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6월 23일자 기고문을 통해 “<한길사 칸트전집> 출간과 함께 불거진 분란은 번역어에 대한 이견이나 칸트철학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그 불순한 기획 의도와 불법적 홍보 방식에 있음”을 분명하게 밝혔는데, 그 사이에 여러 동료 학자들께서 핵심 문제는 모른 채하거나 이 핵심 문제에 대한 의견은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서, 언론 매체를 통해서는 진지하게 논의하기 어려운 번역어 문제나 칸트철학 해석 문제에 대해서만 거듭해서 의견을 제시하고 있어, 부득이 칸트철학 용어 번역어 선택의 원칙에 대해서만은 다시 한 번 입장 표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동료 학자들께 청컨대 앞으로 칸트철학 해석에 관한 문제는 이런 자리 이런 방식으로보다는 저술이나 논문 또는 완성된 번역서를 내서 학계의 논의에 부쳐주기를 바란다.)
2. 자연언어의 성격상, 더구나 어족이 다른 언어들 간에는 적확하게 대응하는 번역어를 거의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번역 작업이 의미가 있는 것은, 누구든 결국에 사고와 이해는 모국어로 하는 것이므로, 번역 작업 중에 기존의 낱말 가운데 그래도 가까운 말을 택하고, 필요하면 그것에 새로운 뜻을 추가하거나, 그것도 안 되면 신조어를 사용해서라도 모국어를 키워감으로써,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와 이해의 폭이 깊고 넓어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지금 우리가 일상으로 사용하는 ‘철학’(哲學), ‘이성’(理性), ‘사회’(社會)와 같은 낱말들도 그렇게 해서 새로이 생겨난 것들이다.
고전의 번역은 외국어 문헌을 자국어로 전환시킴으로써 외국어 문헌을 자국어 문화의 요소로 편입시키는 의의가 있다. 이 외에도, 이런 작업과정에서 자국어 사용자의 자국어 활용 능력이 배양되고, 그것이 바로 자국어 사용자의 사고 함양으로 이어지는 부수 효과를 낳는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외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원어민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원어의 어떤 의미가 드러나, 원서가 함축하고 있던 의미가 더 풍부하게 또는 새롭게 드러남으로써, 역으로 원어민들의 교양을 높이는 데도 일조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악곡을 서로 다른 음악 전통을 가진 연주자들이 연주함으로써 원곡이 가진 음악성이 다양하게 또는 새롭게 표현될 수 있는 이치에 비견될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번역, 특히 철학 고전의 번역에서 적어도 주요 용어는 모두 자국어로 옮기는 노고를 기울이는 것이 번역자의 책무이고, 그로써 번역서는 한낱 모조가 아니라 원서를 더욱 풍부하게 개발하는 매체가 된다.
3. 철학 문헌 번역에서 첫째로 유념해야 할 점은 한 저자의 용어는 그의 전 저작에서 일관되게, 또 그 저자의 선후배 사상가들과의 역사적 관계를 살펴서, 선후좌우 종횡으로 서로 맞게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칸트처럼 50년 넘게 다대한 저술을 남겼고, “칸트 이전의 모든 사상이 칸트에 모여 있고, 칸트 이후 모든 사상이 그에서 흘러나왔다.”고 평가 받는 경우에는, 더 말할 것이 없다.
4. ‘아 프리오리’(a priori)를 어원적 뜻대로만 옮기자면 한국어 ‘선차적’(先次的)이 가장 근접하고, 역사적 맥락으로도 가장 무난하다. 다만, ‘선차적’에는 ‘~보다’가 함유되어 있는데 칸트철학에서는 ‘경험보다 선차적’이니 ‘선험적’(先驗的)이라고 옮기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선험적’을 종래에 ‘트란첸덴탈’(transzendental)의 번역어로 사용해왔으니, 일부 사람들처럼 이를 종전대로 사용하자고 해버리고 나면, ‘a priori’는 부득이 다른 번역어를 찾아야 하고, 종래에 번역어로 사용하던 ‘선천적’은 적합도가 현저히 낮으니 바꾸는 편이 아무래도 좋겠고… 그러다 보면 ‘아프리오리’라는 발음표기의 궁여지책이 나올 수도 있겠다. 그러나 궁여지책이라면 차라리 ‘선차적’이 훨씬 더 좋은 대안이라고 본다. ― 일본 학계에서는 1990년대 후반부터 ‘a priori’를 한국어 ‘아프리오리’식의 가타카나 표기로, ‘transzendental’은 ‘초월론적’(超越論的)으로, ‘트란첸덴트’(transzendent)는 ‘초월적’(超越的)으로 옮기는 것이 대세를 이루었고(백종현 편, <동아시아의 칸트철학>, 아카넷, 2014, 196쪽 참조), 가장 최근에 간행된 <이와나미 판 칸트전집>(전23권, 1999~2006)에서는 이 번역어가 전면적으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일본어의 어감과 성격은 공유하는 한자어에서조차 한국어의 그것과 많이 다른데다가, 일본 문화계에는 외국어를 발음대로 옮겨 적는 가타카나 표기 방식이 널리 퍼져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혹시라도 누가 ‘아프리오리’ 표기와 유사한 사례가 일본에도 있다고 끌어대어 정당화한다면 이를 선뜻 납득하기는 어렵다.
5. ‘트란첸덴탈’(transzendental)을 ‘선험적’으로 옮기는 것은 ‘넘어가다/초월하다’(transcendere)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이 말의 어원적 의미와도 동떨어지고, ‘a priori’에게서 적합한 번역어를 빼앗는 일이며, ‘선험론적’으로 옮길 경우에는 독일어 낱말 ‘아프리오리스무스’(Apriorismus)[선험론]의 번역어와 충돌한다. 또 일본학계처럼 ‘초월론적’으로 옮길 경우 (칸트의 변증학 부분과 현대의 현상학에서의 활용을 고려할 때) 대략 30%의 사례에는 맞는 일이나, 더 많은 70% 정도의 사례에는 동사 ‘초월하다’의 파생어인 ‘초월적’이 더 부합한다.(칸트 3비판서와 <형이상학 서설>에만 어휘 ‘transzendental’이 대략 950 곳에 등장하는데, 그 낱낱에 이 번역어를 넣어 읽어보면 그 적합도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 개념을 칸트가 당대의 독일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철학자들과의 사상적 대결 중에 스콜라철학에서 차용하여,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통해 그 의미를 전도시켜 사용한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백종현, ‘칸트철학에서 ‘선험적’과 ‘초월적’의 개념 그리고 번역어 문제’, 수록: 한국칸트학회 편, <칸트연구>, 제25집, 2010. 6, 1~28쪽); 재수록: 백종현 역, <형이상학 서설>, 아카넷, 2012, [덧붙임 2] 참조)
6. 오늘날 ‘트란첸덴탈-필로소피’(Transzendental-Philosophie)는 칸트철학의 대명사처럼 통용되고 있으나, 이 말이 칸트철학의 고유어는 아니다. 이 말은 칸트 이전과 이후 다수 철학자의 사상을 지칭하는 데도 쓰인다. 그래서 물론 이 말을 사상가들의 사상 내용이나 쓰이는 문맥에 따라 ‘초월철학’, ‘초월론철학’, ‘선험철학’, ‘선험론철학’ 또는 아예 발음대로 적어 ‘트란첸덴탈-필로소피’라고 분별하여 옮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하나의 원어 낱말에는 그 낱말의 어원적 의미에 맞춰 가능한 한 하나의 한국어 낱말을 대응시켜 번역한다는 원칙 아래 ‘초월철학’으로 일관되게 옮김으로써 얻는 것이 훨씬 많다.
― 한국어 낱말 ‘초월철학’에서 ‘초월’이 종전까지의 한국어 일상적 의미와 다르다고 말들 하는데, 그 점에서는 칸트철학 낱말 ‘트란첸덴탈-필로소피’의 ‘트란첸덴탈’이 독일어에서도 종전의 의미와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오죽했으면 독일어로 읽고 쓰던 당대의 학자들이 칸트 사상을 곡해하여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괴팅겐 서평’(아카넷, <형이상학 서설> 부록 참조)이 나왔고, 그에 응답하여 칸트가 다시 <형이상학 서설>을 써냈겠는가. 이 자리에서 칸트가 분명하게 재정의하고 있듯이 낱말 ‘초월적’은 “모든 경험을 넘어가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험에 선행하면서도(즉 선험적이면서도), 오직 경험 인식을 가능하도록 하는 데에만 쓰이게끔 정해져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형이상학 서설>, A203=IV373) 종전까지의 낱말 뜻으로 ‘초월적’은, 한국어에서처럼 독일어에서도 “모든 경험을 넘어가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독일어 독자들의 오해가 있었던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고, 이 낱말에 대한 이러한 칸트의 재정의를 통해 이 낱말은 새롭게 또 하나의 의미를 얻었다 하겠다. 그래서 오늘날의 독일어 사전에서 ‘transzendental’은 ①스콜라철학에서는 저런 뜻이고, ②칸트에서는 이런 뜻이라고 나누어 풀이하고 있다. 이제 ‘트란첸덴탈-필로소피’를 ‘초월철학’으로 번역하자는 제안은, 칸트철학을 도입함에서 우리도 한국어 낱말 ‘초월적’에 재래의 일상적 의미 외에 새로운 철학적 의미를 부여해 사용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
이렇게 함으로써 우선 이 말로 지칭되는 사상들의 역사적 맥락을 알 수 있다. 누가 왜 어떤 계기로 같은 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사용했는지를 앎은 고전 공부를 통해, 대를 이어가는 사유의 전개, 굴절과 비약을 익히면서 자기 생각을 배양해나가는 좋은 길 중의 하나이다. ― 자연언어로 표현되는 개념어들은 많은 경우 다의적이지만, 그러나 그로써 서로 다른 사람들의 사유를 담는 그릇이 된다.
또 원서 대 번역서, 외국어 사전 어휘 대 한국어 사전 번역어 어휘의 대응 관계를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것이 외국어로 서술된 철학사상을 한국어로 이해하는 데 혼동을 줄이는 좋은 방법이다. 가령 독일어 사전이나 독일어 철학사전, 독일어 칸트사전을 펼치면, ‘트란첸덴탈’(transzendental)이나 ‘트란첸덴탈-필로소피’(Transzendental-Philosophie)라는 표제어 아래서 다양한(서로 다른) 뜻의 풀이가 있음을 보게 될 것인데, 그에 대응해서 한국어로 쓰인 독일철학 사전이나, 칸트사전의 표제어를 하나로 정해 한 표제어 아래 그에 맞게 한국어 뜻풀이를 여러 가지로 제시하는 것이, 표제어를 달리 함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상호 연관성의 상실이나 혼선을 방지하는 길이다. ― 개념어를 이해하는 데는 그것이 어떤 뿌리에서 돋아나 언제 무슨 계기로 새로운 줄기, 새로운 가지로 뻗어갔는지를 아는 것이 적지 않게 중요하다.
7. 아카넷 <한국어 칸트전집>은 개념에 대한 이러한 이해와 낱말 사용 원칙 아래서 선택된 용어로 번역 편찬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채택된 한국어 번역어들이 유일하게 좋고, 따라서 다른 원칙에 따른 번역어는 모두가 잘못된 것이라거나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외국어 철학 문헌이나 철학 용어를 어떤 원칙에 따라 번역하더라도 딱 떨어지게 맞는 경우는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자기 식의 용어법으로 새로운 번역서를 내면서 자기 식과 다른 용어법의 번역서를 “바로 잡겠다”고 한다면, 참으로 교만한 생각이다. 서로 다른 이해와 표현 방식에서 하나는 바르고, 다른 하나는 바르지 않은 경우란 희귀하고―그런 경우는 오역이라 해야 할 것이다―, 특히 개념어의 번역에서는 그렇다. 각각의 번역서는 번역 어휘의 일대일 대응성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서 연구 번역자마다 최선의 방식이라 여긴 것을 독자들에게 내놓는 것일 따름이다. 그래서 또한 누가 “내 번역서가 표준 번역서이다.”라고 스스로 말하는 것은 세상 이치도 학문의 성격도 몰라서 하는 말이라 하겠다.)
8. 현실에서 학교 교육과정을 위한 교과서가 있다거나 국가시험이 있는 학술 영역에서는 어떤 기관에 의한 ‘학술어 통일’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런 경우조차도 일정 기간마다 재조정되는 것이 상례이다―, 그렇지 않은 분야에서는 ‘통일’이니 뭐니 하는 무리한 일을 시도할 것이 없다. 더욱이나 다수의 학술어가 실물의 지칭어가 아니라 순전한 개념의 표기인 분야에서 학술어의 선택은 이미 고유한 사상의 표현이다. 그래서 순전한 “이성 개념에 의한 지식” 체계인 철학에서 학술어의 선택은 개개 학자의 견해에 따른 결정에 일임하는 것이 정도이다. 그러다가 당초에는 백가쟁명으로 다양하게 사용되던 학술어가 사용자들의 선호가 어느 하나로 쏠리면 자연스레 ‘통일’이 될 수도 있는 일인 것이다.
9. 백종현의 새로운 번역어 사용 시도는 1987년 한국현상학회에서 칸트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하는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아직 칸트학회가 없어서, 일부 칸트 연구가들이 한국현상학회 안에서 활동했다. 그래서 한국현상학회 학회사 서술을 보면 ‘한국칸트학회’가 1990년에 현상학회에서 분가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토론장에서 여전히 옛 번역어를 사용하던 백종현에게 당시 대표적 현상학자이자 좌장이시던 고 한전숙 교수께서, “우리는 식민지 시대부터 철학 공부를 해서, 이미 일본식 철학 용어에 익숙해져 있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백 박사는 일본어를 쓴 일이 없는 순전한 한국어세대이고, 독일에서 독일어로 칸트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왔으니, 지금 관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칸트철학 한국어 용어를 전반적으로 재검토하여 필요하면 새로운 제안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그런 권유가 나오자 동석해 있던 다수 선배동학께서 함께 격려의 말씀을 하셔서, 1988년 광주에서 열린 제1회 전국철학자대회, 현상학 분과 발표회장에서 ‘칸트철학 용어의 새로운 번역어 제안’을 발표하고, 그 이후부터 꾸준히 논저와 역서를 통해 이를 조금씩 수정 발전시켜 현금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1990년에 이르러서는 한 학회를 구성할 만큼의 동료 칸트학자들이 생겼기에, 독립 학회 설립을 발의하여 지금의 ‘한국칸트학회’가 설립된 것이다. 무릇 학문 공동체는 이렇게 우의를 다지면서 분가 분기하며 발전해나가는 것이 상례라 하겠다.
10. 학문적 탐구의 학문성은 깊은 사념과 넓은 시야 그리고 평정한 마음에서 담보된다. 학술은, 특히 철학적 탐구는 칸트가 힘주어 권고했듯이 교조적이거나 논쟁적으로가 아니라 체계적이되 비판적으로 진행해나가야 한다.
연구자는, 더구나 공공 재원에 의존해 연구를 수행하는 자는 오로지 ‘참’을 찾으려는 공공심으로써 연구하고 연구 결과를 응당 공표하되, 자신의 연구 결과에 혹시나 독단이 함유되어 있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해야 할 것이다.
여타의 분야에서도 그렇지만, 원천적으로 실물 대조가 배제되어 있는 철학적 탐구에서는 각종의 ‘독단’이 때로는 그럴듯한 논리로 포장되거나 어느 시기 다수의 합의라는 물리적 위세를 앞세워 자행되기도 한다. 논리는 당파성이 스며들면 아전인수의 도구가 된다. 또한 진리는 결코 다수결로, 그것도 특정 시기의 특정 모임을 구성한 이들의 다수에 의해 확정되는 것이 아니다.
― 그래서 ‘학회’는 다양한 학풍과 의견을 가진 모든 회원을 포용할 수 있는 기관이어야 하고, 서로 다른 의견이 파당 없이 교환될 수 있는 학문 공동체 조성에 앞장 서야 한다. 많은 의견 중 어느 것이 더 큰 적실성을 가진 것인지는 의견을 낸 본인의 주장에 의해서 밝혀지기보다는, 세월이 가면서 학계가 차츰 분명하게 가늠해줄 것이다. 아카넷 <한국어 칸트전집> 편찬자들은 이런 마음가짐으로 자신들의 번역서를 펴내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누가 우리들이 선택한 번역어를 틀린 것이라 하면서, 자기들의 번역서에 ‘정본’이니 ‘공인본’이니 하는 거짓 딱지를 붙이고, 그로써 거짓 권위를 세워 자기들이 택한 번역어로 통일할 것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학문 활동의 정도가 아님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같은 언행을 순수한 학문 활동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한길사 칸트전집> 편찬자들도 구차하게 학회의 이름에 기대지 말고, 연구자 자신들의 학덕으로 자신들의 원칙에 따라 좋은 책을 내놓고, 자신들 책의 좋은 점을 널리 알려 많은 독자를 얻기를 바란다. 내놓는 책이 좋으면 거짓 딱지를 붙이지 않고, 옆에 있는 동학의 책들을 공연히 폄하하지 않아도 독자들이 금방 알아볼 것이다.
아카넷 <한국어 칸트전집>은 연구 번역을 지향하고 있어, 칸트의 한 저술에 대한 다층적인 연구가 끝나야 번역서를 낼 수 있기 때문에, 완간의 시기를 예정할 수가 없다. 이런 형편에서 <한길사 칸트전집>이 곧 완간이 된다 하니 기다려지고 기쁘기도 하다. 우리가 미처 마치지 못한 공부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카넷 <한국어 칸트전집> 편찬자들은 <한길사 칸트전집> 편찬자들이 자기들의 책들이 ‘학회 공인 번역 정본’이라면서 칸트철학 해석을 독점하고자 하지만 않는다면, 천천히 뒤따라가면서 많이 배울 생각이다. 소수인 아카넷 <한국어 칸트전집> 편찬자들은 이미 닦은 소로를 따라 꾸준히 전진할 것이니, 다수인 <한길사 칸트전집> 편찬자들께서는 새로 닦은 대로를 쾌속 질주하시기를 바란다. ― <전집>을 펴내는 의도도 서로 다르고, 염두에 둔 독자도 서로 다른데, 편찬자들끼리 언론 매체를 통해 토막말로 서로 헐뜯는 일은 이만 삼가고, 학술 논쟁은 학술 매체를 통해서 충분히 긴 말로 할 것을 함께 제안한다.
※ 백종현은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석사 과정 후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하대·서울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소장,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원장, 한국칸트학회 회장, 한국철학회 『철학』 편집인·철학용어정비위원장·회장 겸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자 한국포스트휴먼학회 회장이다.
주요 저서로는 Phenomenologische Untersuchung zum Gegenstandsbegriff in Kants “Kritik der reinen Vernunft”(Frankfurt/M. & New York, 1985), <독일철학과 20세기 한국의 철학>(1998/증보판 2000), <존재와 진리―칸트 <순수이성비판>의 근본 문제>(2000/2003/전정판 2008), <서양근대철학>(2001/증보판 2003), <현대한국사회의 철학적 문제: 윤리 개념의 형성>(2003), <현대한국사회의 철학적 문제: 사회 운영 원리>(2004), <철학의 개념과 주요 문제>(2007), <시대와의 대화: 칸트와 헤겔의 철학>(2010), <칸트 이성철학 9서5제>(2012), <동아시아의 칸트철학>(편저, 2014), <한국 칸트철학 소사전>(2015), <포스트휴먼 시대의 휴먼>(공저, 2016), <이성의 역사>(2017), <제4차 산업혁명과 새로운 사회 윤리>(공저, 2017) 등이 있고, 역서로는 <칸트 비판철학의 형성과정과 체계>(F. 카울바하, 1992), <실천이성비판>(칸트, 2002/개정판 2009), <윤리형이상학 정초>(칸트, 2005/개정판 2014), <순수이성비판 1·2>(칸트, 2006), <판단력비판>(칸트, 2009),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칸트, 2011), <윤리형이상학>(칸트, 2012), <형이상학 서설>(칸트, 2012), <영원한 평화>(칸트, 2013),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칸트, 2014), <교육학>(칸트, 201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