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만화가 기 들릴
서울 온 프랑스 만화가 기 들릴
“기록 먼저 한 뒤 나중에 그려”
“기록 먼저 한 뒤 나중에 그려”
북한, 중국, 이스라엘, 미얀마…. 차가운 권력 안에 갇혀 있는 나라들의 일상을 그려낸 프랑스 만화가 기 들릴(사진). 한국어로도 번역된 <평양>(2003) <굿모닝 버마>(2009) <굿모닝 예루살렘>(2011)을 통해 한국 독자들에게도 친근한 그를 18일 프랑스 문화원에서 만났다.
만화에서 그는 유모차를 끌고 살벌한 도시를 산책하며 권력의 속살을 넘겨다보는 한가로운 산책자의 이미지였다. 흔히 그의 작품을 만화 르포르타주로 분류하지만, 최루탄과 짱돌을 피해 도망다닌 일화를 담은 <굿모닝 예루살렘>을 조 사코의 만화 르포르타주 <팔레스타인>과 같은 장르로 묶기는 곤란해 보인다. 기 들릴 자신도 “만화 르포르타주를 그리는 사람들은 저널리스트처럼 진실을 알리는 것을 소임으로 삼지만 나는 외국 생활동안 기록한 개인적인 스케치나 노트들을 바탕으로 마치 여행지에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엽서를 보내는 기분으로 그렸다”고 했다. 그는 있었던 일을 기록한 뒤 나중에 재미있는 순서로 사건을 추려 작품을 만든다고 했다. 기록과 취재에 근거하는 것은 저널리즘과 비슷하지만 재미를 기준으로 선별하는 태도는 르포르타주와는 결이 다르다.
기 들릴은 시민단체인 ‘국경없는 의사회’에서 일하는 부인을 따라 2005년에는 버마에, 2008년에는 동예루살렘에 1년 동안 머물렀다. 세계 최대의 출판만화축제인 2012년 앙굴렘 국제 만화페스티벌에서 최고 작품상을 수상한 <굿모닝 예루살렘>은 이슬람교와 유대교 근본주의가 서로 총을 겨눈 숨막히는 도시에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가끔은 소풍을 다니며 군인들의 눈을 피해 스케치를 하는 한 외국인 가족의 모습을 그린다. <굿모닝 버마>에선 숨막히는 통제, 날씨, 질병에 시달리는 외국인의 좌충우돌 버마 생활을 그리면서 실은 좌충우돌하는 것은 이 나라의 시스템 자체일지도 모른다고 암시한다. 심각한 분쟁지역에서 그려낸 유머가 역설이 되어 독자들을 끌어당긴다. “이러한 역설들은 제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그 지역과 체제 자체가 품고 있던 역설일지도 모릅니다.” 기 들릴의 설명이다.
자유주의자 외국인이 체제와 일으키는 충돌과 역설이 만화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평양>부터다. 그는 “아시아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일하면서 중국, 북한, 에티오피아, 베트남 등을 돌았는데 중국 선전(심천)에서 일할 때만 해도 신기하고 낯선 문화에 더 주목했다. 평양에서 2달 동안 지낸 경험을 그리면서 권력과 독재에 대한 이야기를 포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먼저 기록하고 나중에 그리는” 그는 에티오피아에 머물면서 평양에서 몰래 숨겨 나온 선전물, 일기, 사진 등을 바탕으로 그곳 사람들의 얼굴과 한글까지 따라 쓰며 만화책 <평양>을 그렸다. “평양에서는 공항에서 내렸을 때부터 시간이 1950년대에서 멈춰 있는듯 했다”고도 했다. 기 들릴 작가는 종이에 잉크와 펜으로 선을 그리고, 배경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작업하지만 <평양>은 흑연 가루로 일일이 명암을 표현했단다. 앙굴렘 페스티벌에서 위안부 문제를 그린 한국 만화를 처음 접한 그는 “일본 만화의 형식주의에서 탈피한 한국만화의 자연친화적인 그림 스타일이 흥미롭다”는 평을 남겼다. 19일 프랑스 문화원에서 만화가 오영진 작가와 함께 북한 상황을 강연한 그는 21일과 22일에는 서울 국제도서전에서 한국팬들을 만날 예정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프랑스 문화원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