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께 브뤼노 라투르의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신기후체제’ ‘녹색계급’ 같은 개념들을 통해 인간중심주의를 배제한 급진적 노선의 ‘생태정치학’을 주창해왔던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류학자인 브뤼노 라투르가 세상을 떠났다. <리베라시옹> <르몽드> 등 프랑스 주요 매체들은 “브뤼노 라투르가 8~9일(현지시각) 사이 7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그의 출판사 데쿠베르트가 밝혔다”고, 한국 시각 10일 저녁 보도했다. 라투르는 그간 췌장암으로 투병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라투르는 과학·기술과 인문·사회를 아우르는 학제적 조류를 이끈 과학기술학(STS)의 대가이며, 경력이 깊어질 수록 근대성 비판과 인간중심주의 해체 등에 토대를 둔 생태주의 정치철학을 제시하는 독보적인 사상가로 자리 잡았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홀베르상(2013)과 교토상(2021)을 받았으며, 오늘날 전세계에서 생태주의 정치철학 관련 가장 많이 인용되는 학자로도 꼽힌다.
라투르는 1947년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의 유명 와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애초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던 그는 1970년대에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생활을 하며 인류학 공부를 했는데, 이때 자연은 객관적·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실험실에서의 여러 행위들에 의해 ‘구성된다’는 독특한 주장(<실험실 생활>·1986)을 내놔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인간 중심 인식론에 의문을 제기한 그의 이런 접근법은 ‘행위자-연결망 이론’(ANT), 곧 인간·비인간을 막론하고 행위자의 연결망 자체에 주목하는 독창적인 이론으로 나아갔다.
대표작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1993)는 이 같은 과학기술학에서의 성취를 바탕에 깔고 근대성을 비판하는 철학적 작업으로 나아가는 본격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근대의 본질을 ‘하이브리드’의 증식으로 본 라투르는 점차 인간과 비인간, 사회와 자연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행위성과 역할, 권력관계를 재분배하는 문제, 곧 정치철학의 문제에 집중하게 된다. 가장 최근까지 라투르의 정치철학은 그가 ‘신기후체제’라 부르는 전지구적 생태학적 위기에 대응하는 데 주력해왔다. <가이아 마주하기>(2017) 이후 그의 생태정치학은 ‘거주 가능성’을 추구하는 새로운 계급 구성의 가능성까지 타진하는 등 실천적 차원에서 나날이 급진성을 더해왔던 참이다.
“오늘날 결정적인 방향 전환은 생산의 확대가 아니라 거주할 수 있는 지구 환경의 유지를 우선시하는 것이다.”(<녹색 계급의 출현>·2021)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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