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칸트학회가 기획한 <칸트전집>의 출간 이후 연구자들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번역어 논쟁은 모두 ‘트란스첸덴탈’(transzendental)과 ‘아프리오리’(a priori)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나 같이 실천철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번역어가 있으니 독일어 ‘지테’(Sitte), ‘모랄’(Moral), ‘에틱’(Ethik)이 그것이다. 마침 논쟁의 한 복판에 있는 백종현이 이와 관련해서 나의 번역을 지적한 바 있으므로 이번 기회에 나의 입장을 밝혀 모처럼의 논쟁을 이어가는 것도 좋을 듯하다.
2.
5년 전 칸트의 <법론>(Rechtslehre)을 번역할 때 나는 ‘지테’(Sitte), ‘모랄’(Moral), ‘에틱’(Ethik)을 각각 ‘인륜’, ‘도덕’, ‘윤리’로 옮겼다. 이유는 간단했다. ‘상이한 독일어는 상이한 한국어로 옮긴다’라는 번역의 기본원칙에 따른 것이었고, 세 개의 한국어 용어가 ‘지금 여기’의 일상어이니 별로 고민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전집 발간에 참여하기로 한 이상 나 역시 학회가 결정하는 번역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공통의 번역어를 결정하는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끝내 나의 견해를 관철시키지는 못했다. 이러한 나의 실패에는 무엇보다도 연구 책임자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선생님의 용어를 사용하면 <도덕형이상학 정초>는 <인륜형이상학 정초>가 되고 그러면 최재희 선생님 이후 지금까지 계속된 학문적 전통이 단절될 것입니다.” 독자들은 그 둘을 동일시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그의 지적은 너무도 당연했다.
완성된 원고를 출판사에 넘길 시점이었으며 따라서 대안을 찾을 시간도 더 이상 없었다. 더욱이 책의 제목에 관한 것이므로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차선책이었다. ‘지테’(Sitte), ‘모랄’(Moral), ‘에틱’(Ethik)을 각각 ‘도덕(Sitte)’, ‘도덕’, ‘윤리’로 옮기는 것이 그것이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궁여지책이었지만 그나마 내가 번역한 텍스트엔 ‘지테’(Sitte)가 서론에만 등장하니 그렇게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이와 같은 나의 결정을 김상봉은 “칸트 철학을 하시는 분답게 온화한 마음으로 받아주시고 자기 생각과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조금씩 양보를 해서 용어를 통일했다”라고 치켜세우겠지만, 당사자인 나로서는 완전한 백기투항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3.
나의 번역어 선택에 대해 백종현은 각박한 평을 내렸다. “누구는 칸트 윤리학의 핵심어로 칸트가 사용하는 낱말 ‘Sitten’(윤리)을 줄곧 ‘Sitte’(관습)라고 적는다. 칸트철학의 핵심어에 대한 이해와 그것을 취급하는 조심성이 이런 정도임을 미루어 번역진의 한국어 능력이나 독일어 어휘 능력 수준, 그리고 고전 번역의 자세를 가늠할 수 있겠다.”
4.
독일 유학 시절부터 따지자면 <법론>을 나는 수십 번을 읽은 셈인데, 그런 나의 머릿속에 단수인 ‘지테’(Sitte)’와 복수인 ‘지텐’(Sitten)을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다. 나는 칸트 실천철학과 관련된 자료들 중 칸트 생전에 출간되지 않은 자료들도 거의 다 읽었지만 어느 곳에서도 칸트가 단수와 복수를 구분해서 읽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말한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아마도 나의 부주의함은 칸트 자신에 기인할 것이다. 그것이 비난받아야 할 부주의함이라면 말이다.
칸트는 <도덕형이상학>의 1부 <법론>(백종현의 번역어에 따르면 <윤리형이상학>의 1부 <법이론>)에서 “독일어 지텐(Sitten)은 라틴어 모레스(mores)처럼 살아가는 방식이나 방편(Manieren und Lebensart. 백종현 번역에 따르면 “예절이나 생활양식”)이란 의미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수와 복수는 다르다’라는 백종현의 주장이 이 언급에 근거할 것 같지는 않다. 책의 제목이 ‘예절/생활양식의 형이상학’일 수는 없지 않은가?
널리 알려져 있듯이 칸트는 라틴어 철학용어를 상당수 독일어로 만든 사람이며 중요하고 복잡한 문제는 라틴어로 생각하고 라틴어로 메모했던 사람이다. 칸트의 출간된 텍스트는 물론이고 출간되지 않은 텍스트 어디에서도 나는 “라틴어 ‘모스’(mos)와 그것의 복수 형태인 ‘모레스’(mores)는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라는 칸트의 언급을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추정하건대, 칸트는 독일어 단수 ‘지테’(Sitte)와 복수 ‘지텐’(Sitten)도 구분해서 사용하지는 않았을 듯하다.
철학 개념의 역사를 확인하고자 할 때 독일어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철학[어] 역사 사전>(Historisches Woerterbuch der Philosophie)과 <두덴>(Duden) 사전이다. 백종현의 지적을 계기로 오랜만에 두 책을 뒤져보았는데, 그곳에서 나는 수천 수백 년 동안 사용되어 온 이 개념이 시기마다 상이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만을 확인했을 뿐, 칸트 시대에 단수 ‘지테’와 복수 ‘지텐’이 ‘관습’과 ‘윤리’라는 의미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하물며 칸트에게서는 언제나 ‘지텐’(Sitten)만이 ‘윤리/도덕/인륜’을 의미하며 ‘지테(Sitte)’는 ‘관습’만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확인하지 못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보건대 만일 내 번역어 선택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나의 “한국어 능력이나 독일어 어휘 능력 수준”이 아니라 분명 내 학문의 부족함 때문일 것이다. 부족함은 배워 채우면 될 터이니 부끄럽긴 해도 두렵지는 않다. 칸트 원전이든 믿을 만한 이차 자료이든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기꺼이 환영하겠다.
5.
독일어 ‘지테’(Sitte), ‘모랄’(Moral), ‘에틱’(Ethik)이 백종현의 말처럼 “칸트 윤리학의 핵심어”인 것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것들은 일상어이지 칸트의 전문 용어는 아니다. 그러니 그것들을 우리말로 옮길 때 ― ‘트란스첸덴탈’이나 ‘아프리오리’와는 달리 ― 칸트 고유의 의미를 확인하고 그에 맞추어 옮길 필요는 별로 없다. 칸트 시대의 일상인들이 그것들을 어떤 의미로 이해하고 사용했는지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학자가 아닌 일상인이 그것들을 명확히 구분해서 사용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번역자는 편한 마음으로 일반적 번역규칙에 어긋나지 않게만 옮기면 충분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세 단어 중 ‘에틱’(Ethik)만은 편한 마음으로 옮길 수가 없다. ‘에틱’(Ethik)은 어떤 때는 ‘윤리/도덕’을 의미하고 어떤 때는 ‘윤리학/도덕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형용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번역자는 ‘에틱’이 등장하면 매번 이것이 ‘윤리/도덕’인지 아니면 ‘윤리학/도덕학’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비유하자면 ‘경제가 어렵다’라는 말을 ‘경제학이 어렵다’라고 옮길 수 없는 것과 동일한 이유 때문이다. 이런 어려움은 ‘지텐’(Sitten), ‘모랄’(Moral)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데, 독일어에 ‘지텐-이론’(Sitten-Lehre)과 ‘모랄-이론’(Moral-Lehre)이란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특히 칸트의 <도덕/윤리형이상학>에 국한하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칸트가 “덕론(에틱)”이라고 표현한 곳의 ‘에틱’은 당연히 ‘윤리학/도덕학’으로 옮기면 된다. 반면에 칸트가 ‘에틱’을 ‘레히트(Recht, 법)’와 대비하여 사용할 때에는 ‘윤리’로 옮기면 된다. ‘법’에 대비되는 것이 ‘윤리’이지 ‘윤리학’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간단한 해결책은 형용사 ‘에티쉬’(ethisch)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내가 아는 한 <도덕/윤리형이상학>에선 거의 예외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간단한 해결책이라고 해도 비전문가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 법이다. ‘트란스첸덴탈’과 ‘아프리오리’ 번역어 논쟁을 내가 제대로 쫓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김상봉이 말하고 한국칸트학회가 실행했듯이 텍스트의 번역은 그 텍스트의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내가 <판단력비판>을 번역한다면 어느 누가 그것을 읽겠는가?
6.
칸트의 실천철학을 대표하는 텍스트는 <도덕/윤리형이상학 정초>, <실천이성비판>, <도덕/윤리형이상학> 등이다. 백종현은 이 세 개를 모두 우리말로 옮겼는데,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하나도 읽은 적이 없다. 만일 그의 지적이 아니었다면 앞으로도 그랬을 것이다. 십여 년 전 그의 첫 번째 번역서가 출간되었을 때 최재희의 ‘도덕형이상학’을 굳이 ‘윤리형이상학’으로 바꾼 이유가 궁금하긴 했지만 관련 자료를 찾기에는 나의 게으름이 너무 강고했다.
이번에 나는 그가 번역한 <도덕/윤리형이상학>의 몇 개 단락(주로 세 개의 ‘서론’)을 살펴보았는데, ‘에티쉬’(ethisch)의 번역만큼은 내 이해력의 한계를 멀리 벗어났다. 또 그가 번역한 <실천이성비판>의 ‘부록’에 있는 “에틱(Ethik)은 정확히 윤리 이론 곧 Sittenlehre를 의미하는 것[이다]”라는 그의 단언도 마찬가지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도대체 어떻게 “자연의 법칙들과 구별”되는 바의 “자유의 법칙들”이 “도덕학적” 법칙들로 번역될 수 있다는 것인지(그럴 경우 ‘자연’의 법칙들은 ‘자연학’의 법칙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유의 법칙들”이 ‘법적/윤리적’ 법칙이 아니라 “법학적/윤리학적” 법칙들로 구분된다는 것인지(그럴 경우 법학/윤리학이 존재하지 않으면 자유의 법칙도 존재하지 않게 되지 않겠는가?), 나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만일 나의 생각이 옳다면, 즉 그의 번역이 오류라면, 나는 그러한 오류가 <도덕/윤리형이상학 정초>와 <실천이성비판>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혹시 있다고 해도 그것이 ― ‘Sitten’을 ‘Sitte’로 표기한 나처럼 ― 부주의함에 기인한 것이지 결코 번역자의 자세와 연관되어 있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부주의함의 결과는 기계적으로 고치면 되겠지만 자세의 교정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7.
지난번 기고문에서 백종현은 언론에서 토막글을 주고받는 것을 그만두자고 제안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사안의 중요성에 따라 학술 논문이 필수적인 경우도 있고 토막글만으로 충분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부가 세금을 들여서까지 지원하는 ‘인문학 대중화 사업’에 부응하는 것으로 언론에서의 토막글 싸움만큼 좋은 것이 달리 어디 있겠는가?
※ 이충진은 성균관대학교에서 헤겔 철학 연구로 석사,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칸트 법철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한성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친다. 철학을 삶의 유일한 방식으로 삼은 후 사회철학, 윤리학, 환경철학 등 실천철학적인 문제에 관심을 쏟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세월호 문제는 그의 또 다른 지적 도전이 되었다. 지은 책으로는 <세월호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독일 철학자들과의 대화>, <이성과 권리>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법이론>, <쉽게 읽는 칸트: 정언명령>, <헤겔 정신현상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