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아가씨'의 박찬욱(가운데) 감독과 조진웅(왼쪽부터), 김태리, 김민희, 하정우 등 배우들이 14일 <아가씨> 시사에 앞서 칸 영화제 레드카펫에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칸/AFP 연합뉴스
칸영화제로 간 한국영화
칸 영화제가 열리는 프랑스 뤼미에르 대극장에 한국 영화 스크린의 불이 켜졌다. 13일 밤 11시45분(현지시각)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이 처음으로 상영됐고, 14일 저녁 8시엔 같은 곳에서 황금종려상에 도전하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11일 한국에서 개봉한 나홍진 감독의 <곡성>은 18일 칸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칸 영화제 소식을 전하는 <스크린> 14일치는 ‘한국 영화의 힘을 보여주다’라는 기사에서 “강렬한 3편의 기대작을 가지고 한국이 칸에 돌아왔다”며 한국 주요 제작사들과 영화 산업 현황, 최근 부산 국제영화제로 불거진 표현의 자유 문제 등을 고루 보도했다. 이번 칸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 성장을 보여준 세 편을 살펴봤다.
경쟁부문 ‘아가씨’
동성애 소재 영국소설 내용을
1930년대 일제 조선 배경으로
귀족 상속녀 둘러싼 욕망 그려
“기존 박찬욱 영화” “너무 인상적”
현지 반응 극단적으로 엇갈려
■ 황금종려상 도전하는 아가씨 “정오 되면 와서 문 두드려줘. 꼭.” 예고편 속 아가씨의 속삭임에 화답하듯 14일 저녁 뤼미에르 극장 앞엔 수천명의 긴 줄이 섰다. 영화에 대해 미리 알려진 이야기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 동성애를 소재로 한 세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 스미스>의 내용을 1930년대 조선으로 가져왔다는 것뿐이어서 동성애 묘사와 박찬욱의 영화적 서사가 어떻게 결합할지 극장 안 2000석은 기대감으로 부풀어올랐다.
드디어 문을 연 아가씨의 저택은 우선 1930년대의 호화로운 분위기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신분제도가 남아 있고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가 좋다고 생각했다”는 박 감독은 “세상에서 가장 많은 책을 품고 있는” 서재를 중심으로 저택 곳곳에 욕망과 비밀의 공간을 숨겨두었다. 정교하게 설계된 이 저택에서 마조히즘과 사디즘, 동성애 등 금지된 성적 욕망을 표현하는 애무조차도 모두 치밀하게 계산된 기술적 행위처럼 보인다. 영화는 열정적이라기보다는 차갑고도 아름답다.
후견인인 이모부(조진웅)의 엄격한 보호 아래 살아가는 부유한 상속녀 히데코(김민희)의 넓은 방 문을 열면 사실은 학대당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아가씨의 외로운 세계가 드러난다. 일찍부터 고된 세상살이를 깨친 하녀 숙희(김태리)는 아가씨의 재산을 노린 백작(하정우)의 계획을 돕기 위해 아가씨의 하녀로 일한다. 그러나 백작의 계획은 두 여자가 서로에게 급히 끌리면서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원작 소설에서 정교한 인연의 밧줄로 얽혀 있는 두 여자는 운명처럼 서로에게 끌린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에서 두 여자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서로에게서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우리 아가씨를….” “고아인 숙희를….” 서로를 배신할 때조차 서로를 가엽게 여기는 이 말들은 실은 어린 시절 버림받은 자신을, 그 절박한 외로움을 가엽게 여기는 말이기도 하다. 자신을 낳다가 엄마가 죽은 아가씨나 범죄를 저지른 엄마가 처형당한 뒤 의지할 곳 없는 고아로 커온 숙희는 아기가 엄마 젖을 찾는 것처럼 서로를 탐하다가 문득 킥킥거린다. 그들의 정사 장면은 에로틱하다기보다는 위안을 얻고 싶어 손가락을 물고 잠드는 어린이들을 보는 듯 유아적이고 유희적이다.
감독은 또 아가씨와 하녀의 두 가지 시선으로 나눠 2편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원작에다 백작과 이모부, 남자들의 이야기를 보태 영화를 3부로 나눴다. 자기충족을 이루는 두 여자는 사랑을 경멸하는 백작이나 “소소한 도락”에 목숨을 거는 이모부 같은 영화 속 남자들보다 충만한 존재다. 결국 영화는 동성애가 아니라 박찬욱만의 방식으로 써 내려간 여성성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아름답게 설계된 미장센 속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가학의 드라마, 속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인물들, 퇴폐적이면서도 순진한 분위기, 그리고 여성이 벌이지만 여성의 것이 아닌 듯 보이는 성애 장면들을 품은 영화가 공개되자 현지 반응은 극단적으로 엇갈렸다. 영국에서 온 한 영화평론가는 “기존 박찬욱 영화에 비해 새로울 것이 없다”고 실망을 나타낸 반면, 토론토영화제 캐머런 베일리 집행위원장은 “너무나 인상적인 영화였다. 아직도 내 마음속 울림이 사그라들지 않는다”고 했다. 영화 후반부 잔인한 장면이 이어지자 한 관객은 호흡곤란을 호소했고 일부 관객들은 극장을 나가기도 했다.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산행’
한국발 첫 대작 좀비영화로
생존위험 인간의 본성 드러내
연상호 감독의 두번째 칸 무대
시사회 끝나자 5분간 기립박수
“설국열차만큼 흥행 성공할 듯”
■ 한국적 좀비 영화 부산행 그보다 하루 앞선 13일의 금요일엔 한국 좀비들로 만석을 이룬 열차가 출발했다. 한국발 첫 대작 좀비영화로 기대를 모았던 <부산행>이 이날 밤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공개됐다. 과연 <부산행> 열차는 지극히 한국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출발했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전국으로 확산되는데 사람들은 또 구제역인 줄 알고 무관심하고, 정부는 걷잡을 수 없이 생겨나는 좀비들을 “불순한 시위세력”이라고 부르며 정치적 수습에만 재빠른 모습도 기시감이 느껴진다.
빠른 속도로 부산을 향해 달려가는 재난 열차에서 좀비로 변한 사람들이 칸칸마다 갇혀 있는 긴박한 상황은 다른 액션이 없어도 영화에 속도감을 부여한다. 좀비와 인간이 피투성이가 되어 뒹구는 아수라장 속에서 아직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도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밀어내면서 자꾸 좀비를 닮아가게 된다. 재난은 인간의 심성을 드러낸다. 공유가 맡은 석우는 증권사 펀드 매니저로 인간관계에서도 이득이 되는 점만 취하는 철저히 계산적인 사람이다. 석우의 딸 수안, 야구부 4번타자와 야구부 응원단장, 만삭인 성경(정유미)과 남편 상화(마동석), 고속버스 회사 상무(김의성)와 열차 기관사, 승무원 등은 자신의 생존과 다른 사람의 처지를 돌아보는 일을 맞바꾸거나 자신을 위하는 쪽을 택하면서 재난을 헤쳐나간다.
연출을 맡은 연상호 감독은 이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2011)으로 제65회 칸 영화제 감독 주간에 초청됐던 감독으로 이번이 두번째 칸행이다. <부산행> 프리퀄로 제작된 애니메이션 <서울역>은 제34회 브뤼셀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실버 크로를 수상했다. 애니메이션 제작 경험을 살려 파도처럼 밀려오는 좀비떼들과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장면들에 만화적인 상상력을 발휘해 오락적 쾌감을 더한다.
칸 시사회에선 118분짜리 영화가 끝나고 5분 동안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영화전문지 <스크린 데일리>는 온라인 리뷰에서 “캐스팅 문제나 한국적 정치 상황에 세계 관객이 공감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문제는 있지만 이 영화는 봉준호 <설국열차>가 박스오피스에서 거뒀던 것과 비슷한 성공을 기대할 만하다”고 평했다. <부산행>이 초청받은 미드나잇 스크리닝 섹션은 장르 영화 중에서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영화들을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상업영화에서 빠지기 쉬운 신파 요소와 넘치는 메시지로 열차 몇 칸은 덜컹거렸지만 <부산행> 상영이 끝나고 칸은 “흥미로운 작품이 나왔다”며 설레는 분위기였다. 영화를 만든 제작사 뉴(NEW)의 한 관계자는 “해외 구매 문의가 잇따르고 있으며 벌써부터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하고 싶다는 제안이 나올 정도로 <부산행>의 흥행성을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비경쟁부문 ‘곡성’
시골마을 미스터리 살인사건에
무속 등 ‘오컬트’ 더한 스릴러물
비경쟁 유일 ‘기대작’ 꼽히기도
■ 곡성에 귀기울이는 칸 경쟁부문의 박찬욱 감독 못지않게 올해 칸 영화제에서 주목하는 사람은 <곡성> 나홍진 감독이다. 미국 영화지 <아이온시네마>는 올해 칸 비경쟁부문 진출작 중 유일하게 <곡성>을 기대작으로 꼽았다. 또 지난 3월 베를린국제영화제 기간 열렸던 유로피안 필름 마켓에서도 116개국에 선판매됐으며 나 감독은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제작 제의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나 감독을 주목하는 이유는 전작 <추격자>와 <황해>가 얻었던 인기와 인지도 덕분이다. 범죄 스릴러물의 보편적 형식에 더해 한국과 아시아의 전통적 종교에 기반한 신비주의적 요소를 대폭 들여온 <곡성>도 세계를 오싹하게 할 수 있을까? <곡성>은 전라남도 곡성 한 시골 마을에서 번져가는 원인모를 살인 사건을 다룬다. 감독은 기독교적 세계관과 무속적 요소, 정체불명 주술을 동원해 서구의 악마와도 동양의 귀신과도 다른 악한 존재를 만들어낸다. 이번 칸 영화제는 현란하게 피를 튀기는 낯선 장르의 156분짜리 한국 영화에 세계 관객들이 얼마나 공명할 수 있을지를 가르는 무대가 될 것이다.
한국 영화 해외 배급사 화인컷 김윤정 이사는 “<추격자>가 처음 나왔을 때 다들 신인 감독이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에 경악했고 추후 작품에 대해서도 당연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다”며 “<곡성>도 외국 바이어들을 대상으로 한 시사에선 ‘정말 최고다’라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전했다.
이번 칸 영화제에 진출한 한국 작품들이 예전과 달라진 점은 모두 하나같이 많은 제작비를 들인 대형 영화라는 점이다. 장병원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예전엔 홍상수, 김기덕 등 감독 개인의 예술성과 작가주의에 기댄 영화들이 해외 영화제에서 인정받았다면 씨제이엔터테인먼트(<아가씨>), 뉴(<부산행>), 이십세기폭스코리아(<곡성>) 등 영화산업을 주도하는 제작사들이 만든 영화가 칸에 진출한 현상은 한국 영화산업이 정착됐다는 것을 알려주는 시도인 동시에 활로를 찾는 계기”라고 말했다.
칸/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1930년대 일제 조선 배경으로
귀족 상속녀 둘러싼 욕망 그려
“기존 박찬욱 영화” “너무 인상적”
현지 반응 극단적으로 엇갈려
'아가씨'. 사진 각 배급사 제공
생존위험 인간의 본성 드러내
연상호 감독의 두번째 칸 무대
시사회 끝나자 5분간 기립박수
“설국열차만큼 흥행 성공할 듯”
‘부산행’. 사진 각 배급사 제공
무속 등 ‘오컬트’ 더한 스릴러물
비경쟁 유일 ‘기대작’ 꼽히기도
‘곡성’. 사진 각 배급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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