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닥터 스트레인지' 소설 영화화 붐
‘7년의 밤’ ‘종의 기원' 등 신작도 줄줄이
원작과 영화 한뿌리지만 가는 길은 달라
‘7년의 밤’ ‘종의 기원' 등 신작도 줄줄이
원작과 영화 한뿌리지만 가는 길은 달라
올해의 시작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캐롤>이었다. 다양성 영화 부문에선 눈에 띄는 성적을 거둔 <캐롤> 개봉에 맞춰 원작 소설이 우리말로 번역되면서 극장과 서점에서 동시 개봉했다. 온라인 서점 예스24에서 찾아보니 올해 1월1일부터 10월31일까지 개봉한 영화 중에서 소설 원작이 있는 영화는 26편. 순위에 오르지 않은 그래픽 노블이나 슈퍼히어로물까지 합친다면 실제론 30편이 넘는다. 10월26일 개봉한 마블 코믹스 원작 <닥터 스트레인지>가 첫 주말까지 240만 관객을 동원한 데 이어 해리 포터 작가 조앤 케이 롤링의 <신비한 동물 사전>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오는 16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소설 <고백>을 영화로 만든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은 지난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마스터클래스에서 “원작이 없으면 투자를 받기 어렵기 때문에 일본의 거의 모든 영화는 원작을 바탕으로 한다”고 했다. 한국 영화도 최근 원작 도입이 활발하다. 박찬욱 감독 <아가씨>는 세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 스미스>를 원작으로 했고, 박범신 작가의 <고산자>를 강우석 감독이 <고산자, 대동여지도>로 만들었다. 여름 흥행작 <덕혜옹주>와 <터널>도 원작이 있는 영화였다.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 <종의 기원>과 기욤 뮈소의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등 소설 원작 영화들도 줄줄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와 원작이 같은 길을 걸으란 법은 없다. 예스24에서 영화가 된 책의 판매 순위를 꼽아보니 대부분 책의 판매는 영화 관객 수와는 큰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나왔다. 김성광 예스24 문학담당 엠디는 “예전처럼 영화 흥행이 책 판매를 부추기기보다는 이미 검증된 원작이 계속 인기를 누리는 경향”이라고 말했다.
책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은 “좋은 영화는 원작을 과감히 덜어내고, 그 빈 곳에 자신의 눈으로 본 세상을, 자기의 영화적 색깔과 시각적 요소로 섬세하게 채우는 것”이라고 했다. 소설 원작 영화들 중에서 성공적으로 영화적 색깔을 채운 영화는 무엇일까? 최근 개봉한 영화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미 비포 유>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인페르노> 등 4편을 원작에 비춰 다시 살펴본다.
■ 영화로 만들길 잘했어 ‘미스 페레그린’ 팀 버튼이 영화화를 선택한 소설 <미스 페러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국내 번역본 제목, 영화는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은 세 권으로 되어 있다. 2011년 1권을 시작으로 2권 <할로우 시티>, 3권 <영혼의 도서관>까지 한국에 번역되었다. 1권이 나왔을 때 이미 팀 버튼이 영화화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고 한다. 팀 버튼은 영화화하면서 설정을 바꾸거나 합치고, 클라이맥스의 ‘할로우 게스트’와의 싸움도 간결하게 정리했다. 1권의 이야기를 주요하게 가져오되 나머지 시리즈의 이야기도 집약했다.
남자 주인공 제이크 포트먼(에이사 버터필드)과 사랑에 빠지는 엠마(엘라 퍼넬)는 소설에서는 불을 다루지만 영화에서는 몸이 가벼워 공중에 뜬다. 공중부양을 하는 올리브는 소설에서는 꼬마다. 영화에선 ‘공기’를 다루는 엠마가 물에 잠긴 난파선 공간의 공기를 쓸어내 숨을 쉴 수 있게 만드는 인상적인 장면도 만들었다. 소설에서 이상한 아이들이 배를 탈출하면서 올리브가 망을 보기 위해 줄을 달고 하늘 위로 올라가는 장면은, 영화에서 엠마가 평소에 허리에 줄을 달고 다니는 장면으로 응용되었다. 시간을 조절하는 임브린족인 미스 페레그린 역을 에바 그린이 맡으면서 대체 불가능한 매력을 선사한다. 제이크가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는 장면 역시 팀 버튼은 영화의 시간 테마와 연결하여 극적으로 구성해냈다.
소설은 사진수집가인 원작자 랜섬 릭스가 사진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구성해냈다. 작가는 소설 3권 곳곳에 아이디어를 얻은 ‘이상한 사진들’을 첨부했다. 제국주의 시대 서양인의 ‘이상한 것에 대한 몰두’를 보여주는 듯해 불편한 감정을 불러내기도 한다. 사진을 통해 소설은 ‘이상한 세계’가 실재한다는 느낌을 주려 한다. 실사임에도 ‘가상 세계’라는 점이 두드러지는 영화와 차이나는 지점이다.
■ 둘 다 봐도 괜찮아 ‘미 비포 유’ <미 비포 유>는 영화와 소설의 높은 ‘싱크로율’로 환호받은 몇 안 되는 예다. <왕좌의 게임>의 독보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대너리스 타르가옌을 연기한 에밀리아 클라크가 꿀벌 스타킹을 사랑하고 어디서 골라 오는지 알 수 없는 민트색 신발을 신는 소설 속 루이자 클라크를 사랑스런 여인으로 재현했다. 영화는 올해 6월 개봉해 한국에서도 한달간 박스오피스 10위권을 유지하고 94만 관객을 끌어모았다.
조조 모이스의 소설 <미 비포 유>는 세계에서 800만부가 팔렸다. 한국에서도 2014년 발간 뒤 11주간 1위를 차지했다(교보문고 집계). 저널리스트 출신인 모이스는 <미 비포 유>에서 영국 하층민 ‘차브’를 공들여 묘사하고 ‘보조자살’로 존엄사의 문제를 끌고 오면서 ‘로맨스소설’의 외양 속에 사회문제를 심어놓았다. 전작 <원플러스원>은 싱글맘과 입양의 문제, <허니문 인 파리> <당신이 남겨두고 간 소녀> 연작에서는 미술품 저작권 문제를 다루면서, 전쟁 속에서 여자의 힘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이야기 등을 풀어놓는다.
모이스는 <미 비포 유>의 인기에 힘입어 후속편도 썼다. <애프터 유>는 존엄사로 윌이 죽은 지 2년 후에서 시작된다. 루이자는 공항의 카페에서 서빙을 하며 지내고 매일 밤 취해 있다. 어느 날 밤 집으로 ‘윌 트레이너’의 분신이 찾아온다. <미 비포 유>를 잊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작은 위로가 되겠지만, ‘윌’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독자에게는 소설이 재미없을 것이다.
■ 하나만 봐도 충분해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를 내리고 고양이 먹이를 준 뒤 일터인 우체국으로 간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좌절한 주인공 앞에 악마가 나타나 세상에서 한 가지를 없앨 때마다 수명을 하루씩 늘려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일본에서 140만부가 넘게 팔린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은 영화 <전차남> <고백> <악인> <늑대아이> 등을 제작했던 프로듀서 가와무라 겐키가 쓴 소설이다. 그는 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동명 영화(감독 나가이 아키라)에서도 프로듀서를 맡았다. 이 일본의 흥행작 프로듀서는 죽음이라는 심각한 주제를 따뜻하고 가벼운 방식으로 엮어내면서 일본 특유의 일상적 감각으로 읽는 재미를 깨운다.
원작은 섬세하고 영화는 좀더 출렁인다.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주인공 두 남녀의 이야기를 영화 <바람의 검심> 시리즈와 드라마 <블러디 먼데이> 등으로 한국에도 얼굴을 알린 사토 다케루와 이미 여러번 한국을 다녀간 미야자키 아오이의 얼굴로 새롭게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소설에선 영상에서 생략된 주인공의 감정과 고양이의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우리가 정말 마지막에 하고 싶은 일은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 같은 버킷 리스트를 좇아다니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천천히 생을 비우는 일이 될 것이라는 작품의 주제는 영화나 소설 중 하나만을 감상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다. 가볍고 따뜻한 인생철학을 전하는 책이 적절히 짜인 기획영화 같다면, 영화는 기억에 남을 몇가지 이미지를 지닌 에세이 같다.
■ 원작한테 미안해 ‘인페르노’ 흑사병이 세계를 피로 물들인다는 상상, 단테의 <신곡>이 경고했던 지옥(인페르노)의 형벌들. 보티첼리의 <지옥도>가 살아 꿈틀대는데도 조금도 무섭지 않다.
세계 인구를 절반으로 줄일 계획을 세운 유전학자 조브리스트는 흑사병 바이러스에 대한 암시를 남기고 죽는다. 하버드 기호학자 로버트 랭던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세계보건기구의 초청을 받아 이탈리아로 온다. 그러나 누군가의 습격을 받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쫓기는 신세가 된다. <다빈치 코드> <천사와 악마>에서 상징을 독해해 인류 종말을 막아내곤 했던 기호학자는 이번엔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적과 싸워야 하는데, 걱정할 것은 없다. 적들은 그림자처럼 다가와선 맥없이 죽어 나간다. 이탈리아에서 터키까지 가는 여정엔 단테의 데스마스크나 변형된 <지옥도> 등 수많은 단서가 쏟아지지만 알고 보면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에서 상징과 기호는 장식품일 뿐, 사건의 퍼즐 조각으로 스릴러에 기여하지도 못한 채 버려진다.
소설가 댄 브라운과 론 하워드 감독은 <다빈치 코드>와 <천사와 악마>에 이어 3번째 파트너가 됐다. 감독은 전작에서도 복잡한 원작을 단순화하면서 소설 독자들로부터 원성을 샀지만 이번엔 아예 원작의 선한 인물을 악역으로 바꿔버렸다. 영화적으론 더 나은 선택일 수 있었겠지만 스릴러의 질을 높이진 못했다. 댄 브라운은 책 서문에서 누누이 “실화를 기반으로 한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원작부터가 긴장감을 조성하는 데 실패한 탓이기도 하다.
남은주, 구둘래 기자 mifoco@hani.co.kr
팀 버튼의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의 이상한 아이들. 20세기폭스코리아 제공
책 <페러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랜섬 릭스 지음·이진 옮김, 폴라북스 펴냄).
<미 비포 유>의 에밀리아 클라크(왼쪽·루이자 클라크 역)와 샘 클래플린(윌 트레이너 역).
책 <미 비포 유>(조조 모예스 지음·김선형 옮김, 살림 출판사 펴냄).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크리픽쳐스 제공
책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가와무라 겐키 지음·이영미 옮김, 오퍼스프레스 펴냄).
<인페르노>. 유피아이코리아 제공
책 <인페르노>(댄 브라운 지음·안종설 옮김, 문학수첩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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