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티쇼 <어프렌티스>에서 “너는 해고야”라고 말하는 모습. 경선 당시 버락 오바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질문받자 이 말을 하기도 했다. 유튜브 화면 갈무리
“이 남자는 왜 항상 똑같은 옷을 입죠?” 몸이 지금처럼 붇지 않았던 옛날이나 만 70살에 미국 제45대 대통령이 된 지금이나 40년간 도널드 트럼프가 타블로이드 신문, 텔레비전, 영화에 등장하는 모습은 똑같다. 검정 슈트에 빨간색 넥타이. 그는 대통령이 되기까지 부와 엔터테이너로서의 경력과 유명세를 철저하게 이용했다. 극우적 언사로 상실감에 시달리는 백인 중하층 남자 노동자 계층의 마음을 빼앗은 그의 대선 행적은 포퓰리스트 정치인 배역에 대한 잘 훈련된 메소드 연기처럼 보인다. 트럼프가 걸어온 ‘연기 없는 연기’ 인생을 돌아본다.
도널드 트럼프는 도널드 트럼프를 연기한다. ‘부자’의 대표자가 된 트럼프는 영화 장면에 부자들이 필요할 때 자주 호출되었다. <나홀로 집에 2>(1991)에서는 매콜리 컬킨이 으리으리한 호텔에서 길을 잃었을 때 길을 가르쳐주는 인물로 등장한다. 트럼프는 컬킨이 길을 잃은 뉴욕 플라자호텔의 소유주였다. 아동 영화 <꾸러기 클럽>(1994)에서는 부자 소년 월도의 아버지로 나온다.
영화 <나홀로 집에 2>에 카메오로 출연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유튜브 화면 갈무리
영화의 장면들은 그의 성격을 포착한다. 영화 <에디>(1996)에서는 “에디를 고용한 것은 원래 내 아이디어”라고 거드름을 피운다. <미스터 커티>(1996)에서는 흑인 여성 우피 골드버그가 “항상 앉던 자리로 안내”받는 데 비해 자신은 줄을 서 있자 동행인을 타박한다.
그의 엔터테인먼트의 정점은 리얼리티쇼 <어프렌티스>다. 2004년 시작한 이 시리즈는 우승자가 누구냐보다 도널드 트럼프가 누구를 해고하느냐가 화제였다. “너는 해고야”(You’re fired)는 유행어가 되었다. 트럼프는 “이전에도 유명했지만 매주 2천만명이 보는 <어프렌티스>는 차원이 다르다”고 회고했다.
트럼프는 ‘시청률 머신’의 명성을 즐기고 활용했다. 트럼프의 아들 에릭은 “트럼프를 싫어하는 사람도 막상 아버지가 옆을 지나가면 같이 사진 찍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미국 티브이 방송사들은 지난 대선에서 다른 후보자보다 트럼프를 더 많이 내보냈다. 트럼프가 등장할 때마다 시청률이 올라갔다. 트럼프는 자신을 비판하는 기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즐겼지만 정작 속마음은 이랬다. “나쁜 평판은 평판이 전혀 없는 것보다 낫다.” “<뉴욕 타임스> 1면 광고는 4만달러지만 독자들은 내용을 의심한다. 비판적인 기사라도 사업적인 측면에서는 도움이 된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책 <도널드 트럼프: 정치의 죽음>에서 미디어가 만들어낸 ‘트럼프 현상’을 분석하며 언론인 수전 멀케이히의 말을 인용한다. “그때는 몰랐지만 기사를 쓸 때마다 트럼프를 뉴욕의 아이콘으로 만들고 있었다.”
‘트럼프’는 트럼프의 유일한 ‘페르소나’다. 대선 기간 중 힐러리 클린턴이 몇천만원짜리 옷을 입은 사실로 공격받았지만, 트럼프는 전용기, 으리으리한 집, 세계 곳곳의 부동산 등을 자랑했다. 마이클 단토니오는 책 <트럼프의 진실>에서 트럼프가 시대의 필요가 낳은 인물이라고 말한다. “그가 유명해진 1978년은 중간임금이 성장을 멈추고 최상위 계층의 소득이 집중하는 시기였다. 동시에 매스미디어는 부자와 유명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끊임없이 과장해 다루며 ‘과잉 이미지’로 축제를 벌였다.” 예를 들면 1981년 <피플>은 트럼프를 인터뷰하면서 그를 ‘억만장자’라고 불렀다. 그는 당시 억만장자가 아니었다. 그의 일관된 ‘트럼프 연기’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구둘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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