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용선 작가의 2012년 작 <시애틀 작업실>.
미술판도 패션처럼 시시각각 유행을 탄다. 특히 1970년대 중반 이후 트렌드 변화는 현란하다. 당시 벽지 같은 단색조 회화가 제도권 화단의 대세로 등장했다가 2010년 이후 화랑들의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인기상품이 된 것은 잘 알려진 바다. 70년대 후반 소장 작가들 사이에선 미국 영향을 받은 극사실주의 정물화와 풍경화가 대유행했다. 80년대는 민중미술로 일컬어지는 현실비판적인 리얼리즘 미술이 성행했다가 80년대 말~90년대 초 포스트모더니즘과 신표현주의가 유입되면서 미술판은 추상 구상 경계를 넘어선 다원주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렇게 지난 40여년 동안 숱하게 바뀌어온 한국 미술가들의 작업 양상들을 어렴풋하게 되짚는 전시회가 차려졌다. 지난달 15일부터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화랑 창립 45돌 기념전 `달의 마음, 해의 마음’이다. 화랑 1~3층 전시장에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활동해온 국내 중견 소장 작가 51명의 작품 100여점을 펼쳐놓고 그동안 등장했던 유행 사조의 단편적 면모들을 살펴보게 했다.
홍순명 작가의 2011년작 <히로시마, 2010년 8월3일>.
이정지 작가의 2001년작 <0-2001-55>.
전시는 70년대 전위 작가 집단 에스티그룹에 참여했던 중견 평론가 윤진섭씨가 기획했다. 사실주의적 경향, 단색화적 경향, 미니멀 추상, 미디어아트, 색의 표현성이란 다섯개의 열쇳말로 출품작들을 갈라 선보이는데, 기실 70년대부터 지금까지 화랑을 중심으로 움직인 제도권 화단의 작품 흐름들을 담은 작품들 모음이다. 기존 단색조 회화 대가들과는 또다른, 문자의 집적된 세계로 독창적 모노크롬의 경지를 보여주는 작고 작가 이정지의 작품을 필두로, 김강용 작가의 <벽돌> 연작과 이석주, 주태석 작가의 초현실적 풍경 회화들이 극사실주의 사조의 잔영을 증언한다. 색면과 형상, 필획 등에서 개성적 면모를 보여주는 서용선·석철주·김명식·김길후 작가의 회화는 90년대 이후 새삼 부각된 표현주의적 경향을 드러낸다. 히로시마의 원폭 현장에서 상상력을 길어 올린 홍순명의 비둘기 그림과 블루톤 화면에 강렬한 붓질의 궤적을 그린 박다원의 추상화, 기하학적 구조물로 삶의 형태를 담은 모준석 작가의 가상현실 디지털 조각 영상 등 소장 작가들의 작업들도 눈여겨 볼만하다.
박다원 작가의 2016년작 <지금 여기, 블루>.
선화랑은 1979~92년 계간지 <선미술>을 발간했고, 1984~2010년 유망작가들에게 주는 ‘선미술상’을 운영했던 뚝심있는 중견화랑이다. 창업주 김창실(1935~2011) 전 대표는 1980~90년대 한국화랑협회장을 역임하며 천경자 화백 <여인도> 진위 감정, 화랑미술제 운영 등에 관여하면서 화랑계 기반을 닦은 공로자로 회자된다.
글 ·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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