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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친절한 돌봄’으로 1400년 잇다, ‘하느님의 집’ 오텔디외 병원

등록 2020-04-05 10:03수정 2020-04-05 10:09

[토요판] 주명철의 프랑스 역사산책
⑥ ‘하느님의 집’ 오텔디외 병원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병원
660년 파리 주교 주도로 창설
독실한 신도들이 운영비 기부
환자 돌봄은 수녀들이 도맡아

병상 부족으로 늘 과다 수용
근대 이전 병원내 감염 많아
한때 ‘잔인한 병원’ 오명 얻기도
660년 파리 주교 랑드리의 주도로 설립된 오텔디외는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병원이다. 프랑스 혁명 직전에는 하루 2천명의 환자를 수용했다. 위키피디아
660년 파리 주교 랑드리의 주도로 설립된 오텔디외는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병원이다. 프랑스 혁명 직전에는 하루 2천명의 환자를 수용했다. 위키피디아

산업화 전/후를 생물학적 구/신체제로 구별할 수 있다. 평균수명이 고작 40살 미만이었던 구체제에는 많이 낳고 많이 죽었고, 특히 유아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인명재천’으로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지금은 태아기부터 건강진단을 할 수 있고, 각종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여 80살 이상의 수명을 기대할 수 있다. 비록 새로운 질병이 발생하는 것을 예측하긴 어렵다 해도 해결책을 빠르게 찾아낸다.

최근 대한민국은 코로나19에 대해 새로운 대처방법을 신속히 개발했다. 메르스 때와 달리 현 정부와 질병관리본부는 국내 활동을 함부로 제한하지 않은 채 확진자를 적극 파악하고 확산 경로를 공개하여 경각심을 높이면서 사망자의 수를 줄였다. 우리가 통제가능성을 높이는 동안 세계보건기구(WHO)는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했다. 200여 나라에서 날마다 확진자가 수만명씩 늘고 치사율이 5%에 가깝다. 주요 20개국(G20) 정상들은 화상회의에서 우리나라의 방식을 표준으로 인정하고, 100여 나라가 앞다투어 우리나라의 코로나19 진단키트를 수입한다.

어제오늘의 세계가 얼마나 다른지 비교하기 위해 옛 프랑스의 병원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북쪽 강 너머 시청으로 가는 ‘아르콜 길’의 왼쪽에 프랑스 왕국에서 가장 오래된 오텔디외(Hôtel-Dieu:‘하느님의 집’이란 뜻) 병원이 있다. 그것은 원래 대성당 광장 앞, 프티 퐁(작은 다리)과 대성당 사이 강변에 있었다. 19세기 후반 그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옛터에 샤를마뉴 기마상을 세웠다.

기독교 정신은 사랑과 자선이었기 때문에 종교인은 교화사업과 구빈사업을 실천했다. 그들은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맡았다. 그러한 모범은 로마제국 시대 동방에서 생겼다. 4세기에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레아 주교 바실레우스(329~379)는 최초로 자기 관구에 병원을 세웠다. 서방 세계보다 2세기나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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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통행세로 운영비 보태기도

476년에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가톨릭교회의 조직(Province, 총대주교 관구)은 고스란히 남았다. 주교들은 프랑크 왕국의 왕·귀족들과 긴밀히 협조했다. 더욱이 그들은 종교시간표를 가지고 일상생활을 지배했다. ‘검역’을 뜻하는 ‘카랑텐’(quarantaine)은 애당초 ‘부활절 이전 40일 동안의 금욕기’를 뜻했다. 교회의 달력은 신도들의 일상생활을 통제했다. 아기가 태어난 시기를 역산하면 다수가 금욕기간을 지켰음을 알 수 있다. 농부와 달리 뱃사람은 출어기가 비자발적 금욕기였다.

클로테르 3세 치세인 660년에 파리 주교 랑드리는 아르샹보 백작과 협력해서 오텔디외를 세웠다. 오텔디외에서 북쪽으로 뻗은 아르콜 길을 낼 때 사라진 ‘슈베 생랑드리 길’(rue du Chevet-Saint-Landry, 랑드리 성인의 침대 머리맡 길)은 그 기억을 간직했다. 665년에는 파리 장관 에르켐발루스의 저택을 병원으로 이용했다. 언제부터 오텔디외가 전용 건물을 가졌는지 알 수 없지만, 1157년의 특허장이 남아 있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지붕에서 내려다본 오텔디외의 모습. 위키피디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지붕에서 내려다본 오텔디외의 모습. 위키피디아

르메르의 <어제오늘의 파리>(1685), 뫼링의 <파리 병원의 역사 사료집>(2권, 1881~1887)을 참고하면, 1258년에 생루이(루이 9세)가 ‘삼위일체수도회’(Trinitaires) 단장인 가갱에게 병원을 증설하라고 명령했으며, 파리의 부유한 환전상인 우다르 드모크뢰는 병원의 교회를 짓는 데 시주했다. 1602년에 앙리 4세는 대소 병실을 증축하도록 명령했다. 1606년에 병원의 남쪽 센강에 기둥을 세 개나 박고 부지를 넓혀서 공사를 마무리했다.

1611년에 국왕참사회 위원이며 파리고등법원 재판장인 마플레 남작 포르제는 오텔디외에 10만1천리브르를 유산으로 남겼다. 매년 가난한 처녀 열두 명의 결혼비용으로 1200리브르, 신학생 두 명의 장학금으로 240리브르, 매년 성금요일(부활절 앞 금요일)에 콩시에르주리 감옥의 가난한 수형자들에게 60리브르를 쓰라는 조건이었다. 이처럼 병원의 운영비는 종교인들과 독실한 신도들이 부담했다. 교회 안에 묻히거나 기도 중에 이름을 불러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유산을 남긴 사람들도 있었다.

1626년부터 1632년 사이 좌안의 ‘뷔슈리 길’(rue de la Bûcherie, 장작의 길)에서 집을 세 채 구매해서 오텔디외의 별관 ‘생샤를’(Saint Charles)을 지어 병상을 더 확보했다. 본관과 별관을 오가는 ‘오텔디외 다리’를 놓고 통행세를 받아 병원 운영비에 보탰다. 당시 명목 화폐 1리브르는 실제 화폐 20수 또는 240드니에였는데, 보행자는 2드니에(double denier)를 냈다. 그래서 이 돌다리를 ‘퐁 오 두블’(Pont au Double)이라 불렀다. 말을 탄 사람은 6드니에를 냈다. 중세에 한 번 무너졌던 ‘생미셸 다리’처럼 이 다리는 1709년에 무너져 다시 지었고, 1789년에 통행세를 폐지했다. 1883년에 큰 배가 다닐 수 있도록 다리를 새로 놓았다.

옛날에는 센강 상류에서 건축용 목재와 땔감을 배로 실어 오거나, 뗏목을 만들어 몰고 와서 해체했다. 파리에서 가장 가난한 인부들이 물속에서 뗏목을 해체하고 장작을 팼다. 그들은 대부분 중부 산간의 오베르뉴 지방에서 상경하여 한방에서 많게는 쉰 명이 돌려가면서 잠을 자고 입에 겨우 풀칠했다. 1775년 4월부터 5월 초까지 귀족과 부자가 서민을 굶겨 죽이려고 밀가루를 사재기했다는 음모설 때문에 ‘밀가루 전쟁’(guerre des farines)이 일어났다. 경찰이 폭동을 진압하고 가담자들을 조사하니 파리의 노동자 가운데 오베르뉴 출신의 문맹자가 많았다. 그들이 도끼를 차고 장작을 패러 다니던 ‘뷔슈리 길’의 일부가 오늘날 센강 좌안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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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몰려 침대 하나에 2명 이상 수용

오텔디외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성 아우구스티노 교단의 수녀들은 청빈·정결·순명의 서원 외에 ‘친절한 돌봄’(hospitalité)을 감독기관인 노트르담 대성당 참사회에서 맹세했다. 대성당 참사회원이 죽으면 그가 쓰던 침구(매트리스, 깃털이불, 긴 베개, 시트)를 오텔디외에서 사용했다. 백년전쟁(1337~1453)과 페스트, 위그노전쟁(1562~1598), 30년전쟁(1618~1648), 마르세유의 페스트(1720)는 인구 증가에 급제동을 걸었다. 서민은 부부가 함께 벌어야 겨우 생활할 수 있었고, 그래서 급히 배우자를 다시 찾았다. 전쟁이나 전염병이 휩쓴 뒤 몇 년 안에 그 전의 인구를 회복하고 증가시킨 이유다. 생물학적 구체제에는 ‘주여, 우리를 전쟁·굶주림·질병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했다.

파리의 인구는 17세기 중엽에 45만에서 18세기 접점에 50만, 프랑스 혁명 전에 60만까지 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병원의 병상 수가 늘 부족했다. 대표 격인 파리 오텔디외는 여러 병실을 잇달아 길게 지어 침대 1200개를 놓고 모든 종류의 환자를 받았다. 비교적 병원이 많았던 혁명 직전의 어느 하루 2천명, 연간 2만4천명을 수용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침대 하나에 2명 이상 6명까지, 하루 최대 5천~6천명까지 수용했다. 50년간(18세기) 전체 환자 110만명 중 2만4천명이 죽었고, 사망률은 20~25퍼센트였다. 파리의 극빈자들의 무덤이라는 별명이 생긴 이유다.

경증 환자, 중증 환자, 죽어가는 환자가 한 침대를 쓰다 숨졌다. 회복기의 환자가 다시 중환자가 되는 수도 있었다. 새로운 보균자가 된 줄 모르고 퇴원하는 사람이 바깥에서 병을 퍼뜨렸다. 그래서 계몽사상가 디드로는 오텔디외를 가리켜 가장 잔인한 병원이라고 평가했다. 오텔디외에 화재가 났을 때 그 결과는 무척 잔인했다. 1718년, 1737년, 1742년에 이어 1772년에는 한겨울에 큰불이 났다. 12월30일부터 열하루 동안 건물을 폐허로 만들었다. 그때 병원을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그 자리에 다시 세웠다.

오텔디외는 18세기 후반 큰불로 전소된 뒤 그 자리에 새롭게 지어졌다. 1867년에 찍은 사진으로, 건물 뒤쪽에 노트르담 대성당의 첨탑 두개가 보인다. 위키피디아
오텔디외는 18세기 후반 큰불로 전소된 뒤 그 자리에 새롭게 지어졌다. 1867년에 찍은 사진으로, 건물 뒤쪽에 노트르담 대성당의 첨탑 두개가 보인다. 위키피디아

1787년에 과학아카데미는 오텔디외 병원의 업무를 다섯개 병원에서 나눠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대주교·시장·치안총감이 참여한 경영진은 막강한 권력을 발휘해서 어떻게든 이 제안을 무시한 채 그럭저럭 혁명을 맞이했다. 재정 상태가 양호한 오텔디외에서도 빵을 구울 밀가루를 확보하지 못해 애를 태웠다. 어떤 병원에서는 말안장을 삶아서 ‘탕약’이라고 제공했다. 우리도 수출·증산·건설에 매진하던 1960년대에 군화용 가죽 자투리로 ‘수구레 국밥’을 끓였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의 특별한 사례를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21세기의 병원에서도 집단감염이 발생하는 사례를 대구에서 보았으니 전염병에는 늘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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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전염병에 대처하는 현대 모델

19세기 세균학의 선구자로서 가열살균법을 알아낸 파스퇴르(1822~1895)가 의학의 새 시대를 열기 전의 왕정국가도 가난을 구제하고 질병을 통제하려고 노력했다. 중세부터 몽펠리에 대학의 뒤를 이어 파리 대학에서도 의학을 연구했다. 한센병자 수용소(léproserie 또는 maladrerie)를 세웠고, 한센병자가 줄어든 뒤에는 일반 병원에서 그들을 치료했다. 1761년에 리옹에, 5년 뒤에는 파리 근교인 알포르에 수의학교를 세워 동물의 질병에 대해 연구했다. 성병환자는 오텔디외에서 진단서를 받은 뒤에 비세트르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 지금의 오텔디외는 자크 질베르(1793~1874)의 설계로 완전히 새로 지었다.

생명 연장의 꿈을 실현하는 오늘날에도 새로운 전염병이 지구촌에 퍼진다. 선진국들이 새 체제의 ‘중세’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새로운 모형을 제시했다. 신속히 개발한 진단키트를 적극 활용하고, 헌신적인 의료진이 총력대응하고, 민주시민들은 협조하고 응원하며, 드라이브스루에서 워크스루까지 진단 방법을 발전시키고, 아이티(IT) 강국의 정보통신 역량을 모두 쏟아부어 위기에 대처했다. 의료체계가 건전하니 상호신뢰도 굳건하다. 사재기가 없음이 그 척도다. 그럼에도 모두가 지쳐가는 이때 국경의 검역에 실패할 경우와 함께, 중세인이 유대인을 학살했듯이 혐오 바이러스가 퍼지는 경우를 상상하면 안심하기는 이르다.

다행히 나는 우리의 민주화 역량을 믿는다. 모든 활동이 움츠리고, 일부 종교단체, 코로나 유증상자 등이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나라가 망하기만 바라는 세력이 가짜뉴스를 퍼뜨리지만, 우리는 세계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현 체제를 무조건 싫어하고 저주하는 사람까지 포용하는 진정한 민주국가로 발전한 덕이다. 우리나라는 과거 정부처럼 가축을 마구 생매장하지 않고서도 ‘아프리카 돼지열병’을 막아냈고, 박쥐고기를 먹지 말라고 당부하지도 않은 채 다른 나라의 모범이 되었다. 역대 정부·질병관리본부·지자체장들의 능력을 비교하면서 유권자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깨닫는다.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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