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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잠금해제] 과거에 중독된 시대 / 이지현

등록 2014-03-23 18:40

이지현 영화평론가
이지현 영화평론가
웨스 앤더슨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플래시백으로 시작되는 영화다. 고인이 된 작가의 흉상이 보이면, 작은 소녀가 책을 들고 동상을 바라보고 서 있다. 이후 작가의 살아생전의 모습이 보인다. 때는 1985년으로, 당시는 그가 나이 든 ‘거장 작가’였던 시절이다. 노인은 담담하게,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들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달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1932년이 된다. ‘신인 작가’였던 당시의 젊은이가 등장해서 ‘제로’라는 호텔의 주인을 만난다. 제로는 젊은 작가에게 스승이었던 ‘구스타브’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이 켜켜이 쌓인 도입부의 단층들은 빠른 템포로 진행된다. 그래서 대체 영화가 몇 겹으로 둘러싸였는지,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파시즘이 장악한 30년대의 동유럽, 유명한 온천휴양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호텔 관리에 이력이 난 총지배인 구스타브는, 혁신보다는 과거의 스타일을 유지하는 데 골몰하는 책임자다. 때문에 나이가 지긋한 고객들은 그를 몹시 총애한다. 심지어 유산을 상속할 정도로 아낀다. 하지만 어느 노부인의 유산을 상속받은 뒤로 문제가 발생한다. 유산 탓에 재판을 받고 쫓겨 다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과거의 품위는 오간 데 없이, 2차 대전 내내 그는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다. 결국 호텔 소유권을 이양받지만, 그는 총에 맞아서 숨진다. 그리하여 모든 재산은 제로가 물려받는다. 60년대가 되자 나치즘도 쇠락하고, 호텔도 빛이 바랜다. 동유럽의 아름다운 시절(벨 에포크)이 막을 내린 것이다. 제로는 구태가 된 호텔에서 자신의 스승이던 구스타브를 회상한다. “그는 굉장한 은총을 입었으며, 환상을 유지한 사람이었다”고.

아마도 감독은 유럽의 이상주의에 환멸을 느꼈던 것 같다. 부조리한 시대에도 구스타브는 환상에 빠져 지냈다. 마치 에밀 쿠에의 알약을 삼킨 듯, 그는 자기암시로 가득 찬 인물이다. 영화 내내 구스타브는 30년대를 소환해낸다. 이 때문에 아무리 추접스런 행동을 하더라도 그는 당당해 보인다. 탈옥을 한 상황에서도 향수를 뿌려대며 품위를 유지할 정도다. 이 극단적인 자기치장은 폭력의 시대를 조롱하는 방패가 되어서 그를 보호해준다. 덕분에 구스타브는 암흑의 시기를 견뎌낸다. 그가 과거를 향해 거슬렀던 이 발걸음은 소설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행했던 방식들과 비슷하다. 츠바이크는 현재를 발판 삼아 과거의 이야기들을 회상하는 작가였다. 위인전을 쓸 때도 그랬고,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보드카를 마신 듯(영화 속 ‘주브로브카 공화국’의 이름은 보드카의 명칭에서 따왔다), 단편소설 <낯선 여인의 편지> 속의 주인공은 사라진 과거의 사건들에 중독된다.

어쩌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과거의 시간’에 중독된 영화다. 영화는 과거의 프레임에 갇혀 있으며, 그건 츠바이크의 방법이기도 했다. 관객들은 극장을 나서며, 지금에 영향을 미치는 과거의 신경증들과 만나게 된다. 현재 한국은 ‘유우성 사건’에 갇혀 있다. 그가 지닌 ‘간첩 프레임’은 아름다운 과거가 아니었다. 하지만 왜 굳이 간첩을 소환해내려는지 이유는 명확해 보인다. 선거를 앞두고 특정 집단이 자신들의 벨 에포크를 환기하려 시도한 탓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우화에 갇혀 지낼 것인가. 끝이 없는 플래시백은 환멸을 불러올 뿐이다. 과거가 아름답더라도, 그건 쇠락한 노스탤지어다.

이지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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