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백엔의 사랑>에서 은둔형, 니트족, 기생형 독신 등 현재 일본 청년들의 무기력한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던 이치코는 “한번만 이기고 싶다”는 목표를 가지면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링에 오른다. 사진 씨네룩스 제공
일본영화 ‘백엔의 사랑’
부모집에 얹혀사는 30대 여성이
권투 배우며 변해가는 과정 그려
부모집에 얹혀사는 30대 여성이
권투 배우며 변해가는 과정 그려
“승리의 맛은 참 좋지.”(<백엔의 사랑>, 감독 다케 마사하루) 우리도 모두 안다. 그런데 자립을 막는 현실 속 무기력하게 살도록 조건화된 청년이, 그 맛 한번 보기가 쉽지 않다.
일본 청년 6명 중 1명이 부모에게 기생해 사는 패러사이트 싱글이라고 한다. 전문대를 졸업한 뒤 일자리 한번, 연애 한번 경험하지 못한 채로 도시락 가게를 하는 엄마에게 얹혀살아가는 사이토 이치코(안도 사쿠라)는 청년들이 가난하고 무기력한 사회 분위기에선 흔하디흔한 32살 여자다.
“개인도 사회도 할 수 있다, 100엔 생활!” 편의점에 붙은 구호는 오랜 저성장 경제에 시달려온 일본의 단면을 표현한다. 그 그늘에서 웅크리고 사는 사람들의 삶도 진열대 위 100엔(약 1000원)짜리 상품과 얼추 비슷하다. 이혼하고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온 둘째 딸 후미코(고이데 사오리), 남편에다 딸 둘, 손주까지 떠안은 엄마(이나가와 미요코), 학교에서 늘 왕따를 당하는 조카 다로, 뚜렷한 기록 하나 없이 나이가 많아 은퇴하고 일자리를 찾아 떠도는 전직 권투선수 가노(아라이 히로후미), 우울증에 걸린 편의점 점장, 편의점에서 유통기한 지난 식품들을 훔쳐서 먹고 사는 이케우치 등 이치코 주변 인물들도 하나같이 전형적인 하류세대 인물들이다. 어느 날 이치코는 동생에게 쫓겨나듯 집을 나와 편의점에서 일자리를 구하지만 여전히 완벽한 절망도 이렇다 할 희망도 없이 살아간다.
영화 초반 15분이 지나도록 권투중계와 게임에 빠져 산다는 것 말고는 이치코의 속내나 개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처음으로 연애감정을 갖게 된 가노나, 같은 편의점에서 일하는 이혼남 등이 이치코를 만만하다는 이유로 툭 건드리고 지나가버리는데도 별 반응이 없다. 이들 세대는 희망이나 의욕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폭력에 반응하는 감성의 촉수마저 거세돼 버린 건 아닐까?
그러나 이치코가 늘 티브이로 보기만 했던 사각의 링에, 멀리서 쳐다보기만 했던 동네 권투 체육관에 들어설 마음을 먹으면서 모든 것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무한테나 맞고, 사랑하는 남자에게조차 바보 취급을 당하던 그의 눈빛이 처음으로 매서워진다.
<백엔의 사랑>은 부모들을 대신해 젊은이들의 등짝을 때리는 영화다. 무기력한 세대들이 자기 목표를 갖고 근성을 발휘하고 두드려 맞아도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판타지이자, 뚱뚱하고 어두운 인상의 여자가 꿈을 가지면서 날렵하고 날카로운 존재로 변해가는 것을 보여주는 성장물이다. 이런 판타지는 청년의 것이어야 한다. 글러브를 낀 이치코는 처음으로 그를 위협하는 남자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아파, 아파, 아파”로 시작해 “100엔의 사랑에 8엔의 세금, 눈물 따윈 방해만 되고, 왜 어째서 잘 풀리지 않는 걸까? 살 거야!”를 외치는 영화의 주제가 ‘백팔엔의 사랑’ 그대로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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