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채색화의 거장인 박생광의 1985년작 <장승2>. 노형석 기자
깊어가는 가을녘 남도 미술판은 명작 풍년이다.
호남 화단의 근거지인 광주와 새로운 지역 미술 거점이 된 광양이 요즘 서울에 필적할 만한 전시 잔치를 펼쳐 놓았다. 올해 상반기 서울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객들을 끌어들였던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기증 컬렉션 미술품들이 국립광주박물관과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첫번째 지역 순회전을 통해 지방 관객과 만나고 있다.
남도 동쪽의 광양 전남도립미술관에서는 20세기 초 기독교 성화로 유명한 프랑스의 휴머니즘 거장 조르주 루오의 작품들과 그에게 영향받은 한국 작가의 작품들을 한데 보여주는 특별전시가 시작되었다. 광주시립미술관 3~6전시실에 마련된 이건희 컬렉션 한국근현대미술 특별전(11월27일까지)은 ‘사람의 향기, 예술로 남다’란 제목이 붙었다. 국립현대미술관(50점), 대구미술관(7점), 전남도립미술관(6점) 그리고 광주시립미술관(30점)이 소장하고 있는 이건희 컬렉션 작품들과 근현대미술 거장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 45명의 작가의 작품 93점이 나온다. 이 전시는 무엇보다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먼저 열렸던 근현대미술컬렉션 전의 판박이가 아니다. 서울 전시엔 없었던 비장품이 대부분 나왔고, 작품 수준도 뛰어난 것들이 많아 새로운 기획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도 화단의 거장 허백련의 19 60년작 남종화 산수와 후덕한 산야의 풍경으로 알려진 거장 청전 이상범의 소담한 10폭짜리 화훼절지 병풍을 전시 들머리에 내세웠다는 것부터 예사롭지 않다 . ‘계승과 수용’, ‘한국화의 변용, 혁신’, ‘변혁의 시대, 새로운 모색’, ‘추상미술과 다양성의 확장’으로 나눠 전시를 꾸렸는데, 이런 소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대가들의 개별 명품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는 눈맛 체험이 더욱 솔깃하게 다가온다.
근대기 대가들의 경우 김은호가 그린 풍속도 터치의 <화기>를 비롯해 한국 인상파의 대가로 알려진 오지호의 산야 풍경화, 이인성의 30년대 도시 근교 그림들이 내걸렸다. 이응노가 1982년 종이를 쑤어 붙여 만든 채색화 대작 <작품>도 보기 힘든 명품이며, 아이와 자연 풍경을 담은 이중섭의 50년대 은지화와 40년대 엽서그림들도 조형적 미감이 명쾌한 수작들로 간추려 감상하는 맛이 쏠쏠하다. 1985년 그려진 채색화 거장 박생광의 숨은 명작 <장승2>는 전시의 대표작들 가운데 하나다. 80년대 독창적인 채색화의 경지를 완성한 작가가 색감과 소재, 구성 등에서 내밀한 열정과 개성적 필력을 발휘한 수작이다. 김환기, 유영국, 곽인식 같은 추상미술 대가들의 작품들도 익히 알려진 화풍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비장품들이 상당수 나왔고, 1980~90년대 한국 리얼리즘 회화의 대가인 신학철 작가의 대표작 <한국근대사-종합>을 길이 3m가 넘는 실물 화폭 그대로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반갑기 그지없다.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프랑스 거장 조르주 루오의 특별전에 나온 루오의 1945년작 <베로니카>. 노형석 기자
1~2층 전시장의 조각 거장 권진규 기념전은 올해 상반기 서울시립에서 열린 권진규전과 진열장, 공간이 완전히 다르다. 유리 진열장을 두지 않고 바로 작품을 곁에서 볼 수 있게 해 질감을 살펴보게 한 서울 전시에 비해 광주 전시는 두개층으로 단을 달리한 전시 공간에 명암의 대비를 강조했다. 더욱 영적인 이미지로 그의 인물상과 동물상, 반추상 조상들을 두루 살펴볼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감상의 감도가 훨씬 강렬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매달린 예수상을 중심으로 비구니상, 도약하는 말 상, 남성과 여성의 전신 반신상, 마스크, 황소상 등이 차례로 도열한 안쪽의 2층 전시장 풍경은 성스러운 예술 사원의 회랑을 거니는 듯한 느낌을 안겨준다. 전시는 23일까지.
국립광주박물관의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 역시 지난해 4~6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된 같은 제목의 기증 1주년 특별전의 연장선상이지만, 구성이 완전히 다르다. 서울 특별전에 나온 고미술품 일부가 전시되고 있지만, 근대미술품은 빠졌다.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 등 거장들의 작품들 가운데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들, 고려청자 명품들이 다수 들어와 감상의 감흥이 색다르다.
광주시립미술관 전시실에 나온 신학철 작가의 대작 <한국근대사-종합>을 관객들이 감상하고 있다. 이 미술관에서 지난 4일부터 시작된 이건희 컬렉션 지역 순회전 ‘사람의 향기, 예술로 남다’의 주요 출품작 가운데 하나다. 노형석 기자
기획전시실 전시장에는 정선(1676~1759)의 <인왕제색도>를 비롯한 국보·보물 등 16건 31점의 국가지정문화재와 함께 총 170건 271점을 선보이는데, 39건 62점이 새 전시품들이다. 이 기획전에서 눈길이 집중되는 고갱이 격의 공간은 명품 안락의자 2개가 놓인 18세기 거장 겸재 정선의 최고 걸작 <인왕제색도>의 전시장이다. 우선 밀착 진열장에 내걸린 겸재의 명화를 코앞에서 주시해본다. 비 오고 갠 날 세상을 떠난 벗 이병연을 생각하며 그렸다는 인왕제색도의 화폭을 마주하다가 바로 앞 의자에 앉아 감상의 흥취를 다독이면서 심도 있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1808년 혜원 신윤복이 거칠지만 강렬한 필치로 그린 기녀와 술 취한 자신의 자화상 같은 모습 등을 담은 <혜원화첩>과 매화와 괴석만 단출하게 그린 김수철의 석매도, 단원 김홍도가 거침없으면서도 담백한 필력을 과시한 네폭 화훼도 등은 일반 관객들이 사실상 처음으로 마음껏 감상하게 된 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서빙고 쪽에서 북악산 아래 솔숲과 경복궁터, 수많은 한양도성 집들의 안갯속 아련한 경관을 담은 겸재 정선의 <서빙고망도성도>와 16세기 조선 궁중의 불상 숭불 의식을 현장 사진처럼 담은 희귀한 <궁중숭불도>도 빼놓을 수 없는 감상거리다.
국립광주박물관 기획전시실에 내걸린 겸재 정선의 걸작 <인왕제색도>와 그 앞의 안락의자. 노형석 기자
국립광주박물관에 나온 <혜원화첩>의 작품 일부분. 1808년 혜원 신윤복이 만든 이 화첩은 행서 글씨 두 면과 산수인물화 여섯 면으로 구성된다. 사진 도판은 앞부분 그림으로 취중 자화상을 담은 것으로 추정된다. 화면 위 왼쪽에 ‘한동이 술 다 마시고 취해/ 텅 빈 산속에 널브러져 있으니/ 외로운 나를 비춰주는 밝은 달 있구나’란 한문 화제가 쓰였다. 노형석 기자
광양 전남도립미술관의 루오 특별전은 작가의 연대기라기보다 그의 여러 화풍과 소재, 주제 등을 각각 따로 구성해 보여주는 형식을 취한다. 20세기 초 상징주의와 야수파,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신만의 독보적인 실존주의 화풍을 이룩한 거장 루오가 1920년대 제작한 기독교 성화 대표작 <미제레레>를 비롯해 평생 애착을 보였던 서커스 광대 그림, 여인상 등을 담은 작품들이 소품들의 묶음 패널이나 거울을 함께 붙인 진열대 등을 통해 여러 전시실에서 관객을 만났다. 성화, 서커스 군상들과 더불어 유난히 눈에 띄는 작품이 루오의 1945년작 <베로니카>다. 피와 땀에 젖은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성녀 베로니카의 얼굴을 특유의 거칠고 단순한 필선으로 그려낸 수작으로 이번 전시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품들 가운데 하나다. 스승인 상징주의 거장 구스타브 모로의 영향이 물씬한 작가 초창기의 아카데믹한 목판화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는 성녀들>(1895~1897)은 루오의 화력이 탄탄한 고전주의 화풍에 뿌리박고 있음을 일러준다.
특별전 후반부엔 이중섭, 박고석, 송혜수, 박석호, 김재형, 손상기 등 루오에게 영향받은 20세기 초·중반 국내 화가들 작품 수십여점까지 한자리에 망라한 독특한 틀거지의 연계 전시회를 펼쳐놓았다. 출품작들 세부의 도상적 연관성까지 치밀하게 분석하지는 못했지만, 한국 근대미술사에 드리운 루오의 그늘을 나름 짐작하면서 감상할 수 있는 자리다. 내년 1월29일까지.
광주·광양/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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