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 다룬 영화들 강세
레버넌트·룸·스포트라이트·대니쉬 걸
아카데미서 실화 바탕한 영화 우세
SF영화에서도 CG 줄이는 경향 뚜렷
“그럴듯한 이야기보다 실화에 끌려”
레버넌트·룸·스포트라이트·대니쉬 걸
아카데미서 실화 바탕한 영화 우세
SF영화에서도 CG 줄이는 경향 뚜렷
“그럴듯한 이야기보다 실화에 끌려”
남우주연상의 <레버넌트>, 여우주연상의 <룸>, 작품상을 받은 <스포트라이트>…. 지난 2월29일(현지시각 28일) 발표된 제88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제 주요 수상작의 특징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이라는 것이다.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은 <빅쇼트>는 각색상을, <대니쉬 걸>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은 화가의 부인 역을 맡았던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여우조연상, <스파이 브릿지>에서 냉전시대 암약했던 소련 스파이를 연기한 마크 라일런스는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원래부터 영화는 실화를 소재로 차용하기를 즐기지만, 최근 들어 실화는 꾸며낸 이야기에 비해 압도적인 우세를 차지하고 있다.
■ 상상의 쇠퇴 영화평론가 한동원은 그 이유를 “대중이 갈수록 그럴듯한 이야기보다는 진짜 이야기에 끌리는 경향”에서 찾는다. “상상된 현실은 창작하는 사람의 사상이나 세계관이 설득력 있어야 하는데 그런 세계관을 설파하는 시대가 지나면서 사상의 충돌보다는 현실에 더 깊숙이 들어가고 싶은 욕구에서 실화를 찾는다”는 분석이다. <마션>이나 <인터스텔라> 같은 에스에프(SF) 장르도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해야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현상도 같은 맥락이다. 에스에프 영화에서도 점점 컴퓨터그래픽(CG)을 배제하는 상황은 뚜렷하다. 관객들은 그럴듯한 이야기, 개연성이나 핍진성보다는 원본인 현실을 진짜로 경험하길 원하는 듯 보인다.
7년 동안 가로세로 3.5m 넓이 방에 갇혀 있었다. 그곳에서 아들을 낳아 5살로 키웠다. 엄마와 함께 갇혀 살아온 아들은 이 작은 방이 세상의 전부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3일 개봉하는 영화 <룸>은 관객들을 숨막히게 한다. 그보다 더 숨막힐 노릇은 이 이야기가 실화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이다. 실화의 아우라가 영화의 느낌을 더한다.
■ 스크린과 달랐던 삶 그렇다고 실화를 고스란히 스크린에 옮기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욱 잔혹했다. 2008년 24년 동안 친딸을 감금하고 성폭행해온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프리츨 이야기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룸>의 토대가 된 실제 사건이다. 요제프 프리츨의 셋째 딸 엘리자베트는 18살 때부터 지하토굴에 갇혀서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며 7명의 아이를 낳았고 아이들이 늘어나면 맨손으로 땅을 파서 방을 늘려야 했다.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정신이나 신체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어서 영화처럼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첫째 아이가 19살이 되던 해 신장에 문제가 생겨서 할 수 없이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이를 수상히 여긴 의사의 신고로 감금 사실이 알려지게 됐다.
2월17일 개봉한 <대니쉬 걸>의 바탕이 된 최초의 성전환수술자 에이나르 베게네르의 이야기도 현실은 영화보다 냉정하다. 1920년대 당시 덴마크 법은 동성결혼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이나르가 성전환 수술을 받자 두 사람은 결혼 무효 판결을 받고 헤어진다. 그 뒤 릴리 엘베라는 이름으로 새 여권을 얻은 남편 에이나르는 4번째 수술을 받다가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난다. 부인 게르다는 이탈리아인 외교관과 재혼해 모로코에서 살다가 1936년 다시 그와 이혼하고 크리스마스카드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인간 육체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지는 영화 <레버넌트>는 1823년 회색곰에게 공격을 받은 미국의 모피 사냥꾼 휴 글래스의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 작가 마이클 푼케는 역사와 전설을 섞어서 영화의 원작이 된 소설 <레버넌트>를 썼는데 당시 어미 곰을 죽인 사람은 휴 글래스가 아니라 동료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가 동료들에게 버림받고 버려진 뒤 초인적인 힘으로 복수를 위해 돌아온 것은 사실이다.
■ 영화가 사실을 구하는 방식 인간의 악덕이 영화가 되면서 스크린은 희망을 덧입힌다. <대니쉬 걸>은 성정체성을 초월해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고 당시 법은 휴 글래스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지 않았지만 영화는 복수를 허용한다. 그러나 <레버넌트>를 만든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인공조명을 쓰지 않고 모든 장면을 롱샷으로 촬영함으로써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더했다. 실제 이야기에서 출발하기, 사실적 이미지 입히기, 사람들이 보고 싶은 결말을 찾는 것, 이것이 스크린이 실화를 가져오는 방식이다. <룸>의 원작자이면서 영화 시나리오를 쓴 에마 도너휴는 프리츨 사건을 알고 이것을 아이가 세상을 처음으로 보게 된 경험으로 꾸밀 생각을 했다. 도너휴는 잔인한 아버지보다는 엘리자베트의 모성애와 생존 본성, 회복력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도너휴는 영화 제작 노트에 “갇힌 방 안에서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태어나서부터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현대사회와 단절되어 살다가 세상으로 나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등의 질문을 적었다. 새로운 이야기의 출발이 되는 질문들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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