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원래 대사 ‘돈 벌면 좋잖아’
‘배춧잎 세는 재미가 쏠쏠’ 번역
우리 입말로 옮기며 재미 더해 이미도·김은주·조상구 트로이카
90년대 이후 2천여편 번역활동
요샌 박지훈·성지원 등이 ‘특급’ 직배사들 유명 번역가 주로 찾아
신인들은 영화제서 ‘반짝 일자리’ 이미도, 김은주 그리고 조상구. 이 이름이 낯익다면 당신은 영화광이다. ‘외국영화 번역’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 세 사람의 이름은 1990년대 이후 한국 극장에서 언제나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이미도의 후예’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12자 이내 한 줄로 압축해야 하는 영화 자막 번역은 고난이도의 ‘종합 예술’이다. 내용은 기본 중의 기본, 은유와 상징도 전해야 하고, 한국 관객 취향에 맞는 말맛도 더해줘야 한다. 그래서 자막 번역은 외국 영화 흥행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로 평가받는다. 이미도, 김은주, 조상구의 시대를 거쳐 더욱 치열해진 요즘 영화 번역의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 은유부터 상징까지-12자의 승부 현재 상영중인 우디 앨런 감독의 <로마 위드 러브>는 영화 번역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영화다. 배우들은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섞은 대사를 따발총처럼 쏘아댄다. 한때 국내 외화 번역을 주도하던 이미도씨가 “대사가 워낙 많아서 자막으로 내용을 압축하기가 버겁다. 공포영화보다 더 공포스러운 게 우디 앨런 영화”라고 했을 만큼 유난스러운 감독 작품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국내 관객 15만명을 넘기며 예상을 넘는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우디 앨런식 수다와 말장난’이 문화 차이를 넘어 성공한 요인에는 복잡 미묘한 영화 내용을 톡톡 튀는 자막으로 관객들한테 전달한 번역도 적잖이 작용했다. 원래 대사에서 “돈 벌면 좋잖아”(pleasure in money)라는 것을 “배춧잎 세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데”라고 번역한다든가, 자막으로 옮기기 어려운 욕설이 등장하는 경우에는 “얼씨구, 지렁이 점프하는 소리 하네”라고 옮기는 식이다. 이 영화를 번역한 윤혜진씨는 “우리 정서와 잘 맞지 않는 부분을 고려해 전달하면서도 과도한 의역은 피해야 한다”며 “내용을 충실히 전달하면서 관객들한테 재미까지 주도록 압축하는 게 번역의 관건”이라고 말했다. ■ 그 많던 ‘이미도’는 어디로? 한때 국내에 들어온 외국 영화 엔딩크레디트에 가장 많이 등장한 이름이 ‘이미도’와 ‘김은주’ 그리고 ‘조상구’다. 이들은 1990년대 초중반 번역작업을 시작해 이후 10여년간 국내에 개봉된 ‘큰 영화’ 번역을 사실상 양분했다. 이미도씨가 번역한 영화는 <슈렉> 시리즈를 비롯해 <인생은 아름다워> <반지의 제왕> <식스센스> 등 다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김은주씨는 <나홀로 집에> <해리포터> <캐리비안의 해적> 등의 시리즈를 번역했다. 이 두 사람이 번역한 영화만 1000여편에 이른다. 드라마 속 ‘시라소니’ 캐릭터로 유명한 배우 조상구씨도 1990년대 이후 1000여편을 번역했다.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번역가들이 사라지고 영화 번역계에도 변화가 왔다. 이씨는 ‘창작에 대한 갈증’을 이유로 출판사 운영과 책쓰기에 집중하면서 영화 번역계를 사실상 떠났다. 김씨는 영화 번역가 이름을 싣지 않는 배급사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 영화를 전담하면서 엔딩크레디트에서 이름을 찾기 어렵게 됐다. 조상구씨는 2007년 이후로는 연기에만 전념하고 있다. 최근에는 박지훈, 성지원, 홍주희, 이진영씨가 낯익은 이름이 됐다. 화제가 된 외화들은 대부분 이들의 손을 거친다. 워너브러더스, 유피아이(UPI) 코리아,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등 주요 직배사들이 ‘특급 번역가’로 통하는 이들 외에 거래를 꺼리는 탓이다. 주요 직배사들이 한해 국내에 배급하는 영화는 100여편 남짓. 영화 한편을 번역하는 데 일주일 정도 걸리며, 편당 번역료는 250만원 선으로 알려졌다. ■ 높은 진입장벽 속 치열한 경쟁 유명 번역가 서너명 정도면 큰 영화들은 대부분 소화가 가능해 번역 일감이 일급 번역가들에게만 몰리는 현상은 여전하다. 그래서 외화 번역의 진입장벽은 꽤 높다. 몇 안 되는 국외 직배사들은 대부분 선호하는 번역가와만 계약을 맺는다. 한때 이미도씨가 외국 영화 대부분을 번역하는 것처럼 보인 이유다. 신인 작가들은 중소형 영화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뒤, 기성작가들의 빈자리를 노려야 하지만 ‘틈새’는 넓지 않다. 게다가 중소 외화 수입사들은 따로 번역가를 두지 않고, 자체 인력으로 자막을 제작하는 경우도 많다. 한 영화 수입사 관계자는 “비용 절감이라는 부분도 크지만, 문화적 특징이나 관객들의 감수성에 맞는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직접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각종 영화제는 번역가들이 활동 폭을 높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단기간에 수백편씩 번역이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제들은 이전 출품작 가운데 번역 난도가 높은 것으로 시험을 치러 실력을 검증한 뒤 단기 채용으로 번역가를 고른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는 번역가 30~40여명이 2~3개월 사이 100~200여편의 자막 작업을 한다. 영화제를 중심으로 일하는 번역가 인력풀이 따로 있을 정도다. 부산국제영화제 관계자는 “외국어뿐 아니라 한국어 능력도 뛰어난 사람들이 선발 대상”이라며 “보수는 번역량이나 러닝타임뿐 아니라 번역 경력까지 고려해 지급한다”고 말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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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입말로 옮기며 재미 더해 이미도·김은주·조상구 트로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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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샌 박지훈·성지원 등이 ‘특급’ 직배사들 유명 번역가 주로 찾아
신인들은 영화제서 ‘반짝 일자리’ 이미도, 김은주 그리고 조상구. 이 이름이 낯익다면 당신은 영화광이다. ‘외국영화 번역’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 세 사람의 이름은 1990년대 이후 한국 극장에서 언제나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이미도의 후예’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12자 이내 한 줄로 압축해야 하는 영화 자막 번역은 고난이도의 ‘종합 예술’이다. 내용은 기본 중의 기본, 은유와 상징도 전해야 하고, 한국 관객 취향에 맞는 말맛도 더해줘야 한다. 그래서 자막 번역은 외국 영화 흥행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로 평가받는다. 이미도, 김은주, 조상구의 시대를 거쳐 더욱 치열해진 요즘 영화 번역의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 은유부터 상징까지-12자의 승부 현재 상영중인 우디 앨런 감독의 <로마 위드 러브>는 영화 번역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영화다. 배우들은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섞은 대사를 따발총처럼 쏘아댄다. 한때 국내 외화 번역을 주도하던 이미도씨가 “대사가 워낙 많아서 자막으로 내용을 압축하기가 버겁다. 공포영화보다 더 공포스러운 게 우디 앨런 영화”라고 했을 만큼 유난스러운 감독 작품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국내 관객 15만명을 넘기며 예상을 넘는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우디 앨런식 수다와 말장난’이 문화 차이를 넘어 성공한 요인에는 복잡 미묘한 영화 내용을 톡톡 튀는 자막으로 관객들한테 전달한 번역도 적잖이 작용했다. 원래 대사에서 “돈 벌면 좋잖아”(pleasure in money)라는 것을 “배춧잎 세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데”라고 번역한다든가, 자막으로 옮기기 어려운 욕설이 등장하는 경우에는 “얼씨구, 지렁이 점프하는 소리 하네”라고 옮기는 식이다. 이 영화를 번역한 윤혜진씨는 “우리 정서와 잘 맞지 않는 부분을 고려해 전달하면서도 과도한 의역은 피해야 한다”며 “내용을 충실히 전달하면서 관객들한테 재미까지 주도록 압축하는 게 번역의 관건”이라고 말했다. ■ 그 많던 ‘이미도’는 어디로? 한때 국내에 들어온 외국 영화 엔딩크레디트에 가장 많이 등장한 이름이 ‘이미도’와 ‘김은주’ 그리고 ‘조상구’다. 이들은 1990년대 초중반 번역작업을 시작해 이후 10여년간 국내에 개봉된 ‘큰 영화’ 번역을 사실상 양분했다. 이미도씨가 번역한 영화는 <슈렉> 시리즈를 비롯해 <인생은 아름다워> <반지의 제왕> <식스센스> 등 다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김은주씨는 <나홀로 집에> <해리포터> <캐리비안의 해적> 등의 시리즈를 번역했다. 이 두 사람이 번역한 영화만 1000여편에 이른다. 드라마 속 ‘시라소니’ 캐릭터로 유명한 배우 조상구씨도 1990년대 이후 1000여편을 번역했다.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번역가들이 사라지고 영화 번역계에도 변화가 왔다. 이씨는 ‘창작에 대한 갈증’을 이유로 출판사 운영과 책쓰기에 집중하면서 영화 번역계를 사실상 떠났다. 김씨는 영화 번역가 이름을 싣지 않는 배급사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 영화를 전담하면서 엔딩크레디트에서 이름을 찾기 어렵게 됐다. 조상구씨는 2007년 이후로는 연기에만 전념하고 있다. 최근에는 박지훈, 성지원, 홍주희, 이진영씨가 낯익은 이름이 됐다. 화제가 된 외화들은 대부분 이들의 손을 거친다. 워너브러더스, 유피아이(UPI) 코리아,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등 주요 직배사들이 ‘특급 번역가’로 통하는 이들 외에 거래를 꺼리는 탓이다. 주요 직배사들이 한해 국내에 배급하는 영화는 100여편 남짓. 영화 한편을 번역하는 데 일주일 정도 걸리며, 편당 번역료는 250만원 선으로 알려졌다. ■ 높은 진입장벽 속 치열한 경쟁 유명 번역가 서너명 정도면 큰 영화들은 대부분 소화가 가능해 번역 일감이 일급 번역가들에게만 몰리는 현상은 여전하다. 그래서 외화 번역의 진입장벽은 꽤 높다. 몇 안 되는 국외 직배사들은 대부분 선호하는 번역가와만 계약을 맺는다. 한때 이미도씨가 외국 영화 대부분을 번역하는 것처럼 보인 이유다. 신인 작가들은 중소형 영화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뒤, 기성작가들의 빈자리를 노려야 하지만 ‘틈새’는 넓지 않다. 게다가 중소 외화 수입사들은 따로 번역가를 두지 않고, 자체 인력으로 자막을 제작하는 경우도 많다. 한 영화 수입사 관계자는 “비용 절감이라는 부분도 크지만, 문화적 특징이나 관객들의 감수성에 맞는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직접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각종 영화제는 번역가들이 활동 폭을 높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단기간에 수백편씩 번역이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제들은 이전 출품작 가운데 번역 난도가 높은 것으로 시험을 치러 실력을 검증한 뒤 단기 채용으로 번역가를 고른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는 번역가 30~40여명이 2~3개월 사이 100~200여편의 자막 작업을 한다. 영화제를 중심으로 일하는 번역가 인력풀이 따로 있을 정도다. 부산국제영화제 관계자는 “외국어뿐 아니라 한국어 능력도 뛰어난 사람들이 선발 대상”이라며 “보수는 번역량이나 러닝타임뿐 아니라 번역 경력까지 고려해 지급한다”고 말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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