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학술

파리시청은 본래 ‘부르주아 회의소’였다

등록 2020-05-09 08:57수정 2020-05-09 12:03

[토요판] 주명철의 프랑스 역사산책
⑧ 파리시청과 광장

중세 파리시장 격 ‘프레보’ 두명
하나는 왕이 임명한 파리장관
치안, 징세, 민형사 재판 등 담당
다른 하나는 상인조합의 대표자
정관 통해 ‘부르주아 회의소’ 운영

샤틀레·그레브 광장 등 번화가
‘부르주아 회의소’ 주도로 개발

파리코뮌 때 포격, 시청사 파괴
시청 앞 광장, 한때 단두대 처형장

애초 파리 상인조합들이 사용하던 ‘부르주아의 회의소’에서 출발했던 파리시청. 시청 앞 광장은 한때 범죄인의 공개 처형 장소이기도 했다. 1871년 파리코뮌 지도부가 진을 친 시청 건물을 베르사유 정부군이 포격을 가해 화재로 전소된 뒤 나중에 새로 지었다. 위키피디아
애초 파리 상인조합들이 사용하던 ‘부르주아의 회의소’에서 출발했던 파리시청. 시청 앞 광장은 한때 범죄인의 공개 처형 장소이기도 했다. 1871년 파리코뮌 지도부가 진을 친 시청 건물을 베르사유 정부군이 포격을 가해 화재로 전소된 뒤 나중에 새로 지었다. 위키피디아

1794년 7월27일 새벽, 파리시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민주주의 실험을 시작한 지 4년을 갓 넘긴 때, 1년 이상 국민공회를 쥐락펴락하던 로베스피에르는 파리시청으로 피신해서 대책을 논의하다가 진압군 메르다가 쏜 총에 맞아 턱에 큰 상처를 입은 채 붙잡혔다. 그는 “노골적으로 전제정을 갈망한 죄, 국민공회의 다수 의원을 추방자 명단에 올린 죄” 등 수많은 죄목으로 동료들과 함께 신속한 재판을 받고 28일에 단두대에 올랐다. 혁명법원의 저승사자인 검사 푸키에 탱빌은 1795년 5월7일에 그레브 광장에 설치한 단두대에 올랐다.

시테섬에서 노트르담 대성당을 본 뒤 수많은 역사의 현장인 파리시청으로 가기 위해 북쪽으로 뻗은 아르콜 길 끝에서 다리를 건넌다. 1828년에 세운 ‘그레브 인도교’는 현수교라서 출렁거렸기 때문에 별명이 ‘출렁다리’(la Balance)였다. 1848년까지 통행료를 받다가 파리시가 정부에 일정액을 상환한 뒤 무료로 개방했고, 아르콜 다리로 이름을 바꿨다. 1796년에 나폴레옹이 아르콜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이름이라는 설이 있으나, 1830년 7월혁명(‘영광의 3일’) 때 삼색기를 세우다가 총탄에 숨진 공화파 젊은이의 이름이다. 1855년에 그것을 헐고 양쪽을 하나의 아치로 연결한 뒤 상판을 깐 90미터의 다리를 세웠다.

프랑스 혁명 초기 공포정치를 이끌던 로베스피에르(가운데 노란 바지) 등 국민공회파가 반대파에 의해 체포된 테르미도르 반동(1794년 7월27일)의 모습을 그린 19세기 그림(장 조제프 프랑수아 타세르트). 위키피디아
프랑스 혁명 초기 공포정치를 이끌던 로베스피에르(가운데 노란 바지) 등 국민공회파가 반대파에 의해 체포된 테르미도르 반동(1794년 7월27일)의 모습을 그린 19세기 그림(장 조제프 프랑수아 타세르트). 위키피디아

수운업자조합이 파리시 발전 주도

파리시청과 광장을 잘 알기 위해 부르주아 계층이 번영한 역사를 잠시 되짚어보자. 샤를마뉴는 제국의 수도를 엑스라샤펠(아헨)로 정하고, 각 지방의 공작·백작들에게 정치·군사·사법·조세를 맡겼다. 샤를마뉴는 앨퀸(Alcuin of York)에게는 ‘지적 르네상스’를 맡겼다. 파리는 정치적으로 중요성을 잃은 대신 생제르맹 데프레 수도원과 생드니 수도원이 수도사들의 연구활동 중심으로 떠올랐다. 814년에 샤를마뉴가 죽은 뒤 손자들이 싸우다가 843년에 베르됭 조약을 맺었다. 황제 로테르(맏이)의 중프란시아, 게르마니아의 루이 2세(여섯째)의 동프란시아, 대머리 샤를(막내, 이복동생)의 서프란시아가 탄생했다.

제국이 와해되는 틈에 노르만인(바이킹)이 센강을 거슬러 올라가 845년 3월에 파리를 공격했고, 대머리 샤를 2세를 잡았다가 몸값을 받고 풀어주었다. 그들은 네 번이나 더 파리를 공격하고 돈을 받은 뒤 물러갔다. 파리 주민들은 시테섬에서 공격을 견뎌냈다. 노르만인은 약탈할 것을 많이 가진 수도원과 주교구가 즐비한 상류 쪽 물길을 터달라고 요구했다. 파리 백작 외드가 주민들과 힘을 합쳐 뱃길을 막으면서 버티는 동안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뚱보 샤를 3세가 원군을 끌고 왔다. 877년에 노르만인은 800리브르(당시 은 327㎏)를 받고 물러났다. 888년에 샤를 3세 황제가 죽고, 그가 형식적으로 재통일했던 제국은 프랑스·로렌·게르마니아·부르고뉴·프로방스·이탈리아·교황령 국가의 7개로 나뉘었다.

루이 5세가 987년에 카롤링거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죽고, 로베르 가문의 위그 카페가 왕으로 뽑히면서 제3왕조인 카페 왕조 시대를 열었다. 프랑스의 왕위는 장자에게 넘어갔다. 유아사망률이 높던 시대에 위그 카페의 직계가 3세기 이상 왕위를 이었다. 이를 ‘카페 가문의 기적’이라 불렀다. 그 뒤 왕위는 카페 가문의 방계 혈통인 발루아, 발루아 오를레앙, 발루아 앙굴렘, 부르봉 가문이 차례로 이었다. 혁명기에 부르봉 가문의 루이 16세를 폐위한 뒤 루이 카페라 불렀다. 루이 16세는 부르봉 가문 출신이지만, 카페 왕조에 속했음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노르만인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파리 주민이 시테섬에 모여 항전했기 때문에 좌안이 황폐해졌다. 그럼에도 파리는 진정한 수도로 거듭났다. 10세기에 좌안의 생제르맹 데프레 수도원과 생트 준비에브 수도원은 피폐해진 시설을 정비하고, 농노들에게 경작지를 나눠주면서 경제를 되살렸다. 뫼동(Meudon·파리 중심에서 서남쪽 9㎞ 부근)까지 경작지를 늘렸다. 더욱이 11세기부터 숲을 개간해서 생산력을 늘렸다. 중세의 여느 도시는 왕이나 영주에게 자치권(franchises)을 샀지만, 파리는 수운업자조합이 특권을 확보해나갔다.

상업이 더욱 활발해진 ‘12세기 르네상스’ 시기에 파리는 더욱 발전했다. 필리프 2세(1180~1223 재위)는 결혼으로 아르투아 지방을 얻고, 전쟁으로 영토를 넓혔다. 그는 8월에 태어났으며 영토를 넓혔기 때문에 ‘오귀스트’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프랑크족의 왕’(rex francorum)에서 ‘프랑스의 왕’(rex franciae)으로 칭호를 바꾸었다. 1200년에 그는 파리를 성곽으로 둘러싸고, 시테섬 서쪽 우안에 루브르 요새를 짓기 시작했다. 게다가 시테 궁전도 새로 지었다. 파리에는 첨두홍예의 대성당과 권력자의 저택이 늘었다. 그의 치세에 노트르담 대성당의 건축 공사를 병행하고, 파리 대학교를 설립했다는 사실이 파리의 번영을 증명한다.

13세기부터 유럽에는 상업 도시들이 상호이익을 증진하는 동맹체제를 맺고 있었다. 필리프 4세(1285~1314 재위) 시대에는 샹파뉴의 시장이 쇠락하는 대신 파리가 재정의 중심지가 되었고, 부르주아 계층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원래 ‘부르’(bourg)는 도성 밖의 수도원을 끼고 발달했는데, 나중에는 도성이 인근의 ‘부르’까지 합병했고, 11세기 말에는 도성의 주민을 부르주아로 부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회계층인 부르주아와 정치적 자율성을 누리는 시민을 혼동하면 안 된다.

1302년에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다투면서 고위직 성직자·귀족·부르주아의 대표들을 노트르담 대성당에 소집했다. 최초의 신분회였다. 귀족들은 나머지 두 신분에게 충성을 강요하여 전비를 충당시켰다. 부르주아 계층은 세금을 걷는 귀족과 종교인의 재력·권한에 미치지 못했지만, 무시하지 못할 경제력을 갖추며 성장했다.

센강에서 바라본 파리시청사. 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센강에서 바라본 파리시청사. 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가난의 계곡이었던 샤틀레 광장

파리에는 ‘프레보’라는 직책이 두 가지 생겼다. 하나는 왕이 임명하는 파리 장관(prévôt de Paris)이었다. 로베르 2세(996~1031 재위) 때 처음 생긴 장관직은 왕에게 1년에 세 번씩 일정액을 납부했다. 루이 9세(1226~1270 재위)는 1260년부터 장관직을 임명제로 바꾸고, 연봉 300리브르(황금 2.481㎏)를 주면서 파리의 치안과 징세를 맡겼다. 시테섬 우안을 드나드는 ‘그랑 퐁’(큰 다리, 오늘날 퐁오샹주)을 지키는 요새를 ‘그랑 샤틀레’(또는 샤틀레), 좌안에서 ‘프티 퐁’을 지키는 ‘프티 샤틀레’라 했는데, 파리 장관은 샤틀레에서 민형사 사건을 심리·재판하고 야경대도 운영했다.

일찍이 수운업자들의 조합은 센강으로 파리의 생필품을 들여오는 배에 나루 이용료를 부과했다. 1121년 루이 6세가 징세한 자료는 조합이 파리로 들어온 포도주 운반선마다 60수(3리브르)씩 걷었음을 보여준다. 상인조합은 정관을 마련하고, ‘부르주아의 회의소’(Parloir aux bourgeois)에서 모였다. 그 대표를 ‘파리 상인들의 프레보’(prévôt des marchands de Paris)라 했다. 이것이 파리 시정부의 유래이다. 파리 상인들은 인근의 상인들과 조합체를 결성했고, 상인 프레보(상인 대표)의 법적 관할권을 넓혔다.

13세기의 시청인 ‘부르주아의 회의소’는 샤틀레의 강변 쪽 ‘발레 드 미제르’에 있었다. 짐승을 도살하는 곳이라는 ‘역경의 계곡’, 또는 홍수가 모든 것을 앗아간다는 ‘가난의 계곡’을 뜻했다. 지금은 파리에서 가장 붐비는 샤틀레 광장의 일부가 되었다. 거기서 상인 프레보(앞으로 파리 시장으로 부르겠다)가 부대표(échevin) 4명과 심판관(prud'homme) 24명으로 시정부를 꾸렸다.

시정부가 명령을 내리면 서기들이 등기부에 올린 뒤 발송했고 도량형도 검사했다. 파리 시정부가 생긴 뒤 왕은 파리 장관을 통해 더욱 긴밀히 상인조합과 직인조합을 통제했다. 루이 9세가 임명한 장관 부알로는 상인·직인·노동자에 관한 규칙을 모아서 관리했다. 그는 ‘직업인 요람’(Livre des Métiers)에서 101가지 직업을 분류하고 통행료와 시장세에 대한 규칙을 담았다. 우리나라 직업 1만2천여개(고용노동부)에 비하면 얼마나 단순한 사회였는지 알 수 있다.

1190년 여름에 필리프 2세 오귀스트는 십자군 원정을 떠날 때 부르주아 몇명을 뽑아 ‘기둥 위의 집’(Maison aux Piliers·시테섬 북쪽 강가 비탈에 기둥을 박고 그 위에 지은 집)에서 왕실 금고를 지키라고 명령했다. 이 집의 별명은 ‘왕세자의 집’이다. 파리시장 에티엔 마르셀은 1357년에 이 집을 2880리브르(황금 11.75㎏)에 매입하고, ‘발레 드 미제르’에 있던 ‘부르주아의 회의소’를 옮겼다. 필리프는 생트 준비에브 언덕 남쪽 기슭까지 성곽을 둘러쳤는데, 성곽에 기대어 ‘부르주아 회의소’가 하나 있었다. 시청을 ‘기둥 위의 집’으로 옮기기 전에 잠시 사용한 곳이라는 설도 있다.

‘기둥 위의 집’은 센강 우안에 모래톱을 뜻하는 그레브 나루를 내려다보았다. 1141년 부르주아가 루이 7세에게 70리브르를 내고 개발권을 얻은 뒤, 시테섬 북쪽 생랑드리 나루의 맞은편에 만든 나루다. 그레브 나루가 생긴 뒤 선술집도 생기고 시장도 열렸다. 그곳은 파리의 생필품을 공급하는 장소가 되었다.

강도 처형 위해 1792년 기요틴 첫 설치

1549년부터 1606년까지 ‘기둥 위의 집’ 자리에 르네상스풍의 건물을 세웠다. 도시가 발달하면서 거기서 샤틀레 앞까지 강변을 따라 건초·밀·곡식·나무·석탄·소금을 부리는 나루가 발달했다. 파리 인구가 더욱 늘어나자 그레브 광장의 시장을 북쪽의 샹포로 옮겼다. 광장은 주민들이 모이고, 죄인을 처형하는 장소가 되었다.

파리시청 앞에서 죄인을 고문하고 사형 선고를 내리는 모습을 담은 19세기 그림. 게티이미지뱅크
파리시청 앞에서 죄인을 고문하고 사형 선고를 내리는 모습을 담은 19세기 그림. 게티이미지뱅크

1757년 3월28일 파리시청 앞 그레브 광장에는 대역죄인 다미앵의 처형을 보려는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섰다. 거의 세 달 전에 베르사유궁에서 루이 15세를 살해하려다 실패한 그를 처형하려고 전국에서 사형집행자 열여섯명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판결문에서 적시한 대로 능지처참형을 시행했다. 불로 달군 집게로 가슴·팔·넓적다리·종아리 살점을 지져 뜯고, 칼을 들었던 오른손을 유황불에 태운 뒤 모든 상처에 납을 끓여 부었다. 그러고 나서 거열형을 집행했다. 다미앵의 사지를 말 네 필에 묶어 찢었다. 그러나 말이 힘들어하자 두 필을 더 투입했다. 다미앵은 찢어지는 몸을 보면서 고통에 몸부림쳤다. 집행자들은 몇 시간이나 애쓴 끝에 임무를 완수했다.

1792년 4월25일에 시청광장에 ‘기요틴’(단두대)을 처음 설치하고 강도 펠티에를 처형했다. 1870년에 나폴레옹 3세는 제대로 준비도 하지 않고 프로이센과 전쟁을 벌여 패했다. 제3공화국 정부는 1871년 초 베르사유궁에서 독일제국의 선포에 굴욕적으로 동의했다. 그 과정에서 파리코뮌의 투사들은 입법부 선거를 급히 치르려는 정부에 저항했고, 3월18일부터 더욱 체계적으로 싸웠다. 5월21일에 베르사유의 정부군이 파리를 공격했고, 쌍방은 시가전을 벌였다. 포격을 받은 파리시청·튀일리궁·회계검사원이 화재로 사라졌다. 공화정부는 시청사를 새로 지었지만, 튀일리궁은 새로 짓지 않았다. 2019년에 시청광장에서는 ‘유럽의 날’(매년 5월9일)을 기리는 축제를 5월 첫 주말에, 21일에는 가수 샤를 아즈나부르(1924~2018)를 추모하는 음악제를 열었다.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검은 물살 타고 대마도 밀려 간 제주 사람들 1.

검은 물살 타고 대마도 밀려 간 제주 사람들

경복궁 주변 파봤더니 고려시대 유물이 줄줄이? 2.

경복궁 주변 파봤더니 고려시대 유물이 줄줄이?

서울어린이대공원 땅밑에 조선시대 말 목장이 묻혀 있었다 3.

서울어린이대공원 땅밑에 조선시대 말 목장이 묻혀 있었다

1월 24일 문학 새 책 4.

1월 24일 문학 새 책

음악인 2645명 “반란세력에게 앙코르는 없다” 시국선언 5.

음악인 2645명 “반란세력에게 앙코르는 없다” 시국선언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