계엄군이 다른 길을 밟는 것처럼 역사도 청산과 답습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 사진 청어람 제공
영화 <26년>은 제작비의 절반 정도만 확보한 채 촬영을 시작했다. 가수 이승환씨 등 자발적 개인투자자들이 기관 몫을 채웠다. 촬영 첫날 진행된 경호실장 마상렬의 사무실 촬영 장면. 사진 청어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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