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ㅣ나의 짠내 수집일지 <새연재>
‘퀸 빽판’ 3천원 구입 등 15년 엘피 1천여장 수집 전략
① 유행 때 숨 고르기 ② 발품 팔기 ③ 지출 한도 정하기
‘퀸 빽판’ 3천원 구입 등 15년 엘피 1천여장 수집 전략
① 유행 때 숨 고르기 ② 발품 팔기 ③ 지출 한도 정하기
4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서울풍물시장 안 초록동 LP판매점에 LP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수집은 일상의 역사를 쌓아올리는 일입니다. 남다른 심미안으로 물건을 차곡차곡 모아온 수집가들의 수집 목록이 주목받기도 하죠. 하지만 대개는 희귀품에 수백만~수천만원을 척척 쓰는 취미를 갖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평범한 수집가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지름신의 강림을 막다 보면 물건은 언젠가 주인을 찾아온다.” 15년 수집 취미를 이어온 <한겨레> 신승근 기자의 깨달음입니다. 귀한 물건을 찾아 바쁜 발걸음을 옮기는데, 한켠으로 마음 비우는 일이 어디 쉬울까요. 하지만 뜻밖의 장소, 뜻밖의 가격에 보물을 찾는 희열을 맛볼 수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의 진품명품 수집기, ‘나의 짠내 수집일지’ 연재를 시작합니다.
‘나의 해방일지’보다 ‘네버마인드’ 결국 지난 4주간 <네버마인드>를 찾아 헤맸다. 먼저 우리 동네 ‘당근’을 한달 동안 눈 빠지게 주시했다. 엘피는 없다. 너바나 시디 한장, 카세트테이프 한개 나왔을 뿐이다. “너바나, 그거 국내 라이선스반은 초반은 고사하고 재반도 찾기 힘들걸!” 지난달 26일 서울 신설동 풍물시장 2층 엘피 가게를 찾은 나에게 주인어르신은 말했다. 1층 가게도 마찬가지. “혹시 2층에 가봤어요? 너바나 라이선스, 요즘엔 어디에도 없을 텐데”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나흘 뒤, 회현지하쇼핑센터 엘피 가게들도 마찬가지. “너바나 국내 라이선스 엘피는 해외 수집가들까지 탐내는 희귀 아이템”이라며 그걸 찾는 건 헛수고라고 한다. 1991년 한국 비엠지(BMG) 뮤직이 발매한 라이선스 음반은 엘피 시대가 저물고, 시디(CD)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나온 탓에 한국 라이선스반이 세계에서 처음 찍은 초반으로 평가받기도 한다며, 구하기도 어렵지만 찾아도 12만원 이상 값을 쳐줘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달 1일 <티브이쇼 진품명품>에서 윤심덕의 미공개 에스피 음반이 소개되고 있다. 한국방송 제공
동네 재활용센터에서 발견한 퀸의 ‘라이브 매직’.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짠내 수집 비결? 걷는 만큼 구한다 물론 무작정 가격이 내려갈 때를 기다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물건이 있을 만한 길목을 찾아 발품을 팔아야 발견의 기쁨, 횡재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 짠내 수집의 두번째 원칙이다. 이미 엠제트(MZ)세대까지 엘피 수집에 동참했고, 해외 직구가 가능한 시대다. 사는 사람 파는 사람 모두 엘피의 공정가를 알 만큼 다 안다. 횡재의 꿈은 갈수록 경험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나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거주지 주변 재활용센터나 고물상을 공략했다. 서울 회현지하쇼핑센터를 포함해 전국 거의 모든 엘피 전문점은 가격표를 붙여놓고 에누리 없이 거래한다. 이런 곳에선 딱 그 가격에 걸맞은 품질의 엘피를 살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이름 좀 알려진 뮤지션의 엘피는 “살 게 아니면 손도 대지 말라”는 모욕적 언사를 듣는 일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동네 재활용센터나 고물상에선 흔치 않지만, 부지런한 만큼 행운이 찾아오기도 한다. 모두가 퀸 엘피를 열망하던 2018~2019년 그 시절, 턴테이블에 얹을 실물이 없어 안달하며 주말마다 황학동, 풍물시장, 인천 배다리마을, 동두천까지 뒤지고 다녔다. 미군이 주둔했던 곳이니 뭔가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갈증은 충족되지 않았다. 그렇게 1년여 발품 팔다 지쳐, 해외 직구로 퀸의 최고 걸작 음반으로 평가받는 <어 나이트 앳 디 오페라>와 <그레이티스트 히츠>를 국내 값 3분의 1에 샀다. 그런데 6개월 뒤 동네 재활용센터에 책꽂이를 사러 들렀다 드디어 발견했다. 변진섭, 이선희, 나나 무스쿠리의 엘피와 함께 그토록 찾던 퀸의 라이선스 엘피 <라이브 매직>(EMI계몽사반)이 책꽂이 한쪽 헌책 틈에 놓여 있었다. 가슴은 두근두근. “이거 얼마예요?” “… 뭐, 누가 이사하면서 내놔서 가져왔는데, 그냥 장당 4천원만 줘요. 누가 요즘 엘피를 듣겠어요.” 물건은 결국 이렇게 주인을 찾는 법이다. 한동안 주말에만 나타나는 서울 지하철 5호선 아차산역 인근 손수레 노점을 눈여겨본 적도 있다. 인도 한쪽에 좌판을 펼치고 낡은 손목시계나 라디오 등 고물 같지만 제법 연식 있는 잡동사니를 팔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엘피가 나오면 연락을 달라 했다. 상인은 “평일에 트럭 끌고 전국 골목을 돌며 버리는 물건을 실어 오니 가끔 엘피가 나오지만, 무슨 연락을 해? 먼저 오는 사람이 임자, 다 가져가는 거지”라고 답한다. 그 뒤 넉달 동안 매주 토·일요일 이틀은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듯 다녔다. 호감을 사기 위해 1970년대 내셔널 파나소닉 라디오도 두대나 샀다. 5만원에 산 한대는 전원도 들어오지 않는 먹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지나다 수레 위에 쌓인 엘피가 눈에 띄었다. 어디서 나왔는지 대한노래부르기중앙회, 문화공보부 등이 발주한 이른바 건전가요 엘피가 더미로 쌓여 있었다. 그 속에서 <노래는 즐거워>(힛트레코드사·1972년), <건전가요집>(서라벌레코드·1978년), <건전 생활 가요>(지구레코드·1979년) 등 6장의 희귀 엘피를 골라냈다. “그동안 오고 간 정성을 봐서 장당 3천원만 주고 가져가셔.” 이 엘피엔 쉐그린, 이씨스터, 조영남, 탑 트리오, 전석환과 고바우, 김인순, 김상희, 유준, 금과 은, 장미화, 박경애, 박경희, 김국환, 윤세원, 하수영, 선우혜경, 토끼소녀 등 197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짠내 수집의 희열은 이런 것이다. 이 맛에 족보도 없는 짠내 수집일지 작성을 멈출 수 없다.
양희은 ‘여고동창생’.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터키에서 온 관광객이 4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서울풍물시장 안 엘피 판매점 ‘라스트찬스’에서 음반을 찾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내게 온다 나는 이런 타협으로 <다시 불러보는 노래/백설희·이미자>(지구레코드 공사·1972년), <검은나비 1집―사랑한 후에>(유니버설레코드·1974년), <어니언스―편지>(유니버설레코드·1974년), <최병걸·정소녀―난 정말 몰랐었네>(신세계레코오드·1978년) 등 나름 귀한 엘피를 1천~1만원의 저렴한 가격에 사는 기쁨을 만끽했다. 이 가운데 백설희·이미자, 어니언스는 엘피 없이 빈 재킷만 남은 것을 2천~3천원에 사 제 짝도 온전히 맞췄다. 이번에도 너바나 음반을 탐색하다 양희은의 <여고동창생>(서라벌레코오드·1976년) 엘피를 덤으로 찾았다. “너바나는 없을 테지만 알아서 찾아가라”는 풍물시장 엘피 가게 주인장 말에 이리저리 뒤적이다 재킷 없는, 그러나 잔 상처 하나 없는 ‘민트급’(새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의 중고 물품) 음반을 찾아 1만원에 샀다. 양희은의 이름을 앞에 내건 이 컴필레이션(편집) 엘피엔 이필원, 허림, 윤연선, 박인희, 풍선껌, 막대들, 이주원, 하남석, 유영춘 등 이제는 전설이 된 그 시절 여러 가수의 대표곡이 담겼다. 오랜 짠내 수집으로 터득한 진리는 ‘욕심을 버리고, 지름신의 강림을 막다 보면 언젠가 돌고 돌아 원하는 엘피가 내 손에 잡히는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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