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록한 허리에 튤립같은 치마, 유럽의 최신 오트 쿠튀르 복장을 선보이며 틸리(케이트 윈슬렛)가 돌아왔다. 25년 전 소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억울하게 마을에서 쫓겨났던 그가 화려한 패션디자이너가 돼 고향에 돌아오면서 마을은 갑자기 수근거림과 분주함으로 가득 찬다. 미혼모인 엄마(주디 데이비스)에게서 태어난 틸리가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다가 마침내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쫓겨나도록 마을 사람 전부가 공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뉴욕, 밀라노, 파리를 돌며 오트 쿠튀르 후광을 입고 돌아온 그를 이제 아무도 만만히 보지 못한다.
1950년대, 세계전쟁이 끝난 자리를 소비와 대중문화가 점령하기 시작했다. 샤넬, 크리스찬 디오르, 발렌시아가 등 패션 디자이너들은 그 문화의 기수와도 같았다. 패션이 거대 산업이 된 지금 ‘패션 정신’이라는 말은 허황된 포장처럼 들리기 쉽다. 하지만 당시엔 패션은 소수자들이 자신의 취향을 주장할 수 있는 유력한 문화적 형식이었다. 영화의 배경인 가상의 마을 던가타는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멜버른에서도 한참 떨어진 시골의 작은 마을이지만, 계급과 성차별이 뚜렷한 보수적인 마을에서 한 젊은 여자가 패션을 무기로 마을 사람들과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사실 시대적인 상징과도 같다. 여장 취향 남자나 이동식 주택에 사는 사람들이 틸리의 편에 선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어린 시절 그를 ‘땅거지’라고 놀리며 괴롭혔던 마을사람들이 틸리의 재봉틀에서 나오는 마법같은 힘에 끌려 많은 돈을 주고 계약을 맺는 모습은 마을의 신분질서가 새로운 산업 앞에 흔들리기 시작함을 말해주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겉으론 보수적인 듯 보이는 마을 사람들의 집안을 들여다보면 저마다 추악한 비밀들이 웅크리고 있다. 아버지 없는 여자아이라는 가장 만만한 약자를 희생양 삼아 마을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설정은 영화 <도그빌>과 비슷하다. 그러나 우아하고 화려한 패션으로 무장한 여자 주인공이 마을을 런웨이처럼 걸어다니며 복수하는 이야기는 결코 무겁지 않다. 19세기 여성문학처럼 소소한 재미들을 흘리는 <드레스 메이커>는 여자들의 영화다. 이 마을 여자들은 아버지나 남편, 애인 때문에 울고 웃고 평생을 불행하게 살기도 하지만 결국엔 자신들이 마을의 질서와 운명을 결정한다. <위험한 선택>과 <아메리칸 퀼트> 를 만든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조셀린 무어하우스가 감독과 각본을 맡았다.
남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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