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 훙커우 의거를 다룬 영화 <강철무지개> 제작에 나선 이민용 감독.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1932년 12월19일, 상하이를 점령했던 일본군 사령관을 향해 폭탄을 던졌던 윤봉길 의사가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미쓰코우지산 서북골짜기에서 형틀에 묶인 채 미간에 총을 맞고 순국한다. “장부출가생불환”(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글을 남기고 집을 떠난 지 2년 만의 일이다. 그의 나이 24살 때다. 어느덧 그가 살았던 날들보다 3배 넘는 시간이 흘러 서거 84주기가 됐다. 이민용 감독은 그야말로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고 간 이 사람에게 꽂혔다. 그는 2년여 동안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를 그린 영화 <강철무지개>(가제)의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펀딩사이트 와디즈(www.wadiz.kr/Campaign/Details/11257)에서 제작기금 모금에 들어갔다.
“독도 때문에 신세 망친 감독”. 영화계에서 그를 부르는 말이다. “2004년 3년8개월 동안 독도를 지킨 홍순칠과 33인의 독도의용수비대 이야기를 듣고 의미도 있지만 에피소드들이 재미도 있어서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상업영화 감독이니 이런저런 요소들을 재미있게 잘 만들 셈으로 기획은 했는데 뜻밖의 반대에 부딪쳤다. ‘독도 영화에 투자를 했다가는 모기업이 일본 시장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니 안 된다.’ 대기업 계열 두 대형 배급사가 마치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똑같은 답변을 했다.”
오기가 발동한 이 감독은 독도 영화를 만들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는데 심지어 2014년 1월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유럽한인총연합회 정기총회까지 찾아가 제작비를 모금하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독도 영화는 좌절됐지만 그전까지는 <개 같은 날의 오후>(1995), <인샬라>(1997), <보리울의 여름>(2003) 등 상업영화를 해오던 감독은 반일프로젝트에 정통한 사람이 됐다. “10년 동안 독도 프로젝트에 매달렸더니 영화 경력 단절로 여러 어려움을 겪게 됐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에 두루 관심이 많아지면서 더 많은 소재가 생겨났다”는 감독이 붙잡은 것이 윤봉길 이야기다.
김구와 찍은 사진, 한 손엔 수류탄 다른 손엔 권총을 들고 찍은 사진, 그리고 처형 직후의 사진…. 윤봉길 의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몇가지 사진으로 전해진다. 감독은 여기에 상상력을 더해 그가 집을 떠난 2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만주와 중국 본토 상하이 등을 무대로 한 첩보 드라마를 구상했다. 그러나 한·중 프로젝트로 진행되는 100억원대 영화를 위해 중국 상하이문화투자유한공사와 투자 계약을 맺었지만 사드 배치 뒤 중국 정부에서 투자 허가를 보류했다. 독도 영화의 운명이 재현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해진 감독은 직접 제작비 모금에 나섰다. “훙커우공원 의거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새로운 전기를 만든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우리가 이루어낸 현대화의 본질적 문제가 숨어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들여다볼 만한 캐릭터를 가진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이 감독이 윤봉길 프로젝트에 매달리는 이유다.
“사실은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겠지만 윤봉길은 나와 비슷한 면이 있다. 소학교 2학년 때 3·1운동을 목격하고선 일본식 노예 교육 제도라며 바로 학교를 자퇴했다. 그 불같은 성정, 타협하지 못하는 점 때문에 더 애착하는 것 같다.” “독립군 마인드” 때문에 살기 힘들다는 감독은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관객들에게 영화를 선보일 날을 꿈꾼다.
남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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