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재꽃> 박석영 감독과 정하담 배우가 3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옥상에서 인터뷰에 앞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운명처럼 만나 세 편의 영화를 함께 했다. 그렇게 한 명은 생각지도 못한 독립영화 감독이 됐고, 한 명은 꿈만 꿔왔던 진짜 배우가 됐다. 둘에게 함께 만든 세 편의 영화는 ‘첫사랑’과도 같다. 이제 마지막이라니 그 아쉬움을 어찌 말로 다 할까 싶었는데, 감독과 배우는 되레 “산뜻한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들꽃>, <스틸 플라워>, <재꽃>까지 일명 ‘꽃 3부작’ 작업을 함께한 감독 박석영(44)과 배우 정하담(23) 이야기다. 길고도 짧았던 3년의 세월, 그 대단원을 장식할 영화 <재꽃>의 개봉(6일)을 앞두고 두 사람을 3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박 감독은 <들꽃>에서 거리에 내몰린 3명의 소녀가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스틸 플라워>에서는 자립을 위해 몸부림치는 청춘의 이야기를 그려내 호평을 받았다. <재꽃>을 통해서는 한 뼘 자란 주인공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세 편 모두 주연은 정하담이다.
“하담을 처음 만났을 때요? 직관적으로 특별하다는 걸 알았어요. 오디션 볼 때 옆에 있는 스태프를 때리면서 연기해보라고 하니 ‘사람을 때려본 적이 없다’며 눈물을 보이더라고요. 다른 배우들은 시나리오 속 캐릭터를 ‘감독의 의도대로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면, 하담은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을 던지죠. 이해돼야 비로소 자기 방식대로 표현해요.” 그는 그것이 ‘특별한 정직함’, 혹은 ‘배우로서의 윤리성’이라고 설명했다.
고등학교 연극반 활동 외에 특별한 경력이 없던 정하담은 경험이라도 쌓으려고 박 감독의 오디션을 찾아갔다가 ‘덜컥’ 합격을 했다. “막연히 배우가 되고 싶던 제겐 기적 같은 일이었어요. 저를 믿어준 감독님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죠. 허름한 옷을 입은 채 갈 곳 없고, 잘 곳 없는 소녀처럼 한 달 넘게 밤거리를 쏘다니며 거리의 아이들을 이해하려 노력했어요. 어느 날 편의점에 들어가 물건을 사는데, 점원이 돈을 건네는 제 손길을 피하는 거예요. 나는 잘 씻고 다녔는데.(웃음) 그때 ‘아, 이런 느낌이구나’ 이해가 확 되더라고요.”
처음부터 3부작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원래 상업영화 시나리오 작가였던 박 감독은 어느 날, 작업실 근처 홍대 놀이터에서 우연히 한 소녀를 목격했다. 한참이나 거리를 헤맨 것처럼 보이던 소녀는 주변의 병을 하나씩 하나씩 바닥에 던져 깨고 있었다. “멍한 눈으로 행위 자체에만 집중하던 소녀의 잔상이 오래 남았어요. 그길로 거리의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들꽃문화재단이란 곳을 찾게 됐고, 아이들 이야기를 들으며 영화를 찍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둘 모두의 데뷔작이었던 <들꽃>은 부산국제영화제는 물론 해외 영화제에 연이어 초청돼 주목받았다. 두 번째 작품 <스틸 플라워>는 스틸(강철)처럼 단단해진 하담의 이야기를 다룬다. 파도에 쓰러져도 벌떡 일어나 탭 댄스를 추던 하담의 모습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 영화는 서울독립영화제 대상을 받았고 정하담은 들꽃영화제 여우주연상, 영화평론가협회 신인여우상 등을 휩쓸며 한국 영화계가 주목하는 신인 여배우로 우뚝 섰다. 이젠 소속사도 생겼고, 알아보는 사람도 많아졌다고 수줍게 웃는다. “지하철에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데, 누군가 어깨를 조심스레 치는 거예요. 발이라도 밟았나 싶어 화들짝 놀라 바라보니 처음 보는 분이 ‘영화 정말 잘 봤다’고 인사를 건네더라고요. 너무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히히.”
전작들에 견줘 <재꽃>은 훨씬 따뜻하다. 영화는 하담이 버림받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11살 해별(장해금)을 만나면서 애정과 위로를 나누는 이야기를 담았다. 해별의 이야기지만, 전작에 드러나지 않았던 하담의 과거를 되짚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얼마 전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관람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재꽃은 무의식적으로 (연작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 탓에 나온 제목 같아요. 다 타서 재가 돼 흩어지지만, 너희는 여전히 꽃이라는 걸 기억하겠다는 마음이랄까.”
“배우와 감독은 협업관계”라고 굳게 믿기에 ‘○○○의 뮤즈’나 ‘○○○의 페르소나’ 같은 “감독 판타지용 표현”을 정말 싫어한다는 박 감독. 전작과 마찬가지로 <재꽃>에서도 디테일한 지시 대신 하담의 아이디어를 존중했다. “해별이 걘 이제 겨우 11살이에요”라는, 클라이맥스의 강렬한 대사 역시 하담이 만들었다. “감독님이 처음부터 대사를 생각해보라고 하셨어요. 내내 고민했는데, 이 대사는 사실 ‘나는 그때 겨우 11살이었단 말이에요’라는 하담의 절규인 셈이에요.”
다음 작품도 함께할지 물었다. 둘 다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한 10년쯤 지나 다시 만날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아녜요. 전 다음 작품으로 찐한 정통 멜로를 찍고 싶어요.” 발랄하게 답하는 정하담과 달리 박 감독은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다음 작품을 또 같이하면, 오랫동안 소중히 아꼈던 하담이라는 캐릭터를 상하게 할 것 같아요. 이젠 보내줘야죠. 여배우에겐 중요한 시기니만큼, 하담이 앞으로도 한 작품 한 작품 조심스럽게 골랐으면 해요.” 글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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