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이 극장 밖으로 탈출했다. 지난달 30일 저녁 스튜디오 춤 운동 ‘강남 1호점’에서 열린 극장 밖 무용 공연의 한 장면. 무대의 환상이 사라진 자리엔 관객과 무용수의 교감이 생겨났다. 이종찬 기자 rhee@hani.co.kr
[100℃르포] 과자 먹으며 무용공연 보다 “앞으로는 맥주 마시며 볼수도”
“무용은 ‘있는 척’ 하다가 망한 거에요.” 춤평론가 김태원(53·<공연과 리뷰> 편집인)씨가 만나자마자 독설을 쏟아놓았다. “돈이 있다고 예술 할 수 있는 거 아니거든요. 이게 예술의 패러독스입니다. 이제부터 ‘가난한 춤 운동’을 시작해야죠.” 한해가 저물어가던 지난달 30일 저녁 7시, “가난한 춤으로 돌아가자”는 모토를 내건 현대무용 공연이 열렸다. 무대는 극장이 아닌 ‘연습실’. 서울 강남구 양재동 주택가 2층에 자리잡은 ‘춤 스튜디오 6-D’에서 “역사는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이 곳을 ‘강남 1호점’이라고 이름붙였다. 연극의 소극장 운동에 비견할 ‘스튜디오 춤 운동’이 처음 태동한 곳이라는 의미다. 뜻을 함께 하는 스튜디오들과 함께 ‘체인점’ 형태로 운용하겠다는 의지의 표시이기도 하다. 60여평 남짓한 ‘강남 1호점’엔 70여명의 관객들이 들어찼고, 무용수들은 무대복 차림 그대로 관객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통유리 밖으로는 주말을 즐기려는 차량들로 붉은색 브레이크등이 도로를 메웠다. 이윽고 환풍기와 형광등이 나체를 드러낸 ‘가난한 극장’에서 장애숙·양승민, 김혜숙, 김혜진, 김수영, 최경실, 류석훈, 장은정 등 7팀의 공연이 펼쳐졌다. 마지막 장은정씨 공연엔 이날 출연하지 않았던 무용수들까지 뛰쳐나와 ‘즉흥 춤’을 춰 한바탕 난장이 벌어졌다. “극장 공연은 너무 경직돼 있잖아요. 그건 공연하는 사람이나 관객이나 마찬가지죠. 늦게 도착하면 문도 닫아버리고. 영화는 과자 먹으면서 볼 수 있는데, 왜 무용은 그러면 안되는 거죠?” 입장료 8000원, 소극장 절반값 ‘강남 1호점’ 주인장 안정준(43·현대무용가)씨는 “앞으로 맥주 마시고, 담배 피우면서 무용을 볼 수 있게 하려고 한다”며 “보는 사람과 추는 사람 모두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완성된 공연을 올려야 하는 극장 시스템은 창작자와 관객 모두를 짓눌러 왔다. 그래선지 무용은 극장보다는 연습실에서 보는 게 더 재미있다.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박력’과 ‘진솔함’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연습실’은 우리 전통 연희의 마당 개념과도 통한다. 같은 높이의 마당에서 함께 호흡하다보면 누가 배우이고 누가 관객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일체감이 생기는 것이다. 관객 이윤정(29)씨는 “무대의 환상을 걷어내니 오히려 더 입체적이고 섬세해서 좋았다”고 말했다. 이날 관중들이 지불한 돈은 8000원. 보통 2만원 가량 받는 소극장 공연의 절반도 안되는 값이다. 과자와 음료수는 덤으로 제공됐다. “몇천만원 들여서 공연을 해도 티켓 판매는 거의 안돼죠. 그러느니 차라리 비용을 20~30만원 정도로 줄이고 단출하게 만들자는 거죠. 보는 사람들도 더 편하게 볼 수 있게. 그렇게 해서 순수한 무용관객을 발굴하려는 거에요. 아마 관객이 (지금보다) 더 늘어나지 않을까요?”(현대무용가 장은정씨) 비용 20만∼30만원으로 단촐하게 공연이 끝나고는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파티는 새로운 시도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술렁였다. 체인점 문의가 폭주할 것에 대비해 “2층 이상으로 참여 자격을 제한해야 한다”거나, “‘아름다운가게’처럼 수익금의 일부를 ‘생활’이 어려운 무용가들에게 나눠주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대본과 무대계획서라는 형식적인 틀 대신, 오늘 같은 스튜디오 공연으로 지원금 제공 여부를 결정하면 어떨까”라는 희망섞인 대안도 제시됐다. 겉으로 보면 무용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풍족해야 마땅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나 서울문화재단 등 지원금을 나눠주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 서울문화재단은 무용가 1명 당 1억원을 지원한 적도 있다. 그런데 지원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빚을 지는 무용가도 늘어나고 있다. 무대미술이나 음악, 의상 등 부대 비용이 덩달아 늘어나기 때문이다. “젊은 예술가들에게 너무 큰 돈을 주면 낭비하게 돼요. 정신을 망치기도 하구요. 금액이 적더라도 장기공연을 하도록 유도하고, 좋은 작품이 나오면 외국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시스템이 필요해요.”(박명숙 경희대 무용학부 교수·서울현대무용단 예술총감독) 이런 저런 아이디어가 홍수를 이루는 가운데, 스튜디오 안주인 장애숙(43·현대무용가)씨가 외쳤다. “강남 1호점 여러분. 관세청 건너편 ○○식당에서 2차 하겠습니다.” 식당으로 갔던 일행은 다음날 새벽 1시께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와 소주 잔을 기울였다. 무대가 됐던 연습실이 이번엔 술판이 됐다. 창밖으로는 2005년의 마지막 날이 희뿌연 새벽으로 밝았다. 글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 이종찬 기자 r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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