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출신 작가 데이비드 알트메이드의 <더 벡터>(The Vector). 작가는 천장에 닿을 듯 기괴한 양상으로 길쭉하게 키운 귀를 하고 요가 자세로 앉은 토끼인간의 모습을 빚어내며 고딕적인 마법과 신화, 과학적 시선을 녹인 조형적 세계를 보여준다. 대규모 설치작품들을 통로 공간에 연속적으로 내보인 ‘인카운터스’ 섹션에서 눈길을 끈 작품들 가운데 하나다.
팬데믹 터널을 막 벗어나려는 지금 세계 미술시장을 이끄는 트렌드는 무엇일까? 그 바로미터로 꼽혔던 홍콩의 미술 장터는 유행의 실체보다는 중국과 한국에서 명품들을 보려고 온 관객들의 행렬을 도드라지게 보여주고 있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인 국제 아트페어 ‘아트바젤 홍콩 2023’이 지난 21일 11회차 행사(25일까지)를 개막했다.
개막 뒤 홍콩 완차이지구 컨벤션센터 2·3층 전시장 안팎의 분위기는 과거와 크게 달랐다. 2013년 창설된 이래 이 장터가 열릴 때마다 행사의 주역이자 흥행의 가늠자였던 서구 관객과 전문가, 컬렉터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중국 본토와 중화권, 한국의 컬렉터들과 관광객들이 주로 회장을 채우는 광경이 펼쳐졌다. 지난 3년간 코로나19 사태로 온라인 전시회로만 진행하다가 올해는 세계 32개국 177개 화랑이 출품한 대면 장터로 정상화의 첫발을 딛게 됐으나, 에스터 시퍼 등 서구 쪽 중견 화랑들은 상당수 불참했다.
캐나다 출신 작가 데이비드 알트메이드의 <더 벡터>의 뒷모습. ‘인카운터스’ 섹션에서 눈길을 끈 작품들 가운데 하나다.
특히 올해 아트바젤 홍콩은 세계 미술계에서 유난히 관심을 기울이는 분위기다. 보안법 제정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과 중국 정부의 강권 통치에 따른 홍콩의 정치적 불안정성이 표면화했고, 팬데믹으로 수년간 대면 접촉이 제한된 상태에서 대규모 미술 전람회를 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서울에선 라이벌인 프리즈의 첫 아시아 페어가 성황리에 열렸고, 싱가포르와 일본 도쿄 등 다른 아시아 대도시들에서 잇따라 국제 장터를 꾸리면서 아시아 시장에서 홍콩이 압도적인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가 관심사였다.
전시 첫날인 21일, 브이아이피(VIP)에게 판매한 성과를 담은 아트바젤 공식 세일 리포트를 보면 최근의 국제 미술경기 하강세에도 장터는 비교적 순항했다. 출품한 주요 화랑들이 서구 컬렉터보다 중국 쪽 컬렉터가 많이 찾을 것으로 예상하고, 이들이 선호하는 공인된 인기작가·대가들의 신작과 근작들을 집중적으로 내놓았기 때문이다. 홍콩섬 건너 카오룽 지역의 엠플러스(M+)뮤지엄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고 있는 일본 대가 구사마 야요이의 인기세가 특히 그러했다. 그의 아바타와도 같은 대형 호박 조각이 일본 화랑 부스에서 출품돼 개막 날 최고가인 350만달러(45억원)에 팔린 것을 비롯해 여러 화랑이 그의 초·중반기 점·선 작업과 유기적인 회화, 호박 조형물들을 부스 곳곳에 놓았고 많은 관객이 인증샷을 찍는 광경이 펼쳐졌다. 하우저앤워스나 데이비드 즈워너, 페이스, 타데우스 로파크 같은 세계적인 명문 화랑들도 미국 최고 인기작가 마크 브래드퍼드와 알렉스 카츠, 독일 거장 게오르크 바젤리츠, 한국과 일본의 거장인 이우환의 신작 등을 80만~350만달러 수준에 판매한 것으로 집계됐다. 일본 팝아트 대가 무라카미 다카시가 운영하는 예술공방 가이카이키키의 부스에 많은 관객이 모여 작가와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일본 팝아트의 대가 무라카미 다카시가 운영하는 미술 공방이자 예술 기업인 가이카이키키의 부스. 유난히 많은 관객으로 붐볐다.
21일 낮 자신의 회사인 가이카이키키 부스를 찾아와 관객들 앞에서 손을 흔드는 무라카미 다카시.
역대 최대 규모인 12개 업체가 출품한 한국 화랑들도 메이저 화랑의 경우 박서보, 하종현, 이우환, 이배 등 단색조 계열 작가들의 그림들을 내걸어 상당수를 판매했다는 전언이다. 첫날 현황을 놓고 보면 일단 과거 명성에 걸맞게 순조로운 흥행의 첫발을 뗀 것으로 볼 수 있다.
작품의 콘텐츠 맥락에서는 시장의 맥을 대체할 새로운 경향을 담은 문제작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의식 있는 작가를 소개하기 위해 기획전 구도로 마련한 인카운터스 섹션의 작품이 그나마 수작들로 다가왔다. 천장에 닿을 듯 길쭉하게 키운 귀를 하고 요가 자세로 앉은 토끼인간의 모습을 빚어낸 캐나다 출신 데이비드 알트메이드의 고딕적 조형물이나 허공에서 거대한 포장지 싸개가 내려오는 듯한 이미지를 연출한 자파람의 대형 설치작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1970년대 한국 실험미술의 대가 성능경과 한국 근대 산 그림의 거장인 유영국 등의 작품을 외국 화랑이 처음 현지에 소개한 것도 성과로 받아들일 만하다.
대형 설치작 14점을 선보인 ‘인카운터스’ 섹션에서 주요 작품으로 꼽힌 김홍석 작가의 작품 <침묵의 고독>.
홍콩 당국은 지난달 방역 제한을 사실상 해제하고 19일부터 일주일간을 홍콩 아트위크로 선언했다. 2021년 세계 굴지의 규모로 개관했지만, 격리 조건 탓에 외국 관객들이 가지 못했던 정부 산하 독립특수법인 미술관 엠플러스도 지난 20일 실질적인 개관식을 치렀다. 세계적인 명문 미술관 관장들이 줄줄이 참석한 가운데 사실상 국제 미술계에 면모를 처음 알리는 안내 행사를 치러 아트바젤 홍콩의 마중물로 구실했다. 홍콩 행정당국은 새롭게 정상화한 아트바젤 홍콩의 행사 분위기를 밀어주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이는 정도련 엠플러스 부관장의 말처럼 홍콩을 중국의 미래 국가 문화중심 허브로 육성하겠다는 중앙정부의 정책 기조를 반영한 것이며 홍콩의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겠다는 제스처로도 비친다.
2년 전 엔에프티(NFT) 아트의 선풍을 일으킨 주역이었던 비플의 디지털 가변영상물도 본전시장에 나와 관객들의 눈길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곰돌이 푸로 풍자한 듯한 서구 공포영화 개봉을 불허한 홍콩 당국 대응에서 보이듯 검열 통제의 불안감은 여전히 현장에 맴돌고 있었다. 아트바젤의 위성 아트페어인 아트센트럴에 참여한 한 국내 화랑 관계자는 “작가 명단과 작품 정보를 사전에 모두 반드시 관계 기관에 등록해야 했고 이를 벗어난 작품은 사실상 전시가 규제됐다. 당국의 아트페어 통제가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홍콩/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글래드스톤 갤러리 부스의 일부 모습. 재미 한국계 작가 아니카 이의 아크릴+프린트 그림이 안쪽 벽에 내걸려 있고, 그 앞에는 거장 필리프 파레노의 아이스맨 조형물이 한국 서울의 맨홀 뚜껑을 배경으로 설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