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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위대한 소설 뒤에 위대한 편집자 있었다

등록 2017-04-11 16:24수정 2017-04-11 19:04

천재 편집자 맥스 퍼킨스 주목한
영화 ‘지니어스’ 속 편집자 모습
우리나라에서의 역할과 비교돼
“계약서에서도 갑과 을 관계”
‘악조건’ 속에서 최근엔 ‘관여도’ ↑
소설가 맥스웰 퍼킨스(콜린 퍼스·왼쪽)과 토머스 울프(주드 로). 라이크콘텐츠 제공
소설가 맥스웰 퍼킨스(콜린 퍼스·왼쪽)과 토머스 울프(주드 로). 라이크콘텐츠 제공
“그녀의 눈은 푸르렀다.” 소설 <시간과 흐름에 관하여>(Of the time and the river)의 이 한 문장이 탄생하는 과정은 지난했다. 소설가 토마스 울프(주드 로)는 “한 단어 한 단어가 중요하다”고 말하며 편집되는 것에 맞서고,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콜린 퍼스)는 “문장보다 이야기 흐름이 중요하다”고 설득한다. 출판사 사무실과 통근열차 역사로 이어지는 대화를 거쳐 대지의 금빛과 새빨간 불꽃, 푸른 바다로 뛰어드는 긴 묘사는 결국 이 한 문장으로 간단하게 정리된다.

영화 <지니어스>(마이클 그랜디지 감독)는 천재 소설가 뒤에 숨은 세기의 편집자 맥스 퍼킨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찰스 스크리브너스 선스 출판사의 맥스 퍼킨스는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담당 편집자이고, 피츠제럴드를 발굴해 <위대한 개츠비>를 펴냈다. 맥스 퍼킨스는 모든 출판사에서 거절당한 울프의 재능을 알아본다. 그리고 토마스 울프가 영감에 사로잡혀 선 채로 몇 초당 한 장씩 써내려간 방대한 소설을 ‘줄이고 줄여’ 책 꼴로 만들어낸다. 토마스 울프는 “톨스토이가 당신을 만났다면 <전쟁과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 됐을 것이다”라고 비난하지만, 결국 <시간과 흐름에 관하여>를 퍼킨스에게 헌정한다.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의 편집자 고든 리시나,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를 편집한 테이 호호프의 사례 등에서 보듯 외국 출판계에서 편집자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고든 리시는 1981년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출판하며 분량의 반 이상을 잘라냈다. 1961년 테이 호호프는 신인이었던 하퍼 리에게 어린 소녀 시점으로 개작할 것을 주문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만들어냈다. 초고인 <파수꾼>이 2015년 출간됐지만, 문단에선 <앵무새 죽이기>보다 못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런 편집자의 위상은 한국과는 사뭇 다르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외국에서는 편집자를 소설가와 동급으로 여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계약서에 명기되듯 갑(소설가)과 을(편집자)의 관계”라고 말했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 역시 “편집자는 다른 사람으로 교체 가능한 존재로 인식된다. 편집자가 개성적이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한국에선 작가가 완성한 소설과 시에 다른 사람이 손을 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인식도 공고하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사랑을…> 원본인 <풋내기들>이 2015년 출간되었을 때의 반응에서 이런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문학동네는 이 책을 낸 뒤 페이스북에서 두 작품 가운데 어떤 걸 더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올렸는데, 댓글을 단 독자 대부분이 <풋내기들>을 더 좋아했다.

<지니어스>에서 울프는 소설을 줄이는 데 4년간 매달린다. 구절마다 퍼킨스가 조력한 것은 물론이다. 이는 편집자가 초고를 꼼꼼히 살피고 지은이와 깊이 있게 교감할 ‘시간’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집자당 출판량이 외국의 2~3배에 이르는 한국에선 이런 역할을 하기가 힘들다. 백원근 대표는 “편집자가 기계적으로 책을 생산해야 해, 저자와 글에 깊숙하게 관여할 여유가 없다. 저자를 키우고 발굴하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연주 주간은 “외국의 출판사 전속작가·담당 편집자 시스템과는 거리가 먼 상황”도 지적했다.

그래도 ‘보이지 않는 손’은 열심히 움직인다. 조연주 열림원 주간은 “작가들은 작품에 푹 빠져 있어서 객관적인 눈이 필요하다. 캐릭터의 성격이 달라지거나, 말투가 달라지는 대목 등 구체적이고 세세한 조언을 많이 하는 편”이라고 말한다.

작가들도 편집자의 의견을 듣는 데 적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소설가 김중혁은 “연재 작품의 경우에는 (쓰는) 중간에도 의견을 많이 나눈다”. 의견이 부딪히는 일도 당연히 있다. 그는 “첫 장편을 내면서 편집자가 한 챕터를 빼자고 해서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빼고 나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정은숙 대표는 “예전에는 원고를 완성하고 나면 개작을 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초고 상태의 소설을 편집자에게 보여주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출판계에서는 출판사의 편집자가 기획과 원고 정리, 편집, 제작에 기울인 노력을 ‘판면권’이라는 형태로 인정하자는 저작권법 개정안을 준비 중이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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