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장준하 탄생 100돌 기념전 이동환 화가
붓이 아닌 칼을 잡았다. 물감을 묻혀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대신 날카로운 조각칼로 나무를 팠다. 칼에 패인 나무판 위에는 한 인물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을 묘사하는 데는 부드러운 붓이 적절치 않았다. 깎고, 파고, 찍어야 했다. 다채로운 물감도 필요하지 않았다. 오직 검은 색 하나만 필요했다. 나무를 파면서 여러번 울컥했다.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해 죽음의 문턱까지 몰리길 수차례. 마침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충칭에 도착한 청년 장준하(1918~75)는 허름한 청사에서 백범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난다. 이층에서 계단을 통해 내려오는 백범 등을 바라보는 장준하는 감격스러워 눈물을 흘렸다.
그 장면을 나무에 묘사하던 화가 이동환(50) 역시 떨리는 감정을 간신히 추스리며 조각칼을 움직였다. 박정희 독재정권의 대표적인 의문사 희생자인 장준하 선생의 일대기를 목판화로 옮긴 이씨는 ‘젊은 세대가 역사를 바로 알길 바라는 마음에서 전시회를 준비했다’고 했다.
장준하 자전수기 ‘돌베개’ 읽고 감동
200개 장면 2년8개월간 목판에 새겨
‘칼로 새긴 장준화’전 새달 9일까지
“젊은이들에게 올바른 역사 전하려” ‘문인화 대가’ 고조부부터 4대 이어
한국화 전공 판화 독학해 첫 전시 이씨는 지난 23일 개막해 새달 5일까지 서울 종로구 화동 132 아트비트갤러리에서 목판화전 <칼로 새긴 장준하>를 열고 있다. 그는 몇년 전 동네 서점에서 우연히 장준하 선생의 자전적 수기 <돌베개>를 읽고 그의 삶에 빠져들었다. 그 책을 읽고 또 읽은 이씨는 선생의 삶을 목판화에 새기기로 작정했다. 모두 200개의 중요 장면을 뽑았다. 그리고 2년 8개월동안 나무판에 한 장면씩 새기기 시작했다. 강제 학도병으로 끌려가는 장면부터 시작해 만주에서 일본군을 탈출한 뒤 6천리를 걸어 천신만고 끝에 광복군이 되고, 미군 특수부대 훈련을 받고 밀입국 하기 직전 광복을 맞고, 해방 이후 어지러운 한국사회를 겪은 뒤, 박정희 독재에 맞서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다가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의문사하는 일대기를 파노라마처럼 파내려 갔다. 그 가운데 134개 장면을 골라 이번에 전시했다. 마침 올해는 장준하 선생 탄생 100돌이다.
그는 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했다. 그동안 8차례 개인전을 한 중견작가이지만, 목판화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목판은 독학했다. 그의 피에는 화가의 유전자가 강하게 흐른다. 구한말 고조할아버지가 문인화 대가였다. 증조할아버지도 아버지를 이어 화가였다. 할아버지는 일제와 한국전쟁을 겪는 와중에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아버지가 끊겼던 화가의 길을 이었다. 지금도 남종 문인화의 계보를 이끄는 매정 이창주 화백이 바로 그의 부친이다. 4대에 걸쳐 화업을 계승한 셈이다.
전남 장흥에서 2남3녀의 네째로 태어난 이씨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화가의 길이 숙명처럼 느껴지곤 했어요.” 고교 1학년 때 미대를 가기로 작정했다. 1회 졸업생인 부친의 모교 조선대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이씨는 중앙대 대학원을 거쳐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갔다. 하지만 남들이 흔히 몰두하는 공모전에는 눈길을 두지 않았다. “상을 받는 것이 화가의 길을 망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어요.”
동양화가 강경구 교수에게 우연히 목판화를 선물받았다. 마음이 끌렸다. 나무판에 조각칼을 대기 시작했다. 1년에 한두점씩 목판화를 제작해왔다. “젊은 세대들에게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고 싶었어요. 마침 국정교과서 파문이 이슈가 됐을 때 거론된 현대사의 인물이 장준하 선생이었어요. 그의 삶을 목판화로 풀어내면 젊은이들이 글보다는 친숙하게 관심을 갖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는 장준하 선생의 행동가적인 삶이 감동을 준다고 했다. “지식인들은 행동하지 않고 사고에만 머무는 사례가 많아요. 장 선생님은 조국 광복을 위해 행동했어요. 일본군을 탈출해 7개월간 6천리를 걸어 광복군 본부까지 찾아가는 여정은 비참하기도 하고, 순간순간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위기의 연속이었어요. 어렵게 찾아간 임시정부의 파벌 싸움을 용기있게 지적하고, <사상계> 같은 잡지를 만들어 박정희 독재에 목숨을 걸고 항거하며 진정 행동하는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줬어요.”
그는 목판화의 마지막에 구멍 뚫린 해골을 묘사하고, ‘못난 선배가 되지 말자’는 글자를 굵게 파 넣었다. 2012년 이장할 때 선생의 두개골에 드러난 의문사의 증거와, 선생이 평소 후배들에게 입버릇처럼 반복하던 말씀이다.
“정적이자 가해자인 박정희를 기리는 기념관에 비해, 장준하 선생의 기념사업회는 초라한 게 여전한 현실입니다. 안타까워요.” 전시장 입구에는 그가 수없이 읽고 읽어 너덜너덜해진 <돌베개>가 관람객을 맞고 있다.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학도병에 징집됐다 광복군으로 탈출한 청년 장준하 선생의 모습을 새긴 목판화를 배경으로 선 이동환 화가. 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200개 장면 2년8개월간 목판에 새겨
‘칼로 새긴 장준화’전 새달 9일까지
“젊은이들에게 올바른 역사 전하려” ‘문인화 대가’ 고조부부터 4대 이어
한국화 전공 판화 독학해 첫 전시 이씨는 지난 23일 개막해 새달 5일까지 서울 종로구 화동 132 아트비트갤러리에서 목판화전 <칼로 새긴 장준하>를 열고 있다. 그는 몇년 전 동네 서점에서 우연히 장준하 선생의 자전적 수기 <돌베개>를 읽고 그의 삶에 빠져들었다. 그 책을 읽고 또 읽은 이씨는 선생의 삶을 목판화에 새기기로 작정했다. 모두 200개의 중요 장면을 뽑았다. 그리고 2년 8개월동안 나무판에 한 장면씩 새기기 시작했다. 강제 학도병으로 끌려가는 장면부터 시작해 만주에서 일본군을 탈출한 뒤 6천리를 걸어 천신만고 끝에 광복군이 되고, 미군 특수부대 훈련을 받고 밀입국 하기 직전 광복을 맞고, 해방 이후 어지러운 한국사회를 겪은 뒤, 박정희 독재에 맞서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다가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의문사하는 일대기를 파노라마처럼 파내려 갔다. 그 가운데 134개 장면을 골라 이번에 전시했다. 마침 올해는 장준하 선생 탄생 100돌이다.
4대째 한국화 맥을 잇고 있는 이동환 화가는 혼자서 익힌 판화기법으로 장준하 선생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새겨 처음으로 목판화 전시를 하고 있다. 김구 주석을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광복 뒤 환국을 앞두고 상하이에서 마지막으로 찍은 기념사진을 새긴 목판화가 뒤로 보인다. 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장준하 선생의 일대기를 목판에 새긴 134개의 전시작 가운데 마지막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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