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리뷰] 음악영화 ‘러덜리스’
낯선 음악영화가 찾아왔다. 영화 <원스> <비긴 어게인> <위 플래쉬>에서 소리는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넘어서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멜로디와 이야기, 박자와 인생이 맞아떨어질 때 영화도 이야기도 행복하다. 그런데 9일 개봉하는 영화 <러덜리스>는 아름다운 음악 뒤편 윤리적 난제를 품고 있는, 서사가 무거운 음악 영화다.
광고기획자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있는 샘(빌리 크루덥)은 이혼한 전부인과의 사이에 아들이 있다. 쾌활하고 다정한 아버지다. 어느날 대학에 다니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티브이에서 캠퍼스 총기난사 사건 보도를 본다. 그가 이 세상에서 다시는 아들을 볼 수 없게 됐다는 뉴스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샘은 망가진 모습으로 집도 없이 보트에서 산다. 키가 없는 배라는 뜻의 러덜리스(Rudderless)라는 제목은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상태를 빗댄 말이다. 여기까지는 음악이 거의 없다. 아들을 잃고 감정이 거세된 아버지와 어머니의 표정은 무섭도록 담담하다. 그런데 샘이 아들이 남긴 음악을 듣고 다시 부르면서 음악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캠퍼스 총기사건으로 아들 죽자
아들이 남긴 노래 부르는 아버지
노래 뒤에 숨겨진 아픈 진실
‘음악은 언제나 옳은가’ 질문 던져 음악을 매개로 사람들이 연결되는 것은 음악영화 공식 그대로다. 샘은 동네 술집에서 아들 나이 또래의 청년 쿠엔틴(안톤 옐친)을 만나 함께 아들이 남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처음에 샘의 기타 한대로 시작해 듀오로, 나중엔 밴드가 되는 과정은 영화 <비긴 어게인>을 연상시킨다. 많은 음악 영화에선 작은 소리가 큰 울림통을 얻는 서사가 동반한다. 음악이 퍼져나가는 과정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음악이 이야기를 건넨다. “친구로 남아주겠니.” 샘과 쿠엔틴이 처음으로 함께 부르는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가사가 중요하다. 마지막에 아버지는 비로소 아들의 죽음, 아들에 대한 사랑을 인정하면서 이렇게 노래한다. “숨을 들이쉬고 발을 내디뎌. 세상은 너 없이 돌아가라지. 어쩌면 사랑만이 답일지 몰라.” 영화 전반부엔 <러덜리스>의 소박하지만 인상 깊은 포크록풍 음악은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가진 듯 들린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하고 1시간 뒤 아버지가 말하지 않았던 것, 아들이 전하지 않았던 것들이 밝혀지고 나면 같은 음악이 사뭇 다르게 들릴 수 있다. 이 영화에선 질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음악이 있기 때문에 질문은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음악은 언제나 옳은가. 음악이 우리를 속이고 기만할 수도 있는가. 캠퍼스 총기난사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인 미국에선 <러덜리스>는 잔인하거나 성적인 묘사가 없음에도 17살 미만은 보호자 없이는 볼 수 없는 아르(R)등급을 받았으며 “부도덕한 영화”라는 비평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 관객들은 또 다르게 읽을 것 같다. 샘과 쿠엔틴이 함께 연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팔자주름 깊은 술집의 사장이 윌리엄 메이시다. <파고> <매그놀리아> 배우였던 그는 <러덜리스>로 감독에 입봉했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아들이 남긴 노래 부르는 아버지
노래 뒤에 숨겨진 아픈 진실
‘음악은 언제나 옳은가’ 질문 던져 음악을 매개로 사람들이 연결되는 것은 음악영화 공식 그대로다. 샘은 동네 술집에서 아들 나이 또래의 청년 쿠엔틴(안톤 옐친)을 만나 함께 아들이 남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처음에 샘의 기타 한대로 시작해 듀오로, 나중엔 밴드가 되는 과정은 영화 <비긴 어게인>을 연상시킨다. 많은 음악 영화에선 작은 소리가 큰 울림통을 얻는 서사가 동반한다. 음악이 퍼져나가는 과정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음악이 이야기를 건넨다. “친구로 남아주겠니.” 샘과 쿠엔틴이 처음으로 함께 부르는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가사가 중요하다. 마지막에 아버지는 비로소 아들의 죽음, 아들에 대한 사랑을 인정하면서 이렇게 노래한다. “숨을 들이쉬고 발을 내디뎌. 세상은 너 없이 돌아가라지. 어쩌면 사랑만이 답일지 몰라.” 영화 전반부엔 <러덜리스>의 소박하지만 인상 깊은 포크록풍 음악은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가진 듯 들린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하고 1시간 뒤 아버지가 말하지 않았던 것, 아들이 전하지 않았던 것들이 밝혀지고 나면 같은 음악이 사뭇 다르게 들릴 수 있다. 이 영화에선 질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음악이 있기 때문에 질문은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음악은 언제나 옳은가. 음악이 우리를 속이고 기만할 수도 있는가. 캠퍼스 총기난사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인 미국에선 <러덜리스>는 잔인하거나 성적인 묘사가 없음에도 17살 미만은 보호자 없이는 볼 수 없는 아르(R)등급을 받았으며 “부도덕한 영화”라는 비평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 관객들은 또 다르게 읽을 것 같다. 샘과 쿠엔틴이 함께 연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팔자주름 깊은 술집의 사장이 윌리엄 메이시다. <파고> <매그놀리아> 배우였던 그는 <러덜리스>로 감독에 입봉했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