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2일 아티스트들의 목소리가 제주도 곳곳을 채웠다. 록밴드 라이프앤타임은 제주 시내의 펍 인디에서 지방 투어의 마지막 공연을 했다. 록밴드 버즈는 제주국제컨벤션센터 탐라홀에서 전국 투어 피날레를 찍었다. ‘씨없는 수박 김대중’은 제주 시내의 게스트하우스 ‘스테이22’에서 공연을 열었고, 포크 가수 한희정은 ‘에리두 카페 앤 베드’에서 재즈 피아니스트 전용준과 함께 작은 공연을 했다. 이날 오전 11시부터 낮 1시까지 세화포구에서 펼쳐진 벼룩시장 벨롱장에서는 레게 밴드 사우스카니발의 멤버 10명이 객들의 흥을 북돋았다. 이달에만 가수 이문세, 기타리스트 이병우의 제주 공연이 예정되어 있고, 제주에 내려와 사는 허클베리핀의 이기용은 친구들까지 불러 매주 수요일 저녁 공연을 작정했다.
65만 인구에 비행기로 본토를 오가야 하는 곳, 제주도가 서울 홍대 앞 뺨치는 공연의 메카로 떠오르고 있다. 이곳에서 어려운 음악은 쉬워지고 멀어 보였던 가수가 바로 앞에 앉는다. 바닷가 카페 곳곳에선 격식 차림없는 공연과 관람이 펼쳐진다. 봄날 제주도의 노랫소리를 찾아 길을 떠났다.
90년대말 홍대 앞 변화 물결처럼
제주에 공연장이 여럿 생겼고
음악인들이 찾아와 갖가지 실험
록밴드·레게밴드·포크가수까지
그들 따라 팬도 비행기에 몸실어 장필순이 애월에 정착한 지 11년
뿌리내리는 음악인 갈수록 늘어
보컬이자 문화기획자 김명재는
밴드 지도·강습하며 ‘자급자족’
“가능성의 음악공간이 여기 있죠”
■ 제주도, 홍대를 꿈꾸다 서귀포 ‘에리두 카페 앤 베드’. 12일 한희정의 공연에는 서울에서 찾아온 팬들이 객석에 가득했다. “여행을 오신 분들이 많아선지 좀더 마음 편한 것 같다. 좀더 살가운 느낌이랄까.” 공연에서 한희정과 관객과의 거리는 말 그대로 코앞이었다. 한희정은 마이크 줄을 뽑아들어 마이크를 불쑥 관객에게 내밀었고 마이크를 받아든 관객은 우렁차게 노래를 불렀다. 한희정은 공연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다. “사람들이 벼르고 왔는지 시디를 잔뜩 갖고 와서 사인을 부탁하더라고요. 대기실이 없어서 쉬는 시간에도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에리두에서는 한두 달에 한 차례씩 공연이 열린다. 박상철 대표는 2014년 카메라를 수입하던 회사를 접고 내려와 에리두를 열었다. “아티스트들이 좋아해요. 내려와서 공연하고 숙박도 하죠. 5분 걸어가면 바다도 있고.” 2년 공연을 이어오면서 스피커, 키보드 등의 기자재도 조금씩 갖춰가고 있다. 악기를 풀세트로 짊어지고 오지 않기에 색다른 공연이 만들어진다. 한희정도 가끔 기타를 들며 재즈 피아니스트 전용준과 함께 공연 전체를 꾸몄다. 단출한 공연을 위해 일일이 편곡을 했다. 현악기로 구성한 노래는 색다르게 해석됐다.
1990년대 후반 서울 홍대 앞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요즘 제주도에서 벌어지고 있다. 없던 공연장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현지 뮤지션들이 맨땅에 헤딩하며 이것저것을 실험하고 있다.
붕가붕가레코드는 제주에 겟컴퍼니를 차렸다. 제주 출신 음악평론가 박은석씨가 이곳 일을 맡아 하고 있다. 지난해 만들어진 공연장 겟스페이스는 이승환과 페퍼톤스 등의 공연을 치렀다. 공연장이 마땅치 않던 팀들이 제주도를 찾기 쉽게 되었다.
녹음 엔지니어 유호성씨는 20평짜리 스튜디오를 제주 시내에 마련했다. 1998년 이래 활동해왔던 공간 홍대를 떠났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차에 지난해 제주 공연을 왔다가 마음을 정했다. “공연하던 친구들을 여러명 만났는데 나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공연이 잦아지면서, 제주도 바깥에서 일부러 제주를 찾는 팬들도 생겨났다. 대구에 사는 록밴드 버즈의 팬 ㄱ씨(35)는 전국 투어 중인 버즈를 따라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공연장에는 비행기를 타고 온 팬들이 많았다. “공연 시작할 때 물어봤더니,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80%는 됐던 것 같아요.”
■ “제주가 소리를 바꾼다” 공연장뿐 아니라 제주에 뿌리를 내린 아티스트들도 급증하고 있다. 제주 출신 강아솔은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제주에서 시작했다. 1집을 내고 제주도의 클럽에서 공연을 자주 했다. “제주 출신이라서 뭐가 다를까.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했는데 들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제주가 소리를 바꾼다.
허클베리핀의 이기용이 제주도로 내려온 건 볼라벤 때문이었다. 2012년 태풍 볼라벤이 제주도를 휩쓴 날 제주도에 와 있었다. 태풍 속을 헤집고 여행을 다녔다. 파도는 끝간 데 없이 솟고 나무는 쓰러지고 차는 엎어졌다. “이렇게 엄청난 곳이 있구나.” 2014년 이기용은 엄청난 곳으로 내려왔다. 한적한 김녕 바닷가의 쓰러져가는 건물 옆에 노란 컨테이너를 갖다놓고 숨었다. 지난해 ‘사랑하는 친구들아 안녕 나는 너희들이 모르는 사이에 잠시 지옥에 다녀왔어’ 발표 외에는 외부적으로는 음악활동을 중단한 듯 보였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고요하지만 격렬한 시간”을 보냈다. “매일 눈뜨면 하늘이 70%, 바다가 20%, 땅이 10%인 광경”이 펼쳐졌다. 외부가 바뀌었는데 음악이 안 바뀔 리가 없다. “하늘이 0%인 곳에서는 사운드를 채우려고 했다. 하늘이 70%인 곳에서는 그렇게 안 된다. 시간도 다르게 흐른다.” 보컬 이소영을 비롯한 친구들을 불러들였다. 한 달 하숙을 받던 김녕펜션 지하는 공연장으로 변신 중이다. 서울에서 하던 카페 샤가 이전한다. 3월19일 오픈한 샤스페이스는 수요일마다 키보드 정나리, 첼로 하이람(미국 오클랜드 출신)이 어울려 ‘샤사운드’ 공연을 벌인다.
장필순이 애월에 정착한 지도 11년이 되었다. 각광받았지만 성공하지 못했던 6집(2002년) 이후 제주도에 내려왔다. 내려와서 5년을 실컷 놀았다. 7집 <수니 세븐>(2013년)을 내고도 가수 아닌 듯이 살았다. 귀가 예민해서 음악 틀어놓고 잠도 못 자던 장씨는 신명난 벌레소리에 물들었다. 홈레코딩이 가능할 정도로 집은 적막하지만 말소리, 벌레소리, 새소리를 차단할 수 없어 애를 먹었다. 그러다 “이게 들어가면 어때” 싶었다. 지난해 4월부터 내고 있는 신곡들 모음 ‘애월○화’ 시리즈, 다시 부르는 ‘리워크’ 시리즈에는 제주의 소리가 ‘방음’ 없이 담겼다. 22일 나오는 애월4화인 ‘낡은 앞치마’는 공동체의 어머니 같았던 이를 그리는 노래다. 애월1화 ‘고사리장마’는 하루 종일 비가 많이 내리고 나면 고사리가 쑥쑥 자라 있는 모양을 뜻하는 제주 방언에서 제목을 따와 이적이 만든 노래고, 3화는 옆집 사는 이상순이 만들어준 ‘집’이다.
싱잉앤츠의 보컬이자 문화기획자로 활동하던 김명재는 지난해 결혼과 함께 제주도로 내려왔다. 준비 없이 훌쩍. 부모님 지인의 제주도 빈집에 터를 잡았다. 결혼 뒤 부모님과 같이 살던 처지였고 신촌에 차린 문화공간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밀려났다. 서울에서도 기타 강습은 했지만 여기서는 재능을 많이 팔고 다닌다. 주말에는 국제학교에서 밴드를 지도하고, 제주도 학원에서 기타를 가르친다. 곧 동네의 다문화가정 아버지들로 구성된 밴드도 지도한다. “서울에서는 잉여로웠는데 여기서는 생산자가 되었죠.” 지난해 콜라비를 심어서 80박스를 팔았다. “테크닉의 신동은 있지만 삶의 신동은 없죠. 여기서는 깊은 삶을 살 수 있어서 좋아요. 여기서 후렴처럼 머무는 순간들을 음악으로 담을 수 있을 것 같아요.”
■ 텃세, 그리고 콜라보 홍대 정서가 그대로 제주에 재현되지는 않는다. “홍대에서 잘된다고 해서 제주에서 잘되지 않는다. 편차가 심하다”고 박은석씨는 말한다. 물 건너온 아티스트들이 많아지면서, ‘정착민’들의 음악적 지분에 대한 논란도 뜨겁다. 지역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한 무료 공연을 여는 기획사 ‘바당1미터 음악회’ 최한정 대표도 텃세를 맞닥뜨린 바 있다. 2011년 서울에서 내려온 뒤 공연을 펼쳐왔는데, 읍사무소에서 내주던 기자재를 갑자기 안 내주었다. 카페 공연이 많아지면서 카페들 간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제주도 방언으로 노래를 부르는 사우스카니발의 리더 강경환씨는 자신의 음악을 ‘섬음악’이라고 정의내린다. 제주도 음악계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다. 그는 클럽 공연보다는 사람들이 많은 축제가 공연장으로 좋다고 말한다. 고사리장마 뒤 부쩍 돋아나는 고사리처럼 많아진 벼룩시장은 좋은 예다. “‘장터에까지 나가 노래해?’ 하는데 더 많은 사람에게 들려주게 되어 좋아요.”
정착민과 원주민의 콜라보(협업)는 텃세와 반감을 넘어 자라고 있다. 사우스카니발이 올봄 내는 미니앨범에는 서울에서 온 정착민 최성원의 노래 ‘제주도의 푸른 밤’을 레게풍으로 담는다. 유호성씨는 24일 스튜디오 101을 오픈한 뒤 제주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밴드 남기다와 묘한의 앨범을 녹음할 생각이다.
김명재는 “익명으로 살기 힘들어서 부대낀다”면서도 “고민도 많고 실력도 있는데 구조는 마련 안 된, 가능성의 음악공간이 이곳에 있다”고 말했다. 서울내기의 노래에 제주 바다가 피처링해줄지도 모르겠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제주에 공연장이 여럿 생겼고
음악인들이 찾아와 갖가지 실험
록밴드·레게밴드·포크가수까지
그들 따라 팬도 비행기에 몸실어 장필순이 애월에 정착한 지 11년
뿌리내리는 음악인 갈수록 늘어
보컬이자 문화기획자 김명재는
밴드 지도·강습하며 ‘자급자족’
“가능성의 음악공간이 여기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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