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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문명 이후에도 존재할 감정, 그것은 사랑이죠”

등록 2017-06-19 17:34수정 2017-06-19 21:02

이탈리아 만화작가 지피 인터뷰

픽션 ‘아들의 땅’ 첫 한국어 출간
문명 사라진 지구 위 삼부자
오로지 생존술만 가르친 아버지
두 아들은 아비의 글 통해
‘이름붙이지 못한 감정’ 깨달아
이탈리아 만화 작가 지피.
이탈리아 만화 작가 지피.
금지된 들판으로 놀러간 형제. 들리는 건 까마귀 소리뿐, 외쳐도 소리는 끝간 데 없이 퍼져나갈 뿐이다. 멀리서 형이 빼빼 마른 개를 죽이고 있다. 동생은 벌판에 널린 사람의 주검에서 뼈를 뽑아 들었다가 버린다. 동생은 그 마른 뼈 위에 나비가 한 마리 날아들었다가 날아가는 것을 눈으로 좇는다.

이런 이야기가 첫머리를 장식하는 만화 <아들의 땅>(북레시피 펴냄)은 문명이 사라진 지구에 남은 형제와 아버지를 그려낸 문제작이다. 이 만화의 작가 지피(본명 잔 알폰소 파치노티)가 18일 막을 내린 서울국제도서전 참석차 한국을 찾았다. 지피는 2006년 프랑스 앙굴렘만화축제에서 최고상(황금야수상)을 수상한 <전쟁 이야기를 위한 노트>, 2014년 이탈리아 문학상 ‘스트레가상’ 후보에 오른 <하나의 이야기> 등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만화가다. 독자들은 이탈리아 원서 등을 들고, 도수 높은 근시 안경을 쓴 마른 체격의 지피를 만나러 왔다. 18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장시간 만화책에 일일이 그림을 그려주며 사인회를 끝낸 그를 만났다.

<아들의 땅>은 그가 자전적인 이야기를 벗어나서 처음으로 그려낸 완전한 픽션의 세계다. “독립적으로 인물을 창조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으로 구상에 나서 “서구세계의 종말”이라는 주제를 떠올렸다. 문명비판적 메시지를 담기보다는 차가운 세계를 그려 독자에게 생각거리를 던지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야기의 완전한 자유’를 느꼈지만 “지금까지 내 만화를 보던 사람들의 기대와 다를까봐” 두려움도 컸다.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는 만화 속 형제의 운명 앞에 놓인 미래도 두렵긴 마찬가지다. 문명의 몰락을 경험한 아버지는 아이들이 야생에서 살아갈 수 있는 ‘생존술’만 가르친다. 사랑이나 슬픔이라는 감정은 ‘생존’에 거추장스러우니 교육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짐승을 죽여라. 내장을 잘라라. 완전 개 취급이야!”

지피가 느낀, 두려움을 동반한 자유로움은 어느 순간 ‘창작의 희열’로 변했다. “30쪽까지는 어떤 방향으로 향하는지 모르는 채 즉흥적으로 그렸다. 죽음 속에 놓인 생명력(뼈 위에 나비가 날아드는 그림)을 그린 뒤에 비로소 어떻게 전개해나갈지에 힌트를 얻었다.” 작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표정이 30쪽을 전후하여 달라졌다며 둘을 비교해 가리켰다. 이야기의 방향이 정해진 뒤 표정이 살아난 것이다.

만화의 전환은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다. ‘문명인’ 아버지는 저녁마다 일기를 쓰지만 아들들에게 글자를 가르치지 않는다. 그런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슬픔’을 익히지 못한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지도 못한다. 동생은 아버지의 일기가 읽고 싶어 견딜 수 없다. 동생은 일기를 집어든다. “읽는다고? 너 읽지 못하잖아.” 부질없는 짓이라는 형의 질책이 이어진다. 이렇게 텍스트로 가득 찬 페이지가 10쪽이나 계속된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이도 알아보기 힘들게 글자를 ‘그렸다’. “독자들이 같은 상태를 느끼게 하려고” 작가가 놓은 장치다.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페이지를 넘겨도 읽을 수 없으니 좌절감을 느낄 것이다. 나는 독자인데 이건 옳지 않다고 느끼며 화도 날 것이다.”

‘문자를 해독’한 사람은 “아버지는 너를 증오했어”라고도 하고 “아버지는 너를 사랑했어”라고도 말한다. 형제는 무엇을 받아들일까. 결국 작가가 강조하려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이상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이다. 형제는 ‘해독’ 여행을 통해 ‘이름 붙이지 못했던 감정’도 찾아나간다. “이름을 알 수 없을 때는 개념이 없기에 느낌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아버지의 유물이 글이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빵을 먹으면서는 알 수 없다. 아버지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했는지를.”

지피는 만화에 나온 멸망의 원인이 무엇인지 발설하지 않겠다고 했다. “사람들이 그 원인을 추정하는 과정이 재밌기” 때문이다. “환경운동가는 파괴된 환경이 멸망을 불러왔다고 할 것이고, 국제정치 전문가라면 강대국의 정면충돌이 벌어졌다고 할 것이다. 트럼프 당선 뒤(이탈리아 출간은 2016년)에는 미국이 멸망을 불러왔을 거라는 해석이 우세해지더라.”

그림 잘 그리기로 유명한 작가는 뜻밖에 “이 책을 보고 감동을 느낀다면 그림 기법이 아니라 대화나 말들일 것”이란다. <아들의 땅>은 슥슥 아무렇지 않게 그려진 얇은 선으로 채워졌다. 그림을 완성하기 전 데생처럼 머뭇거림 없이 거칠다. 어둠도 수풀도 그림자도 자잘한 선을 일일이 그려 면을 채웠다. ‘종말’에 적절한 표현을 연구한 결과다. 스테들러 0.05㎜ 얇은 펜만 사용해서 그렸다. 펜은 눕히는 각도에 따라 선이 다르게 그려진다. 들어 있는 잉크 양에 따라서도 달라졌다. 잉크 양이 다른 펜을 여러 개 펼쳐놓고 적당한 것을 골라잡으며 그렸다.

빈 창고를 빌려 노래를 만들어가는 밴드가 나오는 <창고 라이브>는 지피의 자전적 이야기다. 2011년에는 외계인과 교류하는 <마지막 지구인>이라는 영화를 감독해 베네치아영화제에 출품하기도 했다. “만화가 가장 익숙하지만, 이야기가 중요하지 (음악·영화·만화 등) 무엇으로 표현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들의 땅>은 영화화가 검토되고 있는데 그는 여기에 참여하지 않는다. “만화로 나의 할 이야기는 모두 끝났기 때문이다.”

글·사진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만화 컷 북레시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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