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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행·여가

낯선 곳에서 우리의 미래를 발견하는 여행

등록 2017-10-14 12:53수정 2017-10-27 16:47

[토요판] 공원국의 유목일기
① 유목의 땅으로 들어가며

거기엔 새하얀 피부가 없다
내리쬐는 직사광선 아래서
어떤 인종이든 ‘흑인’이 된다

‘거대한 전복’이 앗아가지 못한
사회의 고갱이를 간직한 사람들

그들의 땅으로 들어가는 일은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가는 여정도
문명의 대척점을 찾는 여정도 아니다
키르기스스탄 남부의 알라이 계곡 북쪽의 사리모골 마을에서 양동이를 들고 물을 길으러 가던 아이들이 수줍은 듯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다. 그곳엔 가져야만 행복해지는 물건이나 추구하는 대상은 없을지 몰라도 변덕스러운 자연과 협상하며 인간 사회의 고갱이를 간직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공원국 제공
키르기스스탄 남부의 알라이 계곡 북쪽의 사리모골 마을에서 양동이를 들고 물을 길으러 가던 아이들이 수줍은 듯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다. 그곳엔 가져야만 행복해지는 물건이나 추구하는 대상은 없을지 몰라도 변덕스러운 자연과 협상하며 인간 사회의 고갱이를 간직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공원국 제공

파도도 없는데 그 우악스러운 덩어리가 육지가 빤히 바라보이는 바다에서 뒤집히던 날, 버스에서 라디오 중계를 듣고 있었다. 그 덩어리를 몰던 사람들은 달아나고, ‘가만히 있으라’ 해서 가만히 있었던 사람들은 뒤집히는 덩어리와 함께 바다로 끌려 들어갔다. 밤이면 서러움과 치욕과 분노 때문에 불면이 찾아왔다. 그 덩어리가 과연 ‘배’였을까? 거꾸로 선 배. 어쩌면 환상이 아닐까? 2014년 4월16일 그 일이 꿈이길 바라며 잠이 들기 전 오랫동안 최면을 걸었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그러나 여지없이 아침이 찾아오면 나는 다시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가 거꾸로 서 있는 건 아닐까? 그 덩어리를 구성했던 철, 콘크리트, 플라스틱, 그 외의 모든 인공물이 모두 신기루가 아닐까?

허구도 믿으면 현실이 된다.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허구상품’이라 불렀던 화폐와 토지, 노동은 현실에서는 전혀 허구가 아니다. 우리는 화폐를 얻기 위해 노동(력)을 팔고 자기 땅이라 울타리를 둘러친다. 심지어 화폐로 가상화폐를 거래하는 이들은 ‘나는 가치를 만들어 내고 있는가’ 물어보지 않는다. 자기 땅에 남의 발길일랑 허락하고 싶지 않은 지주는, 지구상의 대지는 완전히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전체 생태계의 일부이므로 누군가가 독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자본가 누구도 노동이 인간의 전체성의 일부이므로 따로 떼어내어 구매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매한 후에는 노동자의 인격을 떼어내 쓰레기통에 내던진다. 정말 허구를 추구하며 허구를 사고팔고 있지 않는가? 그 뒤집힌 덩어리처럼 신기루가 실상을 쫓아낸 것이 아닐까?

저 사람들은 왜 바람 부는 언덕에 자리를 잡았을까? 바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일까? 파미르의 고산초원지대 언덕에 자리잡은 유목민들의 거처인 ‘유르트’. 공원국 제공
저 사람들은 왜 바람 부는 언덕에 자리를 잡았을까? 바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일까? 파미르의 고산초원지대 언덕에 자리잡은 유목민들의 거처인 ‘유르트’. 공원국 제공

쓰러져 볼 용기마저 빼앗긴 삶

우리는 매일 불만을 제기하고 불안을 호소한다. 노동자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인격의 대가로 중산층으로 가는 사다리를 오르고, 소자본가는 상시적인 파산의 위협에 시달리며 이윤 자체를 위한, 이윤 혁신 자체를 위한 혁신을 추구한다. 멈추면 바로 그 ‘4·16의 덩어리’처럼 뒤집히거나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뒤처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치면서. 그러니 가진 이든 없는 이든 자기 아이들에게 똑같이 말한다. “그런 고민 할 시간 있으면 영어 단어나 하나 더 외워!” 우리는 허구든 무엇이든 쫓을 테니 나머지(사실은 자신의 운명)는 메시아에게 맡겨두자면서. 한때는 메시아였던 누군가가 쫓겨나고 그토록 박약한 정신의 소유자임이 밝혀졌지만 또 다른 메시아를 부르면 그뿐이다. 어쨌든 무언가를 좇으며 살아야 하니까, 멈출 수 없으니까.

하지만 매번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이 우리들의 삶은 반석 위에 올라갔는가? 그사이 핵전쟁의 위협 속에 쉬지 않고 달리는 삶마저 위태로워졌다. 삶이 불안해서 무기를 사 모아 왔건만 북쪽의 누군가는 전쟁을 불사하겠다 하고, 아메리카의 누군가는 다시 불안을 무기로 바꾸라 한다. 북쪽과 아메리카의 누군가와, 전쟁 불사를 외치는 우리 사회의 일부는 결코 플라톤과 공자가 말한 바의 교양인이 아니므로, 우리의 삶은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과격한 극소수의 손에 맡겨졌다. 우리가 앞만 보고 달리는 사이 운명은 그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온종일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새로운 것을 찾고, 뭔가를 만드는 법을 배워 결국 팔기 위해 고민한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앞으로 달리지 못하면 ‘허구상품’의 시장에서마저 도태될 테니까. 곡식을 키울 땅 한 평 없다면, 월세를 받아낼 물려받은 건물이 없다면 노동력을 팔아 화폐를 모을 수밖에. 그리고 항변한다. 내 목구멍으로 쌀을 넣기 위해 얻는 화폐는 현실이지 허구가 아니지 않은가? 지하철에서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 속에서 뭔가를 끄집어낼 때 내 자리 옆에 꼬부랑 할머니가 있든 심지어 장애인이 있든 무슨 상관이랴, 생존을 향해 달려가는 중인데.

혹시, 지금 멈춰서 물어볼 시간이 아닐까? 지금 우리의 삶의 목표조차 거꾸로 선 것이 아닐까? 거꾸로 선 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만큼 지쳐버린 건 아닐까? 거꾸로 서서 달리면서 ‘너는 팔 근육이 약해, 단련이 부족해’라며 스스로 채찍질하는 건 아닐까? 정말 그렇다면 차라리 쓰러졌다 똑바로 일어나는 게 나을 테지만, 우리는 한번 쓰러져 볼 용기마저 빼앗긴 듯하다. 귀가 따갑도록 듣던, “한번 쓰러지면 못 일어나”라는 그 위협에 압도되어.

어떤 인간도 역사의 한 단계가 되기 위해, 혹은 기술의 실험 대상이 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이상국가이건 이상사회이건 상상할 권리를 지닌다. 자기 노동과 인격의 주인으로서 사회 속에서 기능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사회적인 지위를 유지하며 안정감을 누리고, 이어 자기가 누린 그 사회를 재생산할 권리가 있다. 사회적인 순환의 고리에 참여하는 인간은 호혜의 행위와 감정을 통해 서로 연결되며, ‘주는 양’에 의해 차별적인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 20세기 인류학자들은 인간은 오랜 기간 동안 그렇게 살아왔다고 주장했다. 이윤을 위해 일하지 않으며, 사회에 필요한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그리고 노동 자체의 가치 때문에 일한다고. 열심히 일하여 많이 나눠주는 사람은 사회 모든 구성원으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아무리 우리의 까마득한 조상들이 미개해 보일지라도 그들은 허구를 좇아 삶을 낭비하지는 않았다. 자주 굶었으되 날렵한 몸매를 유지했고 내일이 불안했지만 똑같이 나눠 먹었다. 그래서 그들은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았고, 아이를 낳고 낳아 결국 우리가 태어났다.

이곳의 유목민들 사이에선 은하수의 무수한 별들은 모두 하늘의 양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저녁 무렵의 양떼들. 공원국 제공
이곳의 유목민들 사이에선 은하수의 무수한 별들은 모두 하늘의 양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저녁 무렵의 양떼들. 공원국 제공

진보와 퇴보는 동시에 일어난다

내가 공부하는 학교의 기숙사에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고양이들이 있다. 힘들이지 않고 각 층의 쓰레기통을 뒤진다. 너무 짠 음식을 먹고 목이 타 괴로워하면 누군가 나타나 물을 준다. 이 문명화된 고양이들은 적선을 베풀 대상을 찾아가 괴로운 표정을 짓는 법까지 안다. 그들은 분명 ‘진보한’ 고양이이자 두뇌가 계발된 개체이므로, 언젠가 야생 고양이보다 훨씬 높은 기술을 익혀 다른 단계로 진화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담장을 뛰어오르는 근육을 자주 쓰지 않고 당연히 쥐를 잡을 줄도 모른다. 그들은 반려 고양이가 아니지만 인간이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으므로 인간 근처를 떠나지 않는다. 그들은 기술을 익히면서 육체의 능력과 정신적인 독립성을 잃었다.

그러므로 진보와 퇴보는 언제나 동시에 일어난다. 진보는 명시적이고 크지만 부분적이며, 퇴보는 작더라도 전체적이다. 커다란 기술 진보 한 조각을 얻음으로써 육체와 영혼의 모든 영역에서 세세한 퇴보를 대가로 치른다. 예컨대 우리는 물이 새지 않는 자기(瓷器)에 음식을 담아 먹지만 물이 조금 새는 도기(陶器)를 직접 만들지는 못하고 동물의 내장으로 담을 것을 만들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만약 5천년 전 어느 날 우리가 사막 언저리에 떨어진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계단 한 칸에 불과할까? 혹시 진보 역시 허상이 아닐까?

인류의 진보를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나 자신과 우리 사회가 타인과 그들의 사회에 비해 진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사실이 아닐 수 있다. 몇 가지 진보를 누리는 대가로 인간의 전체성을 내줬을지 모른다. 그들은 스마트폰이 없어도 태연한데 당신은 불안하다면, 당신은 무시무시한 기능을 가진 도구를 가졌지만 정서적인 전체성은 그들보다 열악하다. 사회는 기술의 수준과 기물의 품질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복합적인 존재다. 사회의 가치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은 구성원들이 사회를 통해 각자의 전체성을 보존할 수 있는가 여부가 아닐까?

나, 내 것, 지금, 그리고 여기에 지나친 가중치를 부여하는 순간, 우리는 지구 생태계와 자연사와 인류의 전체성을 목격할 수 없다. 이 전체성을 놓치는 순간 우리는 거대한 전복(顚覆)의 함정에 빨려든다. 눈 감고 메시아에게 기도한다고 함정을 피할 수는 없다. 우리는 앞에 놓인 함정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하고, 함정을 보기 위해 ‘나’와 ‘내 것’을 잠시나마 벗어나야 한다. 곧장 뒤집힐 운명의 덩어리, 배라고 부를 수 없는 것에 올라타고 있는지 물어보지 않고 영어 단어를 하나 더 외운다고 해서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불안은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환상을 던지고, 그 환상을 미끼로 다시 자기 덩치를 키운다. 불안이라는 파괴자는 모든 개인의 몸과 정신을 무차별적으로 억압하고 ‘실패자’들을 자살로 밀어넣으면서도 책임을 지기는커녕 제 권력만 더 키운다. 이 불안을 직시하기 위해 ‘세상이 거꾸로 서 있는 것 아닐까, 우리의 모습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잠시 떠나야 하지 않을까?

탐구의 길은 이제 갓 열렸다. 거대한 전복이 무엇인지 짐작만 할 뿐이었지만 여행이 깊어갈수록 전복이 실존함을 차츰 실감한다. 공원국 제공
탐구의 길은 이제 갓 열렸다. 거대한 전복이 무엇인지 짐작만 할 뿐이었지만 여행이 깊어갈수록 전복이 실존함을 차츰 실감한다. 공원국 제공

새로 구성해야 할 삶을 찾아가는 길

나는 우리의 도시 문명으로부터 적당히 떨어진 파미르의 고산초원과 북극해 일대의 극한지로 떠나기로 했다. 그곳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행복의 조건, 즉 가져야만 행복해지는 물건이나 추구하는 대상은 하나도 없다. 거기엔 새하얀 피부가 없다. 내리쬐는 직사광선 아래서 어떤 인종이든 ‘흑인’이 된다. 그곳에는 안락의자나 침대도 없고, 아늑한 거실과 샤워장도 없으며, 하늘하늘한 옷과 멋진 자동차도 없고, 밤을 밝히는 밝은 조명도 없다. 그곳에는 여름이면 40도의 일교차, 겨울이면 영하 40도의 추위, 자갈을 날리는 마른바람과 털 달린 짐승을 얼리는 눈 폭풍, 말과 소를 휩쓸고 내려가는 격류, 그리고 순수하게 깜깜한 밤이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태고부터 인간과 짐승에게 물길을 만들어주는 빙하와 풀밭,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간에게 대들지 않는 양, 사람 둘을 태우고 산비탈을 뛰어오르는 말, 황소보다 억센 당나귀, 눈 위를 떠다니는 조각배 같은 순록, 하늘을 가리는 타이가(침엽수림), 그리고 흐린 날조차 밤을 수놓는 은하수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 전체를 가슴과 몸으로 받아내야 하기에 동물의 한 종으로서의 전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변덕스러운 자연과 언제나 협상해야 하기에 유리처럼 부서지기 쉬운 섬세한 문화를 끈질기게 간수하고 전하며, 아직까지 ‘거대한 전복’이 앗아가지 못한 사회의 고갱이를 간직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들의 땅으로 들어가는 일은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가는 여정도 아니요 현대 문명의 대척점을 찾아가는 여정도 아니다. 지구상의 인간 사회란 거의 한두 가지 차이와 수천 가지 공통점을 가진 지극히 비슷한 공동체이므로.

공통점을 기반으로 질적인 차이를 찾는 것이 인류학자의 사명이다. 낙원을 찬양하거나 야만인을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새로 구성해야 할 삶을 찾아가는 일이다. 탐구의 길은 이제 갓 열렸다. 나 또한 현재 거대한 전복이 무엇인지도 짐작만 할 뿐이었지만 여행이 깊어갈수록 전복이 실존함을 차츰 실감한다. 빙하 아래 보이지 않는 곳과 빙하 위에 드리운 은하수 어딘가에, 그리고 초원을 거니는 짐승과 사람들 사이에서 전복되지 않은 새로운 진보의 어렴풋한 상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낯선 곳에서 우리의 미래를 발견하기 위한 여행이다.

공원국 작가/탐험가/역사·인류학 연구자. 동양사(학사), 중국경제(석사)를 공부했고 지금은 유목인류학(박사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2017년 현재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목축 지대에서 생활하며 현장조사를 수행 중이다. <춘추전국이야기(1~11)>, <여행하는 인문학자> 등을 쓰고 <중국의 서진>, <말, 바퀴, 언어> 등을 옮겼다. 짐승에 기대어 옮겨 다니는 사람들과 함께한 경험을 통해 새로운 격조의 삶을 모색하는 글을 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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