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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박정희 핍박에도…윤이상이 사용한 물감은 ‘한국’이었다

등록 2017-09-16 10:21수정 2017-09-16 10:32

[토요판] 커버스토리
윤이상 탄생 100년
▶ 9월17일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이 태어난 지 꼭 100년이 되는 날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독일에서 활동하던 그를 사실상 ‘납치’해 국내로 데려온 뒤 ‘북괴 대남 공작단’의 수괴 딱지를 처음 붙였다. 족쇄는 질기고도 강했다. 한국적인 정서를 세계인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전달했다는 현대음악 거장의 작품세계는 오래도록 그의 고국에서 무시되고 금기시됐다. 윤이상을 닮고 싶은 젊은 음악인이 거장 윤이상을 떠올리며 글을 보내왔다.

2003년. 나는 경상남도 통영에 처음 가보았다.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통영 앞바다에 위치한 숙소에 밤늦게 도착하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커튼을 활짝 열어젖히는 순간 문득 가슴을 후벼 파는 슬픔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윤이상 선생님이 이 광경을 다시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니!’ 윤이상을 옥죈 이른바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의 실체는 매우 복잡할뿐더러 진실규명과 연구작업을 더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그가 어떤 근거로 체포되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는지 단정하긴 어렵다. 다만 윤이상이 석방된 후 그의 고향, 아름다운 통영 앞바다를 영영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윤이상은 일본을 찾을 때면 낚싯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가 통영의 바다를 그리워하며 슬피 울었다고 한다. 나는 작곡가 윤이상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통영 앞바다를 바라보며 그의 ‘명예회복’을 다짐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그의 작품을 연주한 것도 이 때문이다.

191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3살 때부터 통영에서 산 윤이상은 평생 통영을 진짜 고향으로 여겼다. ‘동백림 사건’ 이후 내쫓기듯 독일로 돌아가 고국 땅을 밟을 수 없었던 그는, 일본을 찾을 때면 낚싯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가 통영 앞바다를 그리워하며 슬피 울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1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3살 때부터 통영에서 산 윤이상은 평생 통영을 진짜 고향으로 여겼다. ‘동백림 사건’ 이후 내쫓기듯 독일로 돌아가 고국 땅을 밟을 수 없었던 그는, 일본을 찾을 때면 낚싯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가 통영 앞바다를 그리워하며 슬피 울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나는 열네 살에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많은 유럽인은 한국인인 내게 한국의 자동차나 전자제품, 혹은 88서울올림픽을 언급하며 호감을 나타냈다. 특히 유럽의 음악가들은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 소프라노 조수미, 지휘자 정명훈 등의 이름을 이야기하며 한국인의 저력에 감탄했다. 아직 어렸던 나는 그때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뿌듯했다.

독일에서 처음 접한 이름 ‘Isang Yun’
익숙하고 친근한 현대음악 기둥인데
한국에선 왜 한번도 못 들어봤을까
그의 음악세계에 점점 빠져들었다

가곡·교가·동요 위주의 초기 작품
색감과 붓칠 달라도 한국의 색 띠어
정서를 서양악기로 표현
흐름, 리듬 등 온몸으로 느껴야

동백림 사건 이후 독일로 다시 내쫓겨
일본 찾아 멀리서 통영 앞바다 그려
유럽 사회 체험하며 분단 현실 눈떠
음악으로 남북이 하나되는 꿈 키워

음악가는 ‘공간’에서 곡 만들고 연주
윤이상의 공간은 곧 분단의 공간
‘윤이상 자서전’이라 불린 첼로 협주곡
어려움 뚫고 ‘라’ 도달하는 날 올까

유럽은 한국에 비해 현대음악을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수많은 연주회를 찾아다니면서 매우 다양한 현대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처럼 난생처음 들어보는 이름과 만나게 된다. ‘Isang Yun’. 수많은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윤이상’이라는 인물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새삼 자랑스럽게 만들어줬다. 동시에 너무 부끄러웠다. 유럽의 음악가들이 모두 알고 있고 존경하는 한국인 작곡가를 나는 왜 여태껏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 유럽에서는 윤이상의 음악이 이렇게 자주 연주되는데, 한국에서는 왜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걸까.

윤이상의 음악을 알아갈수록 유럽인들이 한국에 대해 말할 때 특별히 윤이상을 거론하지 않은 이유도 자연스레 깨닫게 됐다. 그들에게 윤이상의 음악은 새롭고 신기한 것이 아니라 너무도 익숙하고 친근한 현대음악의 기둥 중 하나였던 것이다. 나는 점점 더 그의 음악세계에 빠져들어갔다.

한국이라는 물감을 사용한 작곡가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윤이상은 3살 때부터 살게 된 통영을 진짜 고향으로 여겼다. 한번이라도 통영 땅을 가본 사람이라면 너무 잘 알 게다. 다이아몬드로 짜인 카펫 같은 통영 앞바다와 보일 듯 말 듯 진주처럼 박혀 있는 수백 개의 섬들. 그 아름다움에 취해 이곳을 고향으로 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게 된다.

윤이상은 일본 오사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통영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하며 작곡 활동을 시작했다. 가곡집을 내고, 통영 소재 거의 모든 학교의 교가를 작곡했으며, 유치환·김춘수 등 통영 출신 예술인들과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어 통영 음악과 문화 발전을 위해 애를 썼다.

※이미지를 누르시면 확대됩니다
여기 매우 중요한 대목이 하나 있다. 서양 현대음악의 대가로 손꼽히는 작곡가 윤이상의 초창기 작품이 우리가 쉽게 흥얼거릴 수 있는 가곡·교가·동요라는 사실. 통영 앞바다의 파도 소리, 어부들의 흥겨운 노랫가락, 경남 지방의 민요 등 윤이상이 사용한 물감은 ‘한국’이었고, 그는 나중에 붓을 바꾸더라도 물감은 그대로 사용했다. 그래서 아무리 색감과 붓칠이 달라도 윤이상의 음악은 한국의 색을 띤다.

윤이상은 39살 때인 1956년 한국을 떠났다. 유럽의 현대음악을 만끽하며 행복하기도 했겠지만, 마음 한켠은 늘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차지했다. 정치·사회 분야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전후의 안정된 유럽의 정치·사회 현실을 지켜보며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다. 더군다나 분단된 조국을 떠나 분단된 나라 독일에서 생활했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그의 삶에도 영향을 줬으리라. 한국과 독일은 분단국가라는 공통점을 지녔으나, 당시 서독과 동독 사이엔 자유로운 교류가 있었고, 이는 윤이상으로 하여금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꿈꾸게 만든 화로가 되었다.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공작단을 검거했다는 중앙정보부의 발표 내용이 실린 1967년 7월8일치 <경향신문> 1면. 동그라미 안이 윤이상.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공작단을 검거했다는 중앙정보부의 발표 내용이 실린 1967년 7월8일치 <경향신문> 1면. 동그라미 안이 윤이상.
동백림 사건으로 내쫓기듯 독일로 돌아온 윤이상은 독일 국적을 취득한 후에도 남북통일의 꿈을 간직하고 해마다 평양에서 ‘윤이상 음악회’를 열어 음악을 가르치고 작곡 활동을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통일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음악을 통해 남북이 한마음이 될 수 있다는 꿈만은 이루어졌다. 1990년 서울전통음악연주단이 처음으로 방북해 통일음악회가 열렸고, 2008년에는 내가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합주단과 한국인 최초로 협연도 했다. 윤이상의 음악을 통해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음악의 힘, 윤이상의 힘이다.

현대음악에서 국악을 듣다

윤이상의 음악을 어렵다고 여기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서양 악기로 연주하기 위해 서양 현대음악 작곡법(무조성·atonality, 불협화음·dissonance, 불규칙적인 리듬·irregular rhythm)으로 국악을 표현한 음악이라는 점은 알고 있어도, 현대음악이라는 부담 때문에 지레 어렵게 느끼곤 한다. 그러다 보면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부분을 놓치는 경우도 있다.

윤이상의 음악은 눈을 뜨고 어떤 악기가 연주되고 있는지, 어떤 음정인지, 어떤 화음인지 파악하려 하면 안 된다. 눈을 지그시 감고 음악의 흐름, 리듬, 음과 음 사이의 입체적인 공간, 그리고 음에 담겨 있는 감정을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 그러면 국악이 들린다. 거문고, 가야금, 아쟁 등을 그대로 흉내 내는 부분들이 많아 바로 알아챌 수 있다.

기타의 피크를 사용해 첼로 현을 튕기면 거문고, 손톱으로 첼로 현을 튕기면 가야금, 널찍한 비브라토를 사용해 반음을 오르락내리락하면 아쟁…. 그렇지 않은 부분도 편견을 버리고 들으면 국악의 흥과 한이 느껴진다. 거꾸로 된 붓점 리듬으로 장구의 기덕을, 특이하고 다양한 잇단음표로 사물놀이 장단을, 긴 음의 흔들림과 맺음을 조절해 판소리를. 조금 더 자세히 들어보면 한국인이라면 쉽게 다가서는 음색과 우리말도 알아챌 수 있다. 한 음의 시작, 움직임과 마무리를 어떻게 조절하라 등 윤이상이 악보에 적어놓은 지시를 따르면 경상도 사투리와 전라도 사투리 고유의 억양이 되살아난다.

한국적인 것, 한국만의 정서를 서양 악기로 표현하고자, 윤이상은 악기의 특성을 완벽하게 파악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서양 음악가들에게 ‘이 부분은 이런 소리가 나야 해!’라며 시범을 보여주곤 했지만, 그들은 귀로 흉내를 낼 뿐, 한국인이 사물놀이를 들으며 어깨를 절로 들썩거리고 판소리를 들으며 심청의 애절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는 감정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윤이상의 음악은 현대음악에 익숙한 유럽인이 아니라 우리에게 훨씬 더 친근감 있다. 그러면서도 깊은 울림을 가져온다. 그의 음악을 한국의 음악가가 연주하면, 설명하기 어려운 요소를 마음으로 표현하는 데 더 유리하지 않을까? 외국인들은 윤이상 작품의 이론적 형태를 연구하고 현대음악의 요소들을 살려 훌륭한 연주를 하거나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음악을 마음에서부터 소화해 ‘얼씨구’ ‘좋다~’를 외칠 수 있다. 결국 윤이상의 음악은 우리 음악, 한국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첼로, 윤이상의 목소리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국내외 수많은 음악가들이 윤이상의 작품을 연주한다. 지금까지 윤이상의 작품은 항상 프로그램의 일부에 불과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윤이상의 음악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될 올해를 손꼽아 기다려왔다. 윤이상 헌정 무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작품만을 연주할 수 있는 기회여서다. 한 연주자가 한 작곡가의 작품으로 공연 전체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것은 전곡 콘서트(바흐 첼로 무반주 조곡 전곡,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등) 형식으로는 흔히 접할 수 있지만 여러 작품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은 극히 드물다.

무엇보다 내겐 윤이상이 첼로를 애지중지했고, 첼로를 위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다. 윤이상은 일본 유학 시절 배운 첼로를 자신의 목소리라고 여겼다. 첼로의 매력은 기본 음높이와 음색이 사람의 목소리와 유사하다는 사실에 있다. 윤이상도 이 부분에 마음이 끌렸다. 아쟁·거문고·가야금으로도 들리기에 그는 첼로를 유독 사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독일 방문 기간인 지난 7월5일, 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가 독일 베를린 가토 공원묘지에 있는 윤이상 묘소를 찾아 식재된 동백나무를 살펴보고 있다. 동백나무는 통영에서 직접 가져간 것이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의 독일 방문 기간인 지난 7월5일, 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가 독일 베를린 가토 공원묘지에 있는 윤이상 묘소를 찾아 식재된 동백나무를 살펴보고 있다. 동백나무는 통영에서 직접 가져간 것이다. 연합뉴스
한동안 ‘윤이상 탄생 100주년 기념’ 프로그램 준비를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윤이상의 탄생과 100년 후, 우리가 윤이상의 일생을 되돌아본다는 상징성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살려낼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전반부는 윤이상의 목소리를 상징하는 첼로 무반주와 피아노 반주로, 후반부는 세상을 상징하는 오보에, 하프, 피아노와 각각 듀오 연주로 구성했다. 첫 곡인 ‘파를란도’(Parlando)는 무반주로, ‘말하듯이’라는 뜻을 지닌 음악 용어이다. 이는 마치 윤이상이 혼자 무대에 나와 말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 작품은 현대음악과 국악적 요소가 잘 짜여 있다. 윤이상이 자신의 확실한 목소리를 찾기 전에 서양 음악을 빌려 국악을 슬쩍 삽입하려 한 시험적 작품이라 할 만하다.

윤이상 탄생 90주년을 맞아 2007년 통영에서 열린 ‘윤이상 국제 페스티벌’ 개막공연 장면.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윤이상 탄생 90주년을 맞아 2007년 통영에서 열린 ‘윤이상 국제 페스티벌’ 개막공연 장면.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윤이상의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음 곡인 ‘글리세’(Glissees)라는 무반주 작품에서는 첼로를 이용해 가야금·거문고·아쟁을 흉내 내면서 새로운 음악 세계를 창조한다. 처음에는 띄엄띄엄 이 소리 저 소리를 흉내 내다가 결국에는 모든 요소들이 융합된다. 이 곡의 제목은 ‘활주’인데 악기에서 음과 음 사이를 잇는 ‘글리산도’(glissando) 기법을 뜻한다. 서양 현대음악에서는 이 기법을 의도적으로 과장해 새롭다는 평도 받았으나, 국악에서는 예전부터 존재했다. 음을 다른 음이나 불분명한 음으로 끊임없이 자연스럽게 올리고 내리는 기법은 판소리, 피리, 가야금, 거문고 등에서는 기본이다.

전반부의 마지막 곡인 ‘노래’(Nore)는 판소리 그 자체이다. 노래를 뜻하는 서양 음악의 제목들이 많음에도 윤이상이 일부러 ‘노래’라고 지은 이유는 첼로가 외국인처럼 ‘싱’(sing)을 하는 게 아니라 한국인처럼 노래하기를 원해서일 거라 추측해본다. 중간중간에 공간을 채워주는 피아노는 마치 고수의 추임새와 같다. 한이 맺힌 울음소리를 풀었다가 다시 조이는 것이 반복되면서 구슬픈 판이 펼쳐지고 전반부가 끝난다.

후반부는 윤이상과 세상의 대화로 구성했다. 오보에와 첼로를 위한 ‘오스트-베스트 미니아투렌’(Ost-West Miniaturen), 즉 ‘동-서 소품들’에서는 피리를 흉내 내는 오보에가 동양을, 첼로가 서양을 각각 상징한다. 오보에가 음을 살짝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국악의 향기를 낼 때, 첼로는 서양의 어법을 고수한다. 두 악기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 결국 오보에는 첼로를 설득하고, 첼로는 점차 동양의 어법을 품어 안는 것이 흥미롭다. 다음 곡은 하프와 첼로를 위한 듀오. 피아노 대신 하프를 편성한 이유는 그 음색이 가야금을 닮았기 때문이다. 첼로도 손가락으로 현을 뜯어 가야금 소리를 흉내 낼 수 있기 때문에 2악장에서는 가야금 두 대가 말을 주고받는 것처럼 들린다.

마지막 곡을 유독 신중하게 골랐다.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에스파스 I’(Espace I, 공간 I)이다. 음악가는 항상 공간 안에서 음악을 만들고 연주한다. 사람마다 공간의 의미는 각각 다르지만 윤이상에게 공간은 ‘분단의 공간’이었다. 그는 ‘분단의 공간’을 좁히기 위해 온몸을 던졌고, 그것을 작품에 온전히 담아냈다. 음이 만들어내는 공간과 음과 음 사이의 공간이 계속 변화하면서 곡의 흐름이 아름답게 전달되는 작품이다. 전체적인 공간이 좁아졌다 멀어지면서 서러움과 한이 느껴진다. 공간이 커지고 거리가 멀어졌지만 맨 마지막에 첼로가 음을 살짝 올리는 국악적인 기법을 사용해 윤이상의 작고 지친 목소리는 ‘우리는 하나’라는 희망의 메세지를 남기고 사라진다. 윤이상의 삶이, 윤이상의 음악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아닐까.

솔#의 1/4올림과 라 사이의 간격

윤이상은 분단의 현실 속에서도 한민족 간 문화 교류가 이어지고 음악이 남북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맡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일제강점기 때 저항운동을 하다 투옥되기도 했던 그의 민족의식이 독일 유학 시절 서독과 동독을 왕래하며 통일의 꿈으로 커진 건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윤이상은 남북의 음악가들이 하나의 무대 위에 함께 서서 하나의 마음으로 연주하는 장면을 늘 꿈꿨다.

윤이상을 알아갈수록 윤이상에 빠져들수록, 같은 꿈을 키워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독일 유학 시절 나는 ‘나의 뿌리가 고향 전주에 있다’ 생각하며 한국을 그리워했다. 한국 뉴스에 나오는 이산가족의 만남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와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음악을 통해 한마음으로 연주하면서 음악의 위력을 느꼈고, 남북합동연주회의 꿈은 더욱 커졌다.

2008년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1982년부터 해마다 평양에서 열리는 윤이상음악제에 초청받은 것이다. 나는 2003년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첫해 행사에 참가해 유일하게 윤이상 첼로 협주곡을 연주한 적이 있다. 윤이상의 자서전이라고도 불리는 이 곡의 국악적인 요소를 한국인으로서 제대로 표현해 외국인 참가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북한 초연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평양 윤이상음악당에 세워진 윤이상 흉상. 고봉인 제공
평양 윤이상음악당에 세워진 윤이상 흉상. 고봉인 제공
2008년 평양에서 열린 27차 윤이상음악제에 초대받아 첼로 연주를
2008년 평양에서 열린 27차 윤이상음악제에 초대받아 첼로 연주를

당시의 특별한 순간은 10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떠오른다.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합주단과 첫 리허설을 맞추던 순간, 그때의 감회는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다. 큰 꿈을 이루었다는 행복함, 윤이상의 한을 풀고 있다는 성취감, 윤이상의 가족과 손을 잡고 나눴던 따뜻한 온기, 이 모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휘몰아치며 한 시간의 리허설이 꿈만 같았다. 꿈에서 깰까봐 걱정까지 했다. 대부분의 단원들과는 대화가 금지된 상황이었으나, 함께 연주하는 시간 동안 우리는 음악으로 소통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

평양 순안공항에서 고려항공 여객기에 오르기 전 버스를 타려고 이동하는 모습. 고봉인 제공
평양 순안공항에서 고려항공 여객기에 오르기 전 버스를 타려고 이동하는 모습. 고봉인 제공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 앞에 선 첼리스트 고봉인. 고봉인 제공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 앞에 선 첼리스트 고봉인. 고봉인 제공
협주곡 마지막 부분을 함께 연주한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이 쓰리도록 아프다. 첼로 협주곡 마지막 부분에서 첼로는 솔#(G#)에서 라(A)에 도달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여기서 라음은 남북통일을 상징하고 첼로는 역시 윤이상 그 자신이다. 첼로가 마지막 힘을 다해 솔#에 매달려 있을 때 주변 세상을 상징하는 오케스트라는 저항을 한다. 이 부분에서 남북통일의 길이 얼마나 험하고 어려운지를 느낄 수 있다. 북한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함께 땀을 흘리며 연주했다. 윤이상이 창조한 음악세계에서 분단 없이 하나가 되어 희망을 잃지 말자는 절실한 믿음, 그리고 이 순간이 끝나면 다시는 이런 소통을 하기 힘들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생각하며 나도 몰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첼로는 솔#에서 안간힘을 다해 1/4음까지 음정을 높이지만, 끝내 라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트럼펫이 대신 라를 달성해주며 협주곡은 끝난다. 현실의 우리는 저 트럼펫 소리를 과연 언제쯤에야 들을 수 있을까?

작곡가 윤이상은 한국 음악과 서양 현대음악을 융합하며 새로운 음악세계를 창조해냈다. 이 창조물은 서양 현대음악의 중요한 기둥으로 자리잡았다. 윤이상 덕분에 국악이 닿기 어려운 곳에도 국악이 등장했고 윤이상의 음악을 통해 외국의 음악가들이 우리나라 음악의 기법을 익히게 되었다.

윤이상 <광주여 영원히!>(1981년 작)

윤이상의 음악은 한국인 연주자와 한국인 청중이 누구보다 자신 있게 연주하며 즐길 수 있는 음악이다. 서양 현대음악이 아닌 우리 음악, 한 위대한 한국인이 남긴 새롭지만 낯설지 않은 음악, 한 사람의 서러운 인생과 애절한 희망이 묻어 있는 음악, 통영 앞바다 내음이 풍기는 음악을 진심을 다해 세상에 들려주고 싶다. 윤이상의 음악으로 솔#의 1/4올림과 라 사이의 간격을 반드시 좁혀나가고 싶다.

고봉인 첼리스트·분자생물학 박사

※고봉인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를 거쳐 14살 때 독일로 떠나 베를린 음악대학을 다녔다. 이후 미국 하버드대학 생물학과 재학 중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첼로 석사학위를 동시에 받았다. 프린스턴대학에서 분자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문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차이콥스키 국제청소년콩쿠르 첼로 부문 1위 등의 수상 경력뿐 아니라 세계적 아티스트와 협연 경력도 화려하다. 베를린에서 음악 공부를 하던 시절 윤이상의 음악세계에 깊이 빠져들었고, 2008년 평양에서 열린 제27차 윤이상음악제에서 윤이상의 작품을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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