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이노상 공원에 있는 이노상 분수. 이노상 공원의 원래 이름은 조아킴뒤벨레 공원이다. 16세기 프랑스 시인의 이름을 딴 이 공원은 1786년까지 이노상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우리는 수십 일 동안 ‘코로나19’가 전세계인을 두렵게 만드는 과정을 보았다. 감염된 사람이 확진 판정을 받기 전까지 질병관리본부가 당부하는 수칙을
가볍게 여기며 원하는 대로 활동하다가 병을 급속히 확산시킨 사례가 늘어날수록 더욱 불안해졌다. 현대의 첨단 과학·기술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속도가 빨라졌다고 해도, 새로운 질병이 단기간에 세계에 확산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과 병원균이 함께 진화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더욱이 일본이 크루즈선 승객의 상륙을 한동안 허락하지 않거나, 중국인의 입국을 막으라고 촉구하는 모습에 더하여,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를 위험국가로 취급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요즘 자주 등장하는 검역(quarantine)은 프랑스어로 ‘카랑텐’(quarantaine)이다. 18세기에 디드로가 편찬한 <앙시클로페디>(Encyclopédie)에서는 “레반트에서 오는 선박·뱃사람·승객이 전염성 질환을 옮길지 모르기 때문에 항구 가까이 정박시켜 그 고장 주민들과 자유롭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는 관행”이라고 설명한다.
지금의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등의 지역인 오리엔트·레반트는 유럽에서 해 뜨는 방향이며 ‘근동’이지만, 객관적으로 말하면 극서아시아 지방이다. 과거 원나라에서 발생한 ‘대역병’(페스트 또는 흑사병)이 20여년간 서쪽으로 퍼졌을 때 제대로 막지 못한 경험을 교훈 삼아 ‘카랑텐’을 제도화했다는 말이다.
1348년 대역병에 파리 감염
몽골인들은 제노바인들이 점령한 흑해 연안 크림반도의 카파(Caffa, 지금의 Feodosia)를 공격하면서 전염병
페스트로 죽은 시신을 성벽 안으로 날려 보냈다. 제노바인들은 황급히 배를 타고 떠났다. 그 배에는 병이 잠복하고 있었다. 1347년 10월 어느 날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 배가 도착했는데 거기 탄 사람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 거의 같은 시기인 그해 11월1일에 프랑스의 마르세유 항구에도 제노바 선박이 입항해서 정식 상륙 허가를 받았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페스트는 앞서 6세기에 동로마제국을 감염시킨 뒤 7세기까지 서유럽으로 퍼진 적이 있었다. 그것이 700년 만에 다시 프랑스에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웠던 것이다. 100년 전쟁의 전반기에 고전하던 프랑스가 크림반도에서 마르세유까지 배를 타고 온 페스트 병균 때문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림프절 페스트’도 무섭지만, 더 빨리 생명을 단축시키는 ‘폐 페스트’도 공기로 번졌다. 중세의 도시는 좁은 집이 다닥다닥 붙었고, 한방에 가족이 함께 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전염병을 막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1348년 8월에는 파리도 감염되었다. 병이 창궐한 2~3년 사이에
유럽 인구의 30%, 어떤 도시에서는 절반이 저세상으로 떠났다.
당시 대역병을 대하는 태도는 14세기 프루아사르(Jean Froissart)의 연대기에서
엿볼 수 있다. 독일의 고행자들은 33.5일 동안 자기 등을 채찍으로
때리며 돌아다니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예수가 이 세상에 왔다가 하늘나라로 돌아갈 때까지 33.5년을 상징하는 숫자다. 고행자는 ‘천벌’에 대해 자기 탓(‘메아 쿨파’)을 했다. 고행이 해결책은 아니지만 겸손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어떤가? 상식적인 사람들은 질병관리본부를 믿고 잘 따랐다. 그러나 신천지교회
신도들이 좁은 공간의 은밀한 교류방식을 고수하면서 일을 키웠다. 총회장 이만희는 코로나19를 마귀의 짓으로 규정했고, 신도들은 마귀에 당했다는 비밀을 지키려고 무던히 애썼다. 보도를 통해 알려진 그들의 행태는
서울 광화문에서 여러 나라 국기를 들고 독재타도를 외치는 민주주의 만학도들의 주장보다 더 낯설다. 중세·근대·현대가 함께 살기 때문에 서로 낯설다. 그래서 나는 국론통일의 신화를 믿지 않은 지 오래다.
10세기부터 파리 시테섬 북쪽 문밖에 ‘생 이노상 공동묘지’(le Cimetière des Saints-Innocents)와 ‘생 이노상 교회’(l'église des Saints-Innocents)가 있었다. 로마제국 시대에 헤롯왕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의 아기를 모두 죽인 참극에서 ‘순진무구한 아기들’(des innocents, 이노상)이라는 말이 생겼으니, 이것이 묘지 이름의 연원이다.
1550년께 파리 생이노상 묘지의 모습. 당시 파리의 무명 화가가 그린 그림을 19세기 말에 독일 출신의 프랑스 화가 호프바워가 판화로 다시 제작했다. 위키피디아
호프바워가 1855년에 판화로 그린 이노상 분수 주변의 시장 모습. 위키피디아
이노상 교회를 언제 건설했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르메르(Charles Le Maire)는 <어제오늘의 파리>(Paris ancien et nouveau, 1685)에서 필리프 2세 오귀스트가 유대인을 내쫓고 뺏은 재산으로, 또는 15세기의 연금술사 플라멜(Nicolas Flamel)의 돈으로 교회를 증축했다는 설을 소개했다. 파리를 점령했던 영국인들은 1424년과 1429년에 이 교회에 무대를 설치하고, ‘죽은 이들의 춤’(Danse des Morts)을 연극으로 보여주었다. 그후 남녀노소, 귀천을 가리지 않고 죽게 마련이라는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가 그림에 등장했다.
1445년 1월22일 성 베드로 축일에 이 교회의 봉헌식을 거행했다. 교회가 자랑하는 성보(聖寶)로 예수 가시관의 가시 한 개, 아기의 완전한 시신을 담은 수정관(水晶棺)이 있었다. 수정관의 옆쪽에 샤를마뉴 상, 그 맞은편에 성루이 상, 앞면에 루이 11세(1461~1483 재위)와 왕비가 무릎을 꿇은 상을 은으로 만들어서 장식했다. 이 교회에 특권을 많이 허락해준 루이 11세가 봉헌했으리라. 투르의 초대 대주교인 라장시브 드 생가티엥(La Gencive de Saint Gatien)의 한쪽 다리뼈와 살, 다른 성인들의 몸이나 뼈의 일부도 있었다.
로마 카타콤베와는 달라
1181년에 필리프 2세 오귀스트는 이노상 공동묘지의 서쪽에 있는 샹포 땅을 사들여 시장을 열었다. 이 시장이 훗날 레알 중앙시장으로 발전했다. 1186년에 그는 시장을 보호하려고 묘지와 교회를 여덟 개 담장으로 둘렀다. 레알 시장 상인들과 그 근처 주민들은 공동묘지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호소했다. 페스트가 창궐한 1348년부터 1351년까지 이노상 묘지에 구덩이 팔 곳이 모자를
정도였기에 왕령으로 묘지 출입을 금지시켰다. 세월이 흐르면서 시신을 묻으려고 옛 무덤을 파고 뼈를 꺼내 아치형 통로에 쌓았고, 이러한 통로가 80개나 생겼다. 세력가들은 이노상 교회의 성보의 영험함을 믿고 묘를 썼다. 도굴이 성행했기 때문에 묘지 한가운데 망루를 설치했다. 또 매년 ‘모든 성인 대축일’(11월1일)부터 이튿날 정오까지 특별한 물건을 전시했다. 16세기의 조각가 필롱(Germain Pilon)이 상아에 새긴 골격이다.
이노상 묘지는 한때 더 이상 매장할 곳이 없어 뼈를 납골당이나 아치 모양의 터널에 보관하기도 했다. 건물 벽면에 ‘죽음의 무도’ 벽화가 그려져 있다. 위키미디어
생이노상 묘지의 뼈 등을 옮겨 만든 파리의 지하묘지 카다콩브. 위키피디아, 마이클 리브
18세기까지 이노상 공동묘지의 지면은 노면보다 여덟 자 이상
(2.5m) 높았다. 더 이상 시신을 묻을 수 없을 지경이었고 악취를 풍겼다. 그럼에도 1779년 말에 공동묘지에 2천 구 이상을 묻을 수 있는 구덩이를 팠다. 묘지 서쪽에는 루이 9세 치세에 내복 상인들의 가판대가 늘어선 랭주리 길(rue de la Lingerie)이 있었는데, 주민들은 집 지하실이 무너질까 봐 두려워했다. 파리 치안총감 르누아르(Jean Charles Pierre Lenoir)는 주민·상인의 탄원서를 받고 1780년에 이노상 교회와 묘지를 폐쇄했다.
후임 치안총감 크론(Marie Louis Thiroux de Crosne)은 왕립의학회에 실제로 철거작업과 유해 안치 방안을 검토해달라고 부탁했다. 파리 지하에는 건축에 쓸 돌을 캐던 굴이 거의
300㎞나 있었다. 그중에서 남쪽의 몽수리(Mont-Souris) 채석장을 지하납골당인 카타콩브(Catacombes)로 쓰기로 하고, 1786년부터 1788년까지 세 번에 걸쳐 이노상 묘지와 다른 공동묘지의 유골을 옮겼다.
당페르 로슈로 광장(Place Denfert-Rochereau)에는 이노상 묘지를 철거할 시기에 르두(Claude-Nicolas Ledoux)가 설계한 ‘르두 관(館)’(Pavillion Ledoux)이 길 양편에 남아 있다. 파리에 들어오는 생필품을 적절히 통제하려고 1784년부터
24㎞의 울타리를 두르고
입시세(도시로 들어오는 상품에 매기던 세금)를 징수하던 세관 중 하나다. 가난한 사람들은 술을 싸게 마시려고 울타리 밖의 주점을 찾았다. “파리에 둘러친 울타리 때문에 파리는 투덜댄다.”(Le mur murant Paris fait Paris murmurant.) 1789년 7월 중순에 그들은 여러 세관에 불을 질러 복수했다.
르두 관 옆에 카타콩브의 입구가 있다. 로마의 ‘카타콤베’와 이름이 같아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로마에서는 박해받던 기독교도들이 굴의 양쪽 벽을 파서 시신을 넣은 뒤 봉했고, 띄엄띄엄 교회도 조성했다. 파리에서는 인골을 벽처럼 쌓아놓거나 두개골만 쌓아놓고 장식효과도 냈으며, 중간에
예배·추모 공간도 만들어놓았다.
나는 파리 카타콩브의 지하
20m의 굴속에서 마음에 새길 만한 문구도 읽고 죽음을 친근하고 유쾌하게 받아들였다. “잠들기 전에 내일 아침에 눈뜨지 못한다고 생각해보라”, “집을 나설 때 저녁에 돌아오지 못한다고 생각해보라”는 내용이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떴다고 배우자에게 맞거나, 가족이 이사를 할까 봐 외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카타콩브를 구경하고 바깥으로 나와서 어리둥절했다.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골목에 출구가 있기 때문이다.
이노상 교회의 벽면에 붙어서 만들어져 있던 본래 모습의 이노상 분수의 모습을 그린 19세기 판화. 위키피디아
분수 한쪽 면은 18세기 작품
1786년에
이노상 묘지를 철거하면서 ‘조아킴뒤벨레 광장’(place Joachim-du-Bellay)과 ‘이노상 길’(rue des Innocents)이 생겼다. 16세기의 시인(조아킴 뒤 벨레)을 기리는 광장을 ‘이노상 광장’(Square des Innocent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노상 분수(Fontaine des Innocents)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1551년에 건축가 레스코(Pierre Lescot)는 루브르궁 건축에 몰두하다가 앙리 2세의 파리 입성식을 준비했다. 그는 이노상 교회의 벽에 전각 형태의 분수를 붙여 짓는 계획을 세웠고, 조각가 구종(Jean Goujon)이 설계대로 분수를 조각했다.
이 분수를 광장 한가운데로 옮길 때, 교회의 벽에 해당하는 면을 만들어 붙여야 했다. 18세기 조각가 파주(Augustin Pajou)가 그 일을 맡았다. 조아킴 뒤 벨레는 “우리가 하루도 못 산다면”(Si notre vie est moins qu’une journée) 한시라도 빨리 하늘나라로 올라가 “아름다움의 이상을 찾고 싶다”는 시(소네트)를 남겼다. 오늘도 이노상 분수 앞에서 수많은 사람이 쉬거나 스쳐간다. 1969년부터 레알 중앙시장의 기능은 파리 남쪽의 룅지스(Rungis)로 넘어가고, 그 자리에 선 포럼 데알(Forum des Halles)의 지하상가와 지하철도는 수많은 사람을 빨아들이고 내뱉는다.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