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감독에게 듣는 <보통사람> <택시운전사> <1987>
스크린에서 1980년대를 향한 말문이 트였다. 지난 23일 개봉한 영화 <보통사람>(감독 김봉한), 4월말 촬영에 들어갈 <1987>(감독 장준환)은 시민들이 민주화를 위해 거대한 발걸음을 디디던 1987년이 배경이다. 올여름 개봉 예정인 <택시 운전사>(감독 장훈)는 1980년 광주민주항쟁을 그린다.
지난해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아파트 시대 이전 쌍문동 골목의 추억을 소환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들 묵직한 정치 드라마들은 80년대의 풍경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도 관심거리다. 80년대 소소한 풍경과 거대한 스펙터클을 모두 전하겠다는 야심을 감추지 않는 세 편 영화의 미술감독에게 스크린 속 80년대의 이미지에 대해 들었다. 인터뷰는 개봉 순서대로 싣는다.
“80년대 아버지들의 전쟁터를 그렸다”
<보통사람> 서성경 미술감독
아버지는 바나나가 싫다고 하셨다. 그러곤 부인과 아들 몰래 바나나 껍질을 핥아 먹었다. 영화 <보통사람>엔 성진(손현주) 집 툇마루부터 그들이 자주 가는 순대국밥집까지 80년대 생활상을 구현한 풍경이 가득하다. 성진이 지프차를 타고 등장하는 모습은 시나리오에 있던 이야기지만 서성경 미술감독이 직접 보았던 일이기도 하다. “김봉한 감독은 평범한 80년대 아버지들의 드라마처럼 표현해달라고 했다. 전체적으로 암울한 시대를 표현했지만 성진의 집이나 단골 술집에선 박하색으로 희망적인 느낌을 주고 싶었다”는 것이 서 미술감독의 영화 전반 스케치다.
그러나 80년대 아버지들은 일단 집을 나서면 전쟁터로 가야 했다. 서 미술감독은 특히 “화염병이 가득한 대학생 가방을 찍은 당시 사진을 보며 피켓, 현수막, 죽창, 석유통, 화염병, 금서 그런 것들을 모두 일일이 만들었다”고 했다. 전쟁 같은 시기였다. 영화 <암살> 등의 미술부에서 일하다가 <보통사람>으로 처음 미술감독을 맡은 그가 이 영화에서 가장 애착을 가진 곳은 추 기자(김상호)의 신문사였다고 한다. 정갈하고 안락하게 표현된 권력자들의 공간인 안기부 사무실이나 요정 등에 대비해 신문사는 흐트러지고 거친 곳으로 통제받는 자들의 공간이라는 느낌을 주려고 했다는 서 미술감독은 80년대 신문기자들을 찍어온 전민조 작가의 사진을 참고해 이곳을 꾸몄다고 한다. “그런데 어쩌면 이 영화는 공간보다 인물들에 대한, 행위에 대한 영화예요. 한명 한명의 행위가 모여 세상을 바꿨고 그런 인물의 행위를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가 중요했지요.” <보통사람>은 시위대가 거리를 지날 때 평범한 회사원들이 높은 건물에 매달려 흔들던 손수건과 휴지로 80년대를 기억한다.
“금남로 한복판으로 달렸다”
<택시운전사> 조화성 미술감독
올해 최고 기대작 중 하나로 지난해 10월23일 촬영을 마친 <택시운전사>를 맡은 사람은 이 분야 최고로 꼽히는 조화성 미술감독이다. 최근에만 <베테랑> <내부자들> <덕혜옹주> <밀정> 등 미술로도 기억되는 영화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 그는 이미 <범죄와의 전쟁>이나 <모비딕> 같은 80년대 배경 영화를 한 적도 있지만 “이번 영화에선 당시 풍경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광주의 정서를 전하기 위해 애썼다”고 차별점을 분명히 했다. “이 영화는 너무 뜨겁다. 군인들이 진압에 나서기 직전 금남로는 학생, 어린아이, 노인, 군인들이 모여 마치 축제와도 같은 풍경이었다. 어느 순간 시장 좌판이 엎어지고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일상이 파괴되고 사람들이 생계를 미루고 거리로 나서는 그 순간, 밝고 어두움이 종이 한장 차이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택시운전사>는 광장을 그린 영화이기 때문에 여느 영화보다는 오히려 미술을 간소하게 하려고 했다.”
우선 만섭이 관객들을 광주로 싣고 가는 택시는 옛 모델 ‘브리샤’다. 기아자동차에서 냈던, 지금은 사라진 녹색 택시를 구해 좀 다른색으로 칠했다. 외신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치만)가 이 차를 타고 금남로 전쟁 한복판으로 들어간다. “절대적으로 이방인의 눈빛,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설 때 보이는 풍경 이런 식으로 보이길 바랐다.” 당시 광주는 철저히 고립됐고 순천만 해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그는 시대의 아이콘적인 소품들을 최대한 자제하고 멀쩡한 도시에서 전쟁터로, 다채로운 색깔의 서울에서 어두운 빛을 띤 광주로, 경계를 넘어갈 때의 느낌에 주력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황 기사(유해진) 집에 가면 창에 커튼 대신 두꺼운 담요가 걸쳐져 있다. 커피포트, 밥솥, 그 시절 티브이도 있지만 등화관제를 위해 창문의 불빛을 가리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대표적 시대 풍경이다.” <택시운전사>에서 80년대 소품들은 철저히 가려지기 위해, 군홧발에 짓밟혀 부서지기 위해 만들어졌다.
“다큐와도 같은 사실의 세계를 지향한다”
<1987> 한아름 미술감독
1987년 6월10일 서울 시청 앞 광장은 매운 연기 속에서 10대부터 60대까지 한데 지르는 함성으로 가득했다. 자동차 경적이 서울을 흔들었다. 오랫동안 몸을 굽혔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내지르는 소리였다. 한아름 미술감독은 그때 사진들을 바탕으로 디자인 스케치를 그려나가고 있다. 그는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해어화> 등에서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환상적인 공간을 선보였지만, “이 영화는 사실적 표현에 주안을 둘 것이며 촬영도 다큐 기법이 강할 것”이라고 영화의 분위기를 미리 소개한다.
그때로부터 20년, 지금의 시청은 얼마나 같으면서 다른가. <1987>은 고층빌딩이 점령한 서울이라는 공간을 재구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영화는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장면으로 출발한다. 지금은 닫혔지만 남영동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무의식에 언제든지 이런 종류의 폭력적 통치가 가능하다는 상징이 됐다.
“거리 시위 장면은 1층은 다시 짓고 상당수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런데 <1987>은 시대 고증도 중요하지만 학생, 지식인, 종교인들 등 여러 계층이 하나둘 모여 새로운 빛을 이루는 과정을 보여준다. 80년대를 모르는 관객들도 영화를 보면서 그때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바꾸어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보여주고 싶다.”
서울뿐만이 아니다. “지방에서 서울의 시위를 보는 장면이 있다. 우리 영화는 한명의 영웅을 그리기보다는 각각의 작은 사람들과 전국의 도시들을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해서 결국엔 큰 변화로 나아간다는 점을 드러내려 한다. 어떻게 한 영화에 이렇게 많은 공간과 지역, 사람들을 한데 모아 스펙터클을 창조해낼 수 있을지, 그러면서도 극사실주의적 영화로 완성해낼 수 있을지 궁금하다. 내게도 강력한 도전이다.” 한아름 미술감독의 기대이자 책임감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영화 <보통사람> 에서 그린 80년대 경찰서. 오퍼스픽쳐스 제공
<보통사람> 속 80년대 신문사는 억압받는 공간을 상징한다. 오퍼스픽쳐스 제공
<보통사람>에서 주인공과 추 기자가 자주 찾는 단골 술집. 오퍼스픽쳐스 제공
<보통사람> 서성경 미술감독
서성경 미술감독. 감독 제공
영화 <택시운전사> 만섭의 방. 쇼박스 제공
<택시운전사> 조화성 미술감독
조화성 미술감독 쇼박스 제공
<1987> 한아름 미술감독
한아름 미술감독.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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