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마이클(오른쪽)이 앤드루 리즐리와의 듀오인 왬!으로 활동하던 1985년 4월7일 중국 베이징에서 공연하고 있다. 이들은 중국에서 공연한 최초의 서구 팝 가수였다. AP 연합뉴스
“내 친구의 명복을 빈다! (데이비드 보위, 프린스, 레너드 코언에 이어) 올해 또 한 명의 위대한 아티스트가 우리 곁을 떠났다. 2016년, 이제 그만 꺼져줄 수 없겠니?” 25일(현지시각) 크리스마스, 조지 마이클이 53살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가수 마돈나는 트위터를 통해 이렇게 탄식했다. 마돈나는 트위터에 자신이 “조지, 난 당신과 자고 싶어요”(조지 마이클의 곡 ‘아이 원트 유어 섹스’에서 따온 농담)라고 말하며 그를 무대로 불러내는 장면이 담긴 1989년 <엠티브이> 시상식 동영상을 함께 올렸다.
조지 마이클이 그룹 왬!(Wham!) 시절 명곡 ‘라스트 크리스마스’의 바로 그 성탄절에 숨졌다. 마이클의 대변인은 “그가 영국 옥스퍼드셔주의 자택에서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고 외신은 전했다. 현지 경찰은 “그의 사망에 특별한 혐의점은 없다”고 발표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신화를 쓰고 떠난 이 위대한 팝스타에 대한 기억들이 소환되고 있다. 영국 <가디언>은 ‘조지 마이클의 5가지 위대한 퍼포먼스’를 꼽으며 그를 기렸고, <롤링스톤>은 ‘조지 마이클의 명곡 20선’을 발표했다. 세계 팬들의 가슴을 울렸던 그의 위대했던 순간들을 돌아본다.
2005년 7월2일 영국 런던 하이드파크에서 폴 메카트니와 공연하고 있는 조지 마이클(왼쪽). 부유한 G8 국가들이 아프리카 빈곤국들을 지원할 것을 촉구하는 무료 콘서트였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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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아이돌의 ‘케어리스 위스퍼’ 조지 마이클은 1981년 고교 동창인 앤드루 리즐리와 듀오 그룹 왬!을 결성해 음악을 시작한다. 초반 섬세한 외모로 인기가 많았던 앤드루 리즐리에 비해 키프로스 출신 그리스계 아버지와 영국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조지 마이클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데뷔 앨범 <판타스틱>에 이어 1984년 2집 <메이크 잇 빅>을 발표하며 ‘웨이크 미 업 비포 유 고고’ ‘케어리스 위스퍼’ ‘에브리싱 시 원츠’ 등 3곡을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리면서, 왬!은 전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이돌 그룹이 됐다. 그들이 서구 팝스타로선 처음으로 중국에서 대형 공연을 열 무렵엔 이미 뛰어난 보컬이자 작곡가로 뮤직비디오까지 연출하는 마이클의 존재가 리즐리를 압도했다. 왬!은 결국 1986년 3집 <뮤직 프롬 디 에지 오브 헤븐>을 끝으로 해체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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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도발 ‘페이스’ 1987년 마이클은 첫 솔로 앨범 <페이스>(Faith)를 발표해 2500만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는 지금까지 단 6장의 음반으로 4300만장의 음반을 팔아치운 기록을 갖고 있다. 영국과 미국에선 각각 12곡, 10곡씩을 싱글 차트 1위에 올려놓았다. 짧고도 강렬하게 타올랐던 그의 음악 경력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페이스’ ‘파더 피겨’ ‘멍키’ ‘원 모어 트라이’. 무려 4곡이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던 <페이스>는 록과 어쿠스틱, 댄스와 발라드 등 여러 장르를 한데 화합하는 그의 음악적 능력을 보여준 음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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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은 길 ‘섬바디 투 러브’ 그는 솔로로 나서기 직전 솔(soul)의 여왕이라고 불린 어리사 프랭클린에게 듀엣을 요청했지만 처음엔 그를 십대 아이돌쯤으로 여긴 프랭클린에게 거절당하기도 했다. 결국 둘이 함께 부른 ‘아이 뉴 유 워 웨이팅’에서 그는 프랭클린에게 뒤지지 않는 빼어난 가창력을 선보였다.
1992년 퀸의 리더였다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프레디 머큐리 추모 공연 무대는 조지 마이클로 기억된다. 평소 머큐리를 가장 존경했다는 그는 빨간 재킷을 입고 나와 머큐리가 가장 사랑했던 노래 ‘섬바디 투 러브’를 그만의 감성으로 훌륭히 소화해낸다. 당시 소문처럼 그가 만약 퀸의 보컬로 활동했다면, 자신의 음악성을 뒷받침해줄 그룹을 가졌다면, 그의 음악 인생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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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 속에서도 모색한 ‘심포니카’ 1990년대 후반 들어 소속사 소니뮤직과의 계약 분쟁 소송과 여러 스캔들을 겪으며 그는 오랫동안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다. 98년 미국 베벌리힐스 화장실에서 경찰관과 음란행위를 했다는 죄명으로 체포되면서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교통사고와 마약 소지 혐의로 여러번 체포되기도 했다. 오랜 기간 은둔하던 그는 2014년 10년 만에 <심포니카>를 발표하며 재기를 모색했다. 재능에 비해 그의 삶은 너무나 짧았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