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회사에 다니는 강수(김남길)는 교통사고 뒤 식물인간이 된 시각장애인 단미소(천우희) 사건을 맡는다. 단미소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나간 교통사고 병원에서 “나는 미소”라고 말하는 유령을 만난다. 미소는 강수에게만 보인다. 미소는 강수에게 유령이라서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몇 가지 부탁한다.
영화 <어느날>에서 초반 ‘유령’ 설정은 강수를 이해시킨 뒤 더는 문제되지 않는다. 판타지적 상황보다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현실적 고민들이 부각된다. 강수는 얼마 전 오래 병을 앓던 아내를 잃었고 미소는 버려져 고아원에서 자랐다. 이윤기 감독은 지난달 30일 시사회 뒤 기자간담회에서 “다른 종류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만났을 때의 상황을 그리려고 했다”고 말했다. 감독의 전작들이 가진 공통점으로 <어느날>의 의미를 찾아보았다.
<어느날>은 판타지가 아니지만 멜로도 아니다. 김지수-황정민(<여자, 정혜>, 2005), 배종옥-박진희-박희순(<러브 토크>, 2005), 한효주(<아주 특별한 손님>, 2006), 전도연-하정우(<멋진 하루>, 2008), 임수정-현빈(<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2011) 등에서도 감독은 영화가 아름다운 배우들의 ‘멜로’일 것이라는 우리의 관습적인 착각을 무너뜨렸다.
<어느날>을 설명하는 그의 말처럼 ‘상처’는 감독의 오래된 주제다. 특히 감독은 약자의 상처에 주목한다. <어느날>에서 단미소는 시각장애인이고 그 탓에 버려졌다. <여자, 정혜>에서 정혜는 성폭력 피해자다. <남과 여>(2016)에서는 장애아동을 둔 남녀의 사랑이 그려진다. 버려진 고양이나 개 등의 동물이 인간의 원초적인 슬픔을 대변하며 등장한다. <어느날>에서도 미소의 곁을 지키던 개가 슬픈 눈을 한 채 등장하고 <사랑한다…>, <여자, 정혜>에서는 고양이가 나온다.
‘상처’의 치유 방법으로 감독은 ‘선한 의지’를 부각시킨다. 강수는 보험 사고에 대해서 막말하는 팀장에 반발하고, 아버지가 안 온 소아암 환자를 도와준다. 미소는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이윤기 감독의 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멋진 하루>는 날건달 같은 병운(하정우)이 사려 깊은 사람이었음이 최대의 반전으로 작용한다. <아주 특별한 손님>의 보경(한효주)은 특별한 ‘선의’로 모르는 사람의 부탁을 들어준다.
그렇다고 상처가 선한 의지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감독은 영화들에서 ‘상처 회복의 전조’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영화 속 ‘어느 날’은 중요하다. 여느 날과 같은 ‘어느 날’, 상처 입은 강수의 눈에 상처 입은 미소가 보인 날, 빌려준 돈을 찾으러 희수(전도연)가 병운을 찾아간 날, <아주 특별한 손님>의 보경이 엉뚱한 제안을 받고 상가에서 머문 하룻밤, <남과 여>에서 모든 것을 잊고 성민(전도연)과 기홍(공유)이 서로의 몸을 탐닉한 날, 그날 이후 등장인물은 다른 자신을 본다.
멜로를 만들지 않지만 그래서 이윤기 감독은 ‘멜로왕’이다. 우리가 연애물을 탐닉하는 것은 고조된 감정을 약속받기 위해서일 텐데, 감독은 ‘사랑’이 아닌 감정을 통해서 그와 비슷한 열락을 주조한다. 배우들 역시 지금까지 보여주지 못했던 감성을 표현하며, 이윤기 작품에서 다른 패턴의 얼굴을 보여준다. 결과로 배우들은 어느 영화에서보다 아름답다.
그동안 큰 흥행작은 없었다. 지난해 <남과 여>는 공유와 전도연이 나왔음에도 전국 관객 20만명이 보는 데 그쳤다. 현빈과 임수정이 나온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6만6천명이 영화를 보았다. <멋진 하루>는 39만명이 들었다. 4월5일 개봉하는 <어느날>은 <미녀와 야수>에 이어 예매 2위를 기록하고 있다.
구둘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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