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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토마스 아퀴나스가 파리대학에 유학한 까닭

등록 2020-05-23 08:05수정 2020-05-23 09:26

[토요판] 주명철의 프랑스 역사 산책
⑨ 소르본과 카르티에 라탱

13세기 필리프 2세, 파리대학 조직
교수·학생 유럽 각지에서 몰려들어
지적 르네상스 부흥의 산실로 작용

보편보다 개성 강조한 아벨라르 등
파리에 집결한 ‘삐딱한 지식인’들
처음부터 기존 가치관 전복에 앞장
68혁명 땐 ‘아버지 죽이기’ 운동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인 소르본대학교의 정문. 소르본대학교의 전신인 파리대학교는 13세기 초에 만들어졌다. 위키피디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인 소르본대학교의 정문. 소르본대학교의 전신인 파리대학교는 13세기 초에 만들어졌다. 위키피디아

1968년 5월3일 소르본에 경찰이 들이닥쳐서 학생 500명을 해산시키고 다수의 학생을 연행했다. 학생들은 생미셸 대로로 뛰쳐나갔다. 그들은 방책을 설치한 뒤 경찰과 대치하면서 투석전을 벌였다. 한 해 전에 파리10대학(낭테르) 학생들이 남녀 기숙사를 자유롭게 오가도록 해달라고 주장하면서 불을 지핀 운동이 권력의 눈으로 볼 때 ‘폭동’으로 번졌다. 파리 대학생들이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부정하면서 ‘아버지 죽이기’를 시작했다. 그 운동이 해를 넘겨 휴교령을 끌어낸 뒤 점거농성으로 연결되었고, 노동총연맹과 연계해서 드골 정권의 집권 10주년을 맞는 파리를 초토화시켰다. ‘68혁명’을 전후(戰後) 번영(“영광의 30년”)의 끝자락에서 국제질서의 변화와 함께 살펴야 마땅하나 여기서는 불가능하다.

1982년 초여름, “이 사람은 내 동무 김일쑹 나라에서 왔습니다.” 파리1대학(팡테옹 소르본)의 프랑스혁명사연구소장 알베르 소불 교수는 그곳 도서관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한 뒤, 오금이 저린 내게 농담이라는 뜻으로 씩 웃으며 눈을 찡긋했다. 그의 명성만 듣고 찾아갔다가 겪은 일이다. 그분은 내가 들이민 입학서류에 흔쾌히 서명을 해주셨지만, 몇달 뒤 세상을 떴다. 그렇게 해서 ‘초대 최고 존엄의 동무’ 대신 문화사·사회사에서 큰 업적을 내고 있던 다니엘 로슈 교수를 사사한 뒤 오늘의 내가 되었다.

2008년 파리 소르본대학교에서 68혁명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2008년 파리 소르본대학교에서 68혁명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처음엔 엘리트 특권의식도 강해

소르본 광장의 카페 밖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젊은이들을 지나 정면 건물로 들어가면 마당이 있다. 왼편 건물에 있는 역사과 사무실을 몇번 드나들다가 마당에서 금을 보기 시작했다. 옛날 헐어낸 소르본 건물의 위치를 알려주는 금이었다. 소르본은 루이 9세(1214~1270)의 고해신부이며 신학자인 로베르 소르봉이 1253년에 세운 ‘기숙학교’(collège)로 파리대학교의 상징이다.

1789년에 혁명이 일어나 가톨릭을 국교로 인정하지 않게 되면서 파리대학교의 중심인 신학부가 필요없게 되었고, 잠시 문을 닫았다가 1806년에 제국대학교에 편입되었다. 제3공화정 시기인 1885년에 소르본을 다시 짓고, 1896년에 대학교육을 개편한 뒤 파리대학교는 도약했다. 그 뒤 파리대학교는 ‘68혁명’ 이후 13개로 나뉘었다. 2000년대에는 여러모로 변화를 모색하다가 2020년부터 ‘알리앙스 소르본 파리 시테’가 파리의 주요 교육기관을 연합하여 새출발했다.

12세기에 시테섬에서 성당학교가 학생을 가르쳤다. 차츰 선생과 학생들이 조합을 결성해서 꾸리는 학교가 늘어났다. 시테섬은 지식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노트르담 성당학교에서 피에르 아벨라르가 추종자를 많이 모았다. 그는 스승인 기욤 드 샹포와 의견을 달리하고, 개별 대상보다 보편성을 중시하는 ‘실재론’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개체마다 보편성과 함께 개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교회의 권세가 퓔베르의 조카인 엘로이즈를 가르치다가 비밀결혼을 했고, 퓔베르의 보복으로 거세를 당했다. 중세사가 르고프의 말대로, 기사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명예롭고 화려한 군인의 길을 버리고 문학에 전념하기로 했으며, 칼 대신 풍자를 무기로 삼았다. 시테섬에는 풍자시를 지으면서 교회 중심의 질서를 비판하는 골리아르(Goliard, 삐딱한 지식인)가 많았는데, 그는 그들을 위해 노래 가사를 썼다.

프랑스 화가 프랑수아 니콜라 마르티네가 1781년에 그린 파리대학교의 모습. 위키미디어
프랑스 화가 프랑수아 니콜라 마르티네가 1781년에 그린 파리대학교의 모습. 위키미디어

그는 파리를 떠났다가 돌아가 좌안의 생트준비에브 언덕 아래서 제자를 길렀다. 그 일대에는 지식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학교가 많이 생겼다. 고대 아테네의 학원처럼 선생과 학생이 건물도 없이 모이다가 차츰 체계를 갖추었다. 견습공·노동자·장인의 위계질서를 갖춘 직인조합처럼 교육조합도 세 등급의 교육을 했다. 초급(바칼로레아)은 문법·논리·수사, 중급(리상스)은 산술·기하·천문·음악, 고급(독토라)은 의학·교회법·신학이었다. 초급과 중급을 중세 7학과라 하며, 고급과정을 가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했다.

13세기 초 필리프 2세 오귀스트는 학교들을 파리대학으로 조직했다. 파리대학은 1215년에 교황 특사 로베르 드 쿠르송, 1231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의 인가와 함께 법적 특권과 지식 추구권을 얻었다. 이탈리아의 선례처럼 파리에서도 교수와 학생이 대학을 함께 운영했다. 대학교의 어원에 ‘조합’의 뜻이 있는 까닭이다. 그들은 툭하면 파업했다. 대학이 자치권을 학교 밖으로 넓히려고 하면서 왕권과 갈등을 빚었다. 13세기 초에 파리 인구가 12만명인데 학생이 거의 1만5천명이었다.

학생들은 큰 특권을 누렸다. 빚받이꾼이 학생을 함부로 붙잡지 못하고, 파리 장관의 권한으로도 어쩌지 못했다고 한다. 학생들은 떼 지어 시테섬으로 몰려가 주민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야경꾼을 두들겨 패고 나서 곧바로 자기네 구역으로 물러나 법적 제재를 피했다. 밤에 미처 다리를 건너지 못한 학생은 강물을 헤엄쳐 건너기도 했다. 극소수의 미래 엘리트가 특권의식을 가지고 함부로 집단행동을 하면서 인권과 자유가 발달하지 못한 사회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중세의 대학은 유럽 각지의 선생과 젊은이가 모이는 중심지였고, 거기서 쓰는 공통어는 라틴어였다. 19세기에 독일 남부 변방 수도원에서 발굴한 “카르미나 부라나”(베네딕트 수도원의 노래)가 중세 지식인에게 국경이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라틴어를 쓰던 파리대학 일대를 카르티에 라탱(라틴어 구역)이라고 불렀다.

아퀴나스의 별명은 ‘벙어리 소’ 아퀴나스

파리대학은 신학 연구의 중심이었다. 대(大)알베르(Albert le Grand,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그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만 초점을 맞춰보자. 1206년에 슈바벤 지방에서 태어난 대알베르는 볼로냐와 파도바에서 인문학과 신학을 공부한 뒤 유럽 각지를 돌다가 1228년부터 쾰른에 머물렀다. 1245년에 파리대학에서 가르치고 1248년에 쾰른으로 돌아갈 때 제자인 아퀴나스와 동행했다. 유럽에서 아랍인을 매개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이면서 실재론과 유명론의 논쟁이 일었을 때, 대알베르는 전통 신학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주의 철학을 조심스럽게 접목했고, 신학과 과학이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탈리아 화가 카를로 크리벨리가 15세기에 성당 제단화로 그린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는 13세기에 파리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7년 동안 강의도 했다. 위키피디아
이탈리아 화가 카를로 크리벨리가 15세기에 성당 제단화로 그린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는 13세기에 파리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7년 동안 강의도 했다. 위키피디아

아퀴나스는 나폴리에서 공부하고 파리에서 ‘만물박사’인 대알베르를 만나 쾰른까지 동행했다. 그는 1252년에 파리대학교로 돌아와 7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이탈리아와 파리에서 <신학대전>을 집필했다. 대알베르가 ‘벙어리 소’라 부른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을 통해 지적 르네상스를 가져왔다. 그는 믿음이 모든 지식의 바탕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다른 의견도 존중하면서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1274년 초 그가 선종한 뒤에 신학자들이 그의 사상을 검증하면서 논란이 일었고 1277년에 그의 이론을 배척했지만, 1323년에 교황 요한 22세는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

카르티에 라탱은 로마제국 시대부터 시테섬을 관통하는 남북 축의 남쪽 길을 끼고 발달했다. 프티퐁에서 시작한 생자크 길은 생트준비에브 언덕을 넘어 멀리 게나붐(오를레앙)으로 가는 길과 연결되었다. 언덕부터 센강변의 아르프 길(rue de la Harpe)이 라틴어 구역에 속했다. 중세의 아르프 길에는 하프(악기)를 그린 간판을 달아서 표시했다. 어떤 집에는 쇠뇌(활)나 제비 그림을 붙였다. 번지가 없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19세기 역사학자인 부르농(F. Bournon)은 루이 9세 치세의 파리에는 인구 13만명이 350개의 길로 오갔다고 한다. 파리의 역사를 저술한 파비에(J. Favier, 2014년 사망)는 토지대장에 표기할 때 번호를 썼지만 주소로 발전하지는 않았으며, 일상생활에서 부르던 이름으로 길을 구별했다고 한다. 교회나 수도원(생자크, 탕플), 직업(무두장이, 포도주상), 출신 지역(유대인, 롬바르드족, 에스파냐), 풍속(강도출몰지역 Coupe-Gueule, 사창가 Tire-Boudin), 지역 유지의 이름이 중요한 이정표였다.

카르티에 라탱에서 우리는 프랑스 중세사 박물관인 뮈제 드 클뤼니와 함께 테름궁(Palais des Thermes)을 볼 수 있다. 갈리아 지방 총독으로 왔다가 360년에 황제가 된 ‘배교자’ 율리아누스는 테름궁에서 지냈다. 테름은 로마의 목욕탕을 지칭한다. 오늘날에는 냉탕과 14m 이상의 궁륭이 남았다. 중세박물관의 소개글을 읽어보면, 클뤼니의 목욕탕은 1세기부터 2세기 사이에 지어졌으며, 발굴해보니 생미셸 대로, 생제르맹 대로, 클뤼니 길, 데제콜(학교들) 길로 둘러싸인 6천㎡나 되는 터와 함께 전통적인 시설로 열탕·온탕·냉탕·체력단련장과 종교적 시설도 갖추었다. 이 대목에서 문득 ‘노예도 보직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노예인 검투사는 늘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살았지만, 승승장구하는 인기인도 있었다. 광산 노예나 목욕탕 지하에서 불 때는 노예는 불운했다. 그들에게 햇빛을 보내줄 길은 없었다.

테름궁 터에 새로운 건물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10세기 초부터 교황에게 충성하면서 개혁운동을 이끌었던 클뤼니 수도원은 13세기에 소르본 광장 근처에 기숙학교를 열었다.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련 수도사들이 파리에서 대학 과정을 밟을 때 머물 곳이었다. 1485년부터 클뤼니 수도원장 자크 당부아즈가 수도원장들의 저택(Hôtel des abbés de Cluny, 클뤼니 저택)을 테름 목욕탕에 기대서 지었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담을 쌓고 넓은 정원과 고딕식 건물을 앉혔다. 그리고 보배로 자랑할 만한 예배당을 따로 지었다.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대학교 앞 모습. &lt;한겨레&gt; 자료사진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대학교 앞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파리대학교를 계승한 소르본대학의 대강의실 모습. 위키피디아
파리대학교를 계승한 소르본대학의 대강의실 모습. 위키피디아

1861년에야 프랑스 첫 여대생

클뤼니 저택은 19세기에 세심히 복원했지만 원래의 모습과 달라졌다. 도심의 작은 성채라 할 그 저택은 18세기까지 세간의 건축에 영향을 끼쳤다. 부자들은 대형마차가 드나드는 문과 쪽문을 둔 담을 치고 살았다. 19세기에 국가가 클뤼니 저택을 매입해서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보수공사가 끝나는 2021년까지 개방하지 않는다.

18세기 극작가·문화비평가인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는 계몽시대가 되었음에도 소르본이 모든 문제에 해답을 내놓으려 한다고 꼬집었다. 그처럼 소르본은 아주 보수적이었다. 여성으로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대학생이 된 쥘리 빅투아르 도비에는 서른일곱살인 1861년에 대학 입학 자격을 얻고, 1863년에 리옹대학교에 입학해서 1871년에 학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파리대학교에는 법학·의학·과학·문학(소르본)·약학의 5개 대학이 있었는데, 1867년에야 여학생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도비에보다 4년 뒤에 에마 슈뉘가 파리대학교 과학부에 입학했다. 소르본이 생긴 지 600여년 뒤, 파리10대학(낭테르)에서 남녀 기숙사 문제가 불거지기 100년 전의 일이다.

이처럼 변화의 첫걸음은 어렵지만 그다음은 빨라지기 마련이다. 지금 우리는 ‘포스트-코비드19’의 체제를 선도하고 있다. 정보통신 체제의 발달에 힘입어 비대면 교육을 현실화했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접속하면 얻을 수 있는 시대인데, 과연 학교 건물이 필요한가?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의 교육은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따뜻한 인간관계를 증진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강화해야 한다.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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