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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명작 ‘세한도’에 어린 한중일의 인문적 역량과 예술혼

등록 2020-11-23 17:13수정 2020-11-24 02:36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23일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언론에 14년 만에 전모가 공개된 추사 김정희의 명작 <세한도>. 그림은 1m 남짓이지만, 후대 남긴 감상 글을 합해 길이 14m에 이르는 큰 그림으로 아래쪽 두루마리 시작 부분에 <완당 세한도>라는 제목이 쓰여 있다.
23일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언론에 14년 만에 전모가 공개된 추사 김정희의 명작 <세한도>. 그림은 1m 남짓이지만, 후대 남긴 감상 글을 합해 길이 14m에 이르는 큰 그림으로 아래쪽 두루마리 시작 부분에 <완당 세한도>라는 제목이 쓰여 있다.
1844년 7~8월. 당대의 대학자였던 추사 김정희(1786~1856)는 뜨거운 한여름, 시리디시린 한겨울 그림을 그렸다. 바람 타는 섬 제주 남서쪽 대정현 바닷가 근처 초막에서 집 사방에 가시를 치고 유배살이를 하면서 후대에 길이 남을 명작을 완성한 것이다. 바람 휭휭 몰아치는 한겨울 언덕에 시들어가는 노송과 이를 받치는 어린 소나무, 그리고 잣나무에 둘러싸인 초가집을 물기 없는 붓질로 깔깔하게 그리고 ‘서로 잊지 말자’는 붉은 글씨 도장을 꾹 찍었다. 그해 청나라행 사신단의 통역관으로 떠나려던 제자 이상적(1804~1865)에게 그려준 명작 <세한도>(歲寒圖)(국보 180호, 개인 소장)의 탄생이다.

23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길이 14m의 국보 <세한도>가 취재진 앞에 14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세한도>의 그림과 제작 사유를 적은 추사의 발문. 1m 정도로 그림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다.
<세한도>의 그림과 제작 사유를 적은 추사의 발문. 1m 정도로 그림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다.
<세한도>는 내년 1월31일까지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기증 기념 특별전 ‘한겨울 지나 봄 오듯―세한(歲寒)·평안(平安)’전을 통해 관객과 만난다. 세한도 전시는 2005년 용산에 박물관이 개관한 이래 네번째지만, 그 전모가 나온 건 2006년 ‘추사 김정희―학예일치의 경지’전 이후 처음이다. 자식보다 아끼는 그림을 기증하기로 한 소장자 손창근씨의 결단을 기려 박물관 쪽은 역대 최대의 특제 진열장까지 마련했다. 두루마리 앞쪽 바깥 비단 장식에 있는 청나라 문인 장목(1805~1849)의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 표제부터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추사가 말년에 기약 없는 제주 귀양생활을 할 때, 자신에게 중국의 귀한 서적을 보내준 역관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그린 이 그림은 실제론 70㎝ 정도에 불과하다. 10m 이상의 화폭 대부분은 그림에 대한 절절한 찬사를 담은 당대 청나라 문인 16명과 20세기 국내 전문가 4명의 감상글로 채워져 있다.

그림 왼편 위쪽.  <세한도>라는 제목과 ‘우선 이 그림을 보게나’라는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 하단 노송의 삐져나온 바늘잎과 대구를 이룬다.
그림 왼편 위쪽. <세한도>라는 제목과 ‘우선 이 그림을 보게나’라는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 하단 노송의 삐져나온 바늘잎과 대구를 이룬다.
학문과 예술이 일치된 조선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꼽히지만, 그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하는 건 그림에 얽힌 한·중·일 삼국의 아름다운 인연 때문이다. 조선 말기 그림을 선물받은 역관 이상적이 중국으로 가 청 문인의 글을 받고 자식에게 물려줬으나, 경술국치 뒤엔 친일파 민영휘 일가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다시 추사학을 정립한 일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의 소유가 되었으며, 그 뒤 서예 거장 소전 손재형이 일본의 후지쓰카 거처까지 가서 그림을 달라고 간청해 마침내 1945년 해방 직전 이 땅으로 돌아왔다. 소전 손재형은 선거에 출마하면서 정치자금으로 쓰기 위해 그림을 팔았고, 이를 입수한 개성상인 손세기·손창근 부자가 소유자가 됐다. 그렇게 40여년을 소장하다 손창근씨가 올 1월 그림을 위탁했던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 의사를 밝히면서 <세한도>는 마침내 국민의 공공 문화유산이 됐다.

19세기 중반 추사 김정희의 제자 소치 허련이 그린 추사의 초상. 2018년 손창근 기증 작품이다.
19세기 중반 추사 김정희의 제자 소치 허련이 그린 추사의 초상. 2018년 손창근 기증 작품이다.
추사는 논어의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는 구절에서 세한도의 모티브를 얻었다. 아무도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고 피할 때도 해마다 책을 보내준 제자 이상적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죽고 싶을 만큼 외롭고 힘든 고난의 삶을 <세한도> 속 노송과 집을 통해 자화상처럼 풀어냈다. 이를 받아들고 감격한 이상적은 이듬해인 1845년 중국 사행 때 들고 가 청나라 문인들의 글귀를 받았다. 이를 시작으로 지난 한 세기 동안 조선과 일본의 전문가들이 각기 다른 맥락의 감상평을 덧붙이거나 소장한 자취를 남기면서 그림은 단순한 문인화에서 한·중·일 삼국 석학들의 인문적 역량과 예술혼이 깃든 거대한 문예사적 기록이 됐다.

올해 8월 박물관에서 <세한도> 기증원을 쓰고 있는 손창근 선생의 모습.
올해 8월 박물관에서 <세한도> 기증원을 쓰고 있는 손창근 선생의 모습.
말미에 실린 한학자 위당 정인보(1893~1950)의 글이 뭉클하다. “시절은 도탄에 빠지고 핍박은 갈수록 심해져 후미진 산골짜기로 도피할 것을 꾀하느라 바빠서 시를 지을 겨를이 없었다. 나라가 광복을 찾게 되어 손군과 서울에서 다시 만났을 때 다시 이 그림을 내놓고 서로 마주 보면서 감개에 젖었다…”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은 이렇게 썼다. “이 그림을 보니, 문득 수십년 동안의 고심에 찬 삶을 겪은 선열들이 떠올라 옷소매로 눈물을 닦고 말았다. 추사에게 지각이 있다면 자신의 감정을 내려두고 나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후대의 그림 평을 담은 화폭은 곳곳에 큰 여백이 남아 있다. 소전 손재형이 후대 더 많은 감식안에게 평가를 받기 위해 비워둔 공간일 것이다. 21세기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재앙이 창궐한 환란의 시대, 세한도 화폭의 여백에 새로운 눈길로 그림 평을 써넣을 이는 누구일까. 관객이라면 누구나 세한도에 대한 감상을 갈무리해 자신만의 평을 상상할 수도 있을 터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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