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대중음악 작곡가인 찐꽁선. 찐꽁선 가족 제공
베트남의 새해는 봄의 시작이다. 베트남어로 ‘뗏’(Tet)인 음력설은 연중 가장 큰 명절이다. 설 일주일 전 부엌신인 옹따오(Ong Tao)가 한 해 가정사를 하늘로 보고하러 가는 날로부터 설 준비는 시작된다. 설 연휴는 일주일, 농촌 지역에서는 한 달 정도는 보통이다. 설 때 사람들은 마을축제를 열고 봄을 준비한다. 올해 농사를 계획하고, 결혼식을 올려 일생을 계획한다. 새해를 맞아 ‘첫봄’(Mua xuan Dau tien) 노래가 거리에 흘러넘친다. 1975년 4월 통일 후 첫 설을 맞으며 국민 작곡가 반까오(Van Cao)가 국민들에게 이 희망의 노래를 선물했다. 30년간 전쟁 끝에 독립과 통일을 이룬 뒤 맞는 봄의 기쁨을 노래했다. 그는 일찍이 1944년에 ‘진군가’를 작곡했으며, 이는 호찌민에 의해 베트남 국가가 됐다.
반까오의 ‘첫봄’은 희망을 주는 흥겨운 곡조의 노래지만, 통일 후 베트남에서는 ‘냑도’(nhac do), 즉 ‘레드 뮤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사회주의형 인간에 걸맞은 힘찬 음악이 강조됐다. “베트남, 호찌민…”을 불러야 힘이 생겼다. 꼭 ‘레드 뮤직’이라고 할 순 없지만, “하노이를 그리워하며”를 부르며 포탄 사이를 뚫고 지낸 간난신고한 삶을 돌아보곤 했다. 이는 사람들이 전쟁과 곤궁한 시기를 겪어내는 힘이기도 했다. 전쟁과 통일 과정에서 나약한 감정들은 구석에 묻어두어야 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음악들도 마음 저 깊은 곳에 살아 있었다. 그건 ‘냑방’(nhac vang)이었다. ‘냑’은 음악의 악, ‘방’은 노란색 또는 황금을 뜻하니 곧 ‘골든 뮤직’이다. 베트남 통일 후 정부는 남부 음악 냑방을 금지시켰다. 남부 음악은 사랑, 슬픔 등을 담고 있어, 사회주의 혁명 도덕에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 인간의 감성을 어찌 억누르랴. 사랑, 이별, 슬픔을 담은 노래가 사회주의 사회라고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베트남의 주요 도시에는 라이브로 대중음악을 들려주는 음악다방이 유행한다. 그중 하나인 호찌민시의 ‘퐁짜 콩뗀’에서 베트남의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한우 제공
냑방은 한국으로 치면 ‘7080’ 중 ‘70’ 노래라고 할 수 있으며, 어떤 경우는 <가요무대>에서 불리는 더 이른 시기의 대중가요로 볼 수도 있다. 모던 클래식이라고 하겠다. 통일 전 냑방은 남부 대중음악의 주류 중 하나였는데, 통일 후에는 통일 전 남부의 서정적, 낭만적 음악을 통틀어 냑방이라 부르기도 한다. 최근 베트남 대중음악의 조류는 세계적 유행을 따르고 있어 다양한 장르가 공존한다. 한국에 ‘7080’ 노래만이 아니라 ‘뽕짝’(트로트), 포크, 힙합, 랩 등 다양한 케이팝 장르가 있듯이 말이다. 브이팝(V-Pop) 가수로는 선뚱 등이 유명하며, 포크 음악만 해도 레깟쫑리, 틴수이 등 여러 가수가 각자의 개성 넘치는 음악을 다양하게 발산하고 있다.
통일 이전 남부 대중음악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노래는 찐꽁선(Trinh Cong Son)이 작곡한 곡들이다. 찐꽁선 음악을 줄여 ‘냑찐’이라 한다. 그의 음악은 엄밀히 말하면 통일 전 남부에서 비주류에 속했으나, 통일 뒤 서정성 짙은 남부 음악을 폭넓게 냑방이라고 할 때 거기에 포함된다. 찐꽁선은 1939년 남서부 산간지대 부온마투옷에서 났다. 그곳은 베트남 커피의 주요 산지다. 그는 본관이 트어티엔후에이고, 어린 시절엔 중부지방 후에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식민당국에 저항해 투옥되기도 했다. 찐꽁선은 그 뒤 사이공으로 옮겼고, 리세 장자크 루소 고등학교에서 공부했다. 이 고등학교는 전에 리세 샤슬루-로바였는데 1958년 이렇게 교명을 바꿨다가 1970년에 레꾸이돈 고등학교가 됐다. 장자크 아노가 프랑스 식민지 시기 베트남을 소재로 만든 영화 <연인>에서 여주인공이 다니던 학교다.
베트남이 프랑스와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1945년 9월 베트남민주공화국으로 독립했지만, 프랑스가 식민지를 복구하려고 베트남으로 돌아온다. 프랑스의 재식민 지배 시도와 베트남의 저항은 1946년 말부터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으로 전개된다. 베트남 사람들은 이를 항불전쟁, 즉 프랑스에 대한 저항전쟁으로 부른다. 이 전쟁은 1954년 5월 북서부 산간지대의 디엔비엔푸에서 대격전을 치르고서야 끝났고, 7월 제네바협정으로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됐다. 제네바협정은 1956년 7월까지 전국총선거를 통해 통일국가를 세우도록 정했는데, 남부 정권이 이를 거부해 분단은 지속된다. 북부의 베트남민주공화국과 남부의 베트남공화국이 대치했다. 각각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이념으로 삼았지만, 모두 권위주의 체제였다. 남북 베트남 간, 그리고 외국이 개입한 베트남전쟁은 1964년에 열전으로 전환한다.
이런 가운데 찐꽁선은 1962년 중남부 꾸이년으로 가 사범학교에서 심리학 및 교육학을 공부했다. 그는 졸업 후 남서부 산간지대에 있는 럼동의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면서 1960~70년대에 대중가요 500여편을 작곡했다. 찐꽁선은 사랑, 인간의 운명, 반전 등을 음악에 담았다. 미국의 반전 가수 존 바에즈는 그를 베트남의 밥 딜런이라고 했다. 그는 ‘까쿡자방’(Ca khuc da vang), 직역하면 ‘황색 피부 가곡’ 앨범을 냈다.
거기에 든 ‘어머니의 유산’은 전쟁으로 점철된 베트남 역사에서 자녀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드러냈고, ‘후에, 사이공, 하노이’는 통일의 염원을 담았다. ‘아가야 자거라’ 같은 반전 가요는 전사한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절절히 그려내 남부 정권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 노래는 1970년대 초 일본의 반전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유행했다. 그는 남북 화합을 노래한 ‘큰 손을 부여잡고’를 1968년에 작곡했으나 1975년 통일을 앞두고서야 부를 수 있었다.
찐꽁선과 막내 여동생 찐빈찐. 찐(Trinh)은 가수이며 호찌민시에서 띱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찐꽁선 가족 제공
통일 이후 찐꽁선은 가족들 여러 명을 캐나다로 보내고도 베트남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중부 후에 근처에 있는 신경제지구로 4년간이나 보내졌다. 신경제지구는 남부 도시의 과밀 인구를 강제로 지방에 소개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그가 통일 전 남부에서 고위급 인사가 아니었고, 또 반전 음악가였다는 점이 참작돼 장기간 그곳에 있지는 않고 복귀할 수 있었다. 음악가로서 그에게 중요한 문제는 그의 노래가 어찌 될 것인가였다. 통일 후 그의 노래는 냑방으로 낙인찍혔고, 1990년대 후반에 가서야 조금씩 풀렸다. 통일 이후 그의 반전 가요는 불릴 필요가 없게 됐기에 이제는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노래들이 주로 불리고 있다. 이렇게 찐꽁선은 식민지, 독립, 분단, 통일, 자유주의, 사회주의로 이어지는 베트남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냈다.
찐꽁선은 2001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노래는 지금도 베트남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통일 이전 남부에서 카인리(Khanh Ly)가 찐꽁선의 노래를 주로 불렀다. 약간 허스키한 그의 목소리는 시대의 슬픔을 묻혀내기에 잘 맞았다. 하노이 출신인 카인리는 남북 분단 후 1956년 가족과 함께 남부로 내려왔다. 그는 달랏에 있다가 찐꽁선을 만나 함께 음악을 하기 위해 사이공으로 거주를 옮긴다. 그들은 사이공 문과대학, 현재 호찌민시 인문사회과학대학에서 자주 공연을 했다. 베트남이 통일될 즈음 카인리는 미국으로 이주해 갔다. 그 후 하노이 출신 홍늉(Hong Nhung)이 찐꽁선 노래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의 목소리는 북부 전통음악을 현대음악과 결합하여 낮고 부드러우면서도 깊은 감성을 파워풀하게 뿜어내는 소리라고 평가되고 있다.
이견이 있지만 홍늉은 베트남의 3대 디바 중 한 명이다. 2009년 홍늉이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산호세)에서 카인리와 손잡고 찐꽁선의 “하노이 가을을 그리워하며”를 함께 부를 때 사람들은 남북 화합을 보았다. 하노이 출신 두 여가수 카인리와 홍늉이 남부 출신 찐꽁선의 노래를 주로 불렀으니, 음악 세계는 이미 분단을 넘어서고 있었다. 개혁 이래 찐꽁선 노래가 베트남 사회에 더 널리 퍼져 여러 사람들에 의해 불리고 있다.
최근 가장 주목받는 가수는 남부 출신 호앙짱(Hoang Trang)이다. 젊은 호앙짱은 호찌민시 출신으로 풋풋한 통기타 세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제야 남부 작곡가의 음악과 남부 가수가 만난 것인가! 이렇게 냑방은 세대를 넘어 면면히 이어진다.
베트남의 대중음악 작곡가인 팜주이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위키피디아
냑방 작곡가로 팜주이(Pham Duy)도 유명하다
. 그는 반까오, 찐꽁선과 함께 현대 초기 3대 작곡가로 이름을 날렸다. 반까오와 팜주이가 1920년대 초반생이나, 찐꽁선은 1939년생이라 그들보다 젊은 세대에 속한다. 팜주이는 하노이에서 출생했고, 베트남의 명장 보응우옌잡이 선생으로 있던 탕롱 고등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문화선전대원으로서 베트민에 합류하여 항불전쟁에도 참전했으며, 베트남의 예술학교와 파리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그의 음악은 전통과 현대를 잘 결합했다고 평가된다. 그의 ‘사랑가’, ‘조린 어머니’, ‘가난한 고향’ 등은 항불전쟁 시기부터 사랑받은 곡이었다. 그러나 서정적이고 반이념적인 음악은 검열을 받았고, 그는 자유로운 음악 활동을 위해 1955년 남부로 이주했다. 그의 음악은 분단 시기 북부에서 반동 음악이 됐고 통일 이후에도 오랫동안 금지됐다. 팜주이는 나라가 통일되면서 미국으로 이주했기에 찐꽁선과는 결이 좀 달랐다. 그는 2005년에 귀환했고 그의 음악도 해금됐다.
호찌민시에 있는 라이브 뮤직 카페인 ‘소이다’. 이 카페도 코로나 바이러스를 이겨내지 못했다. 이한우 제공
베트남 대중음악의 디바 3인 중 한 명인 홍늉을 2005년 하노이에서 필자가 만났다. 이한우 제공
통일 전 남부에서 이런 올드 냑방에 취향이 없는 젊은이들은 서양 팝 음악을 부르거나 더 젊은 작곡가들의 음악을 ‘냑째’, 즉 젊은이 음악이라며 선호하기도 했다. 응우옌쭝깡(Nguyen Trung Cang)의 ‘비 오는 날 사랑에 빠져’, ‘너를 영원히 사랑해’는 지금도 여전히 인기 있는 곡들이다. 주로 젊은이들의 사랑 노래인데, 넓게는 냑방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대중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퐁짜 까냑’에 모였다. ‘퐁짜’(phong tra)는 다방, ‘까냑’(ca nhac, 歌樂)은 음악이니 곧 ‘음악다방’이다. 가볍게 술이나 음료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 곳이다. 이 ‘퐁짜 까냑’은 하노이보다 호찌민시에 더 많은데, ‘퐁짜 콩뗀’, ‘퐁짜 동자오’ 등이 잘 알려진 편이다. 최근 하노이에 찐꽁선 노래를 많이 부르는 ‘퐁짜 찐까’도 생겼다. 베트남에는 이외에도 생음악을 즐길 수 있는 라이브 뮤직 카페도 여러 곳 있다. 호찌민시 떤선녓 공항에 가까운 푸뉴언 지역에 그런 곳이 많다.
냑방을 알았으니, 베트남에 가게 되면
찐꽁선 여동생이 운영하는 ‘띱’(Tib) 레스토랑에 가보자. 호찌민시에 있는데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통일 이전부터 있었던 곳이 아니고 1990년대 초에 개업한 곳이라 좀 아쉽기는 하다. 중부 후에 음식이 맛있다. 아들 부시 대통령도 2006년 베트남 방문 때 다녀간 곳이다. 거기서 찐꽁선의 음악 한 자락이라도 귓가에 머물기를
기대해본다.
이한우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이한우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