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주명철의 프랑스 역사산책
⑥ ‘하느님의 집’ 오텔디외 병원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병원
660년 파리 주교 주도로 창설
독실한 신도들이 운영비 기부
환자 돌봄은 수녀들이 도맡아
병상 부족으로 늘 과다 수용
근대 이전 병원내 감염 많아
한때 ‘잔인한 병원’ 오명 얻기도
⑥ ‘하느님의 집’ 오텔디외 병원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병원
660년 파리 주교 주도로 창설
독실한 신도들이 운영비 기부
환자 돌봄은 수녀들이 도맡아
병상 부족으로 늘 과다 수용
근대 이전 병원내 감염 많아
한때 ‘잔인한 병원’ 오명 얻기도
660년 파리 주교 랑드리의 주도로 설립된 오텔디외는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병원이다. 프랑스 혁명 직전에는 하루 2천명의 환자를 수용했다. 위키피디아
다리 통행세로 운영비 보태기도 476년에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가톨릭교회의 조직(Province, 총대주교 관구)은 고스란히 남았다. 주교들은 프랑크 왕국의 왕·귀족들과 긴밀히 협조했다. 더욱이 그들은 종교시간표를 가지고 일상생활을 지배했다. ‘검역’을 뜻하는 ‘카랑텐’(quarantaine)은 애당초 ‘부활절 이전 40일 동안의 금욕기’를 뜻했다. 교회의 달력은 신도들의 일상생활을 통제했다. 아기가 태어난 시기를 역산하면 다수가 금욕기간을 지켰음을 알 수 있다. 농부와 달리 뱃사람은 출어기가 비자발적 금욕기였다. 클로테르 3세 치세인 660년에 파리 주교 랑드리는 아르샹보 백작과 협력해서 오텔디외를 세웠다. 오텔디외에서 북쪽으로 뻗은 아르콜 길을 낼 때 사라진 ‘슈베 생랑드리 길’(rue du Chevet-Saint-Landry, 랑드리 성인의 침대 머리맡 길)은 그 기억을 간직했다. 665년에는 파리 장관 에르켐발루스의 저택을 병원으로 이용했다. 언제부터 오텔디외가 전용 건물을 가졌는지 알 수 없지만, 1157년의 특허장이 남아 있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지붕에서 내려다본 오텔디외의 모습. 위키피디아
환자 몰려 침대 하나에 2명 이상 수용 오텔디외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성 아우구스티노 교단의 수녀들은 청빈·정결·순명의 서원 외에 ‘친절한 돌봄’(hospitalité)을 감독기관인 노트르담 대성당 참사회에서 맹세했다. 대성당 참사회원이 죽으면 그가 쓰던 침구(매트리스, 깃털이불, 긴 베개, 시트)를 오텔디외에서 사용했다. 백년전쟁(1337~1453)과 페스트, 위그노전쟁(1562~1598), 30년전쟁(1618~1648), 마르세유의 페스트(1720)는 인구 증가에 급제동을 걸었다. 서민은 부부가 함께 벌어야 겨우 생활할 수 있었고, 그래서 급히 배우자를 다시 찾았다. 전쟁이나 전염병이 휩쓴 뒤 몇 년 안에 그 전의 인구를 회복하고 증가시킨 이유다. 생물학적 구체제에는 ‘주여, 우리를 전쟁·굶주림·질병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했다. 파리의 인구는 17세기 중엽에 45만에서 18세기 접점에 50만, 프랑스 혁명 전에 60만까지 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병원의 병상 수가 늘 부족했다. 대표 격인 파리 오텔디외는 여러 병실을 잇달아 길게 지어 침대 1200개를 놓고 모든 종류의 환자를 받았다. 비교적 병원이 많았던 혁명 직전의 어느 하루 2천명, 연간 2만4천명을 수용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침대 하나에 2명 이상 6명까지, 하루 최대 5천~6천명까지 수용했다. 50년간(18세기) 전체 환자 110만명 중 2만4천명이 죽었고, 사망률은 20~25퍼센트였다. 파리의 극빈자들의 무덤이라는 별명이 생긴 이유다. 경증 환자, 중증 환자, 죽어가는 환자가 한 침대를 쓰다 숨졌다. 회복기의 환자가 다시 중환자가 되는 수도 있었다. 새로운 보균자가 된 줄 모르고 퇴원하는 사람이 바깥에서 병을 퍼뜨렸다. 그래서 계몽사상가 디드로는 오텔디외를 가리켜 가장 잔인한 병원이라고 평가했다. 오텔디외에 화재가 났을 때 그 결과는 무척 잔인했다. 1718년, 1737년, 1742년에 이어 1772년에는 한겨울에 큰불이 났다. 12월30일부터 열하루 동안 건물을 폐허로 만들었다. 그때 병원을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그 자리에 다시 세웠다.
오텔디외는 18세기 후반 큰불로 전소된 뒤 그 자리에 새롭게 지어졌다. 1867년에 찍은 사진으로, 건물 뒤쪽에 노트르담 대성당의 첨탑 두개가 보인다. 위키피디아
새 전염병에 대처하는 현대 모델 19세기 세균학의 선구자로서 가열살균법을 알아낸 파스퇴르(1822~1895)가 의학의 새 시대를 열기 전의 왕정국가도 가난을 구제하고 질병을 통제하려고 노력했다. 중세부터 몽펠리에 대학의 뒤를 이어 파리 대학에서도 의학을 연구했다. 한센병자 수용소(léproserie 또는 maladrerie)를 세웠고, 한센병자가 줄어든 뒤에는 일반 병원에서 그들을 치료했다. 1761년에 리옹에, 5년 뒤에는 파리 근교인 알포르에 수의학교를 세워 동물의 질병에 대해 연구했다. 성병환자는 오텔디외에서 진단서를 받은 뒤에 비세트르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 지금의 오텔디외는 자크 질베르(1793~1874)의 설계로 완전히 새로 지었다. 생명 연장의 꿈을 실현하는 오늘날에도 새로운 전염병이 지구촌에 퍼진다. 선진국들이 새 체제의 ‘중세’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새로운 모형을 제시했다. 신속히 개발한 진단키트를 적극 활용하고, 헌신적인 의료진이 총력대응하고, 민주시민들은 협조하고 응원하며, 드라이브스루에서 워크스루까지 진단 방법을 발전시키고, 아이티(IT) 강국의 정보통신 역량을 모두 쏟아부어 위기에 대처했다. 의료체계가 건전하니 상호신뢰도 굳건하다. 사재기가 없음이 그 척도다. 그럼에도 모두가 지쳐가는 이때 국경의 검역에 실패할 경우와 함께, 중세인이 유대인을 학살했듯이 혐오 바이러스가 퍼지는 경우를 상상하면 안심하기는 이르다. 다행히 나는 우리의 민주화 역량을 믿는다. 모든 활동이 움츠리고, 일부 종교단체, 코로나 유증상자 등이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나라가 망하기만 바라는 세력이 가짜뉴스를 퍼뜨리지만, 우리는 세계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현 체제를 무조건 싫어하고 저주하는 사람까지 포용하는 진정한 민주국가로 발전한 덕이다. 우리나라는 과거 정부처럼 가축을 마구 생매장하지 않고서도 ‘아프리카 돼지열병’을 막아냈고, 박쥐고기를 먹지 말라고 당부하지도 않은 채 다른 나라의 모범이 되었다. 역대 정부·질병관리본부·지자체장들의 능력을 비교하면서 유권자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깨닫는다.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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