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주 고사동 ‘영화의 거리’에도 씨지브이 멀티플렉스 상영관이 들어섰지만 바로 옆 건물엔 벽화가 남아 있다. “전라북도가 한국의 할리우드”라는 말이 있던 시절을 기록하는 ‘전북영화사’ 그림이다. 1950~60년대 전주에선 <아리랑>(1953), <탁류>(1954), <피아골>(1955) 등 반공영화든 상업영화든 수많은 영화가 만들어졌다.
28일 밤 8시 유서 깊은 이 도시의 풍남문에 현란한 조명이 켜졌다. 옛 건축물이 미디어 아트로 새 옷을 입는 것에 맞춰 영화의 거리 끝자락에 있는 야외상영장 앞에선 레드카펫 위로 배우 정재영, 안재홍, 김동완, 권율 등이 차례로 들어섰다. 배우 이종혁과 유선의 사회로 제17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식이 시작됐다.
올해 전주영화제의 가장 큰 변화는 도심 한복판 고사동 거리에서 211편의 모든 영화가 상영된다는 점이다. 폭 8m에 길이 310m, 아무리 높아도 4층을 넘지 않는 작고 낮은 영화의 거리가 어두워지면 라틴아메리카, 동유럽, 그리스 등에서 온 낯선 영화들이 불을 켠다. 전주영화제 집행위원회는 △영화 미학의 최신 흐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영화 매체의 본질에 다가간다는 취지로 전통적인 영화의 경계를 확장하는 ‘익스팬디드 시네마’와 △영화 작가와 영화 역사, 매체성을 주제로 한 ‘시네마톨로지’ 섹션을 특별히 강조했다. 이를 위해 영화제 기간 동안 프랑스의 필리프 그랑드리외 감독,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파블로 트라페로 등이 전주를 찾는다. 한국의 박찬욱, 류승완 감독도 이곳에 머문다. 류승완 감독이 제1회 전주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상영했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올해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쳐 폐막식에서 상영된다.
2000년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을 개막작으로 삼는 등, 전주영화제는 그동안 제인 캠피언, 대런 애러노프스키, 빔 벤더스, 자장커, 홍상수, 류승완, 봉준호, 김기덕, 허우샤오셴, 벨러 터르 감독의 작품 세계를 소개해 왔다. 상업영화밖엔 볼 수 없고 온라인 영화 아카이브는 존재하지 않던 시절, 전주영화제는 새로운 영화를 보고 싶다는 열망을 실현할 거의 유일한 기회였다.
‘디지털, 대안, 독립’을 내세우며 시작했던 영화제는 지금은 ‘집중, 독립, 대안’으로 목표를 바꿨다. 이충직 집행위원장은 “초창기 ‘디지털’을 내세운 것은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영화의 민주성’에 대한 주장이었다. 지금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말하는지가 중요하다는 본질적 접근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주영화제는 이미 제작된 영화를 단순히 상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낸다는 자부심도 강하다. 김영진 수석프로그래머는 “그동안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에서 새로운 감독을 발굴해, 제작 및 배급을 지원해왔다. 그 결과 <자유낙하>(2014), <설행_눈길을 걷다>(2015) 등이 개봉하는 성과가 있었다. 이제 제작지원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짜였고, 올해는 이름도 ‘전주 시네마 프로젝트’로 바꿨다”고 말했다. 올해 전주 시네마 프로젝트에선 <우리 손자 베스트>(감독 김수현), <눈발>(조재민), <우아한 나체들>(루카스 발렌타 리너) 3편을 상영한다.
밤 9시, 트럼펫 연주자 쳇 베이커의 생애를 그린 개막작 <본 투 비 블루>가 야외광장에서 상영을 시작했다. 영화를 향한 시간이 겹겹이 쌓인 전주영화제의 첫날 밤은 이렇게 열렸다.
전주/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