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2018년 독일 베를린에서 작업하며 완성한 색채추상 근작 <무제>. 갤러리현대 제공
온갖 빛깔들이 작열하는 꽃무리의 환각이 화판을 뒤덮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많은 톤의 색조들을 머금은 물감 덩어리 혹은 조각들이 무수히 엉켜 있다. 크고 작은 색 덩어리들 사이로 분방하게 문지른 부정형의 색칠 흔적들이 퍼져나가는 것도 보인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7년 만에 개인전 ‘베를린’을 열고 있는 중견화가 도윤희(61)씨의 근작들은 수많은 색 덩어리들이 광풍처럼 휘몰아치거나 늘어지는 그림풍을 드러낸다. 10여년 전만 해도 극도로 색조를 제약하고 선과 형의 표현을 절제했던 그였기에 이번 출품작들의 거칠고 분방한 표현은 다소 의외다. 억압하듯 자연과 식물, 일상을 미니멀하게 형상화했던 과거 화풍과는 전혀 다른 색채 만발의 세계가 나타난다. 나이 들수록 절제하고 단순화한 형을 좇는 작가들의 일반적 흐름과 달리 화가는 육십줄 이후 더욱 거칠고 분방한 색의 질주를 추구한다. 붓 대신 손가락·손바닥에 물감을 묻혀 마구 휘두르고 문질러댄다. 물감 덩어리를 집어 화면에 눌러 붙이는가 하면 중첩된 색층 사이로 나이프를 쿡 찔러 구멍 내고 은빛 색깔의 도료 덩이를 집어넣기도 한다.
1층 전시장에 나온 도윤희 작가의 근작들. 다채로운 색조의 선과 덩어리로 구성된 특유의 추상표현주의적 회화들이다. 갤러리현대 제공
이는 도 작가가 지난 2012년 독일 베를린에 작업실을 개설한 뒤 7~8년 동안 작업하며 일어난 변화들이다. “침잠하고 집중하기 좋은” 그곳의 하늘빛과 거리, 집들의 유리창과 식물들 빛깔을 눈여겨본 작가는 내면의 감정과 감각들을 물질적으로 드러내고 싶다는 육감 표현의 욕구를 느꼈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머릿속에 맴돌기만 하고 그림으론 나오지 않아 고통스러웠던 수년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 뒤에야 지금 전시장에 나온 특유의 색채추상 작업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팬데믹으로 2020년 봄 쫓기듯 돌아와야 했지만, 베를린 거리의 가라앉은 감각이 깃든 원래 화폭 색면에다, 귀국 이후 한국 작업 공간의 감각을 담은 색층들을 덧입혀 쌓는 육감의 흥취가 화가의 눈과 손을 여전히 사로잡고 있다. 27일까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