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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행·여가

왕초보 김소민 기자 보드 강습받다

등록 2006-02-01 17:30수정 2006-02-02 00:57

팔·다리는 ‘자치정부’ 온종일 허우적 꽈당
스포츠가 싫다. 내겐 열등감의 원천이다. 이러다 죽겠다 싶을 정도로 달려도 100m, 24초다. 팔, 다리는 거의 자치정부다. ‘우릴 내버려둬요.’ 남 부러워하기보다는 비아냥거리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고 믿기에, 이를 테면 스노보드 타기에 대해서는 ‘왜 실없이 판 대기에 두 발 묶고 비탈길을 내려오나’라고 코웃음 친다.

근육 비율 제로에 도전하는 몸, 얄팍한 지갑, 스키도 못 타는 내가 보드를 배우기로 한 까닭은 오롯이 혼자 놀기 쓸쓸해서다. 한줌인 친구들이 스키장으로 떠난 주말에 텔레비전 채널을 한없이 돌리다 보면 ‘왜 사나’ 같은 뜬금없는 질문이 엄습해온다. 익숙함에 눌러앉아있으면 사는 게 맹물 같을 때가 있다.

‘이렇게 지겹게 사느니 좌절이라도 해 보겠어’라고 떨쳐 일어났건만, 결심의 묘미는 무너짐과 회의에 있다. 지난달 21일 강원도 횡성 현대 성우리조트로 가는 버스를 타겠다고 새벽 5시에 주섬주섬 일어날 때부터 ‘자발적으로 좌절하느니 지겹게 살겠어’라는 생각이 기어 올라왔다. 어떻게 된 게 이 스포츠는 준비 과정부터 스포츠였던 것이다. 보드 신발 신는 것부터 손가락이 빨개지도록 힘을 줘야 한다.

남들 다 하는 거 나라고 못하겠나? 못할 수도 있다. 미끄러져 내려오기는 커녕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강사는 스스로 일어섰다 앉았다 반복하며 “이게 왜 안 될까” 의아해했다. “다리에 힘 줬어요?” 아마 애를 가졌다면 애를 낳았을 것이다. 누구나 자기 조건 안에서 생각하니, 노력은 할 수 있겠지만 완벽하게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탄탄한 근육질 다리를 가졌고 운동은 늘 잘 해왔을 20살 젊은 그는 죽었다 깨나도 눈밭에 하염없이 앉아 있는 내 열등감을 모를 거다. 그래서 어찌됐든 일어서는 건 혼자 감당해야 한다.

이게 왜 안될까?

보드 타기의 기본자세는 기마자세다. 두 다리를 엉거주춤 구부리고 등은 꼿꼿이 편다. 비탈진 면에 보드의 옆 선을 박은 뒤 몸을 수직으로 낮췄다 높였다 하며 속도를 조절한다. 몸은 보수적이다. 경사면에 서면 머리는 공포에 저당 잡히고 조건 반사만 날뛴다. 팔은 허우적거리고 몸 전체가 앞으로 쏠리는데 그러면 바로 자빠진다. “붙잡아줘요” “놓지 마세요”…. 엎어져 처박힌 나를 끄집어 내랴, 일으켜 세우랴 힘 빠진 그는 “오늘은 도대체 왜 이렇게 더운 거야”라며 날씨 탓을 했다.



스포츠 배우기는 익숙한 관계를 깨는 것과 비슷하다. 스노보드 타기도 경사면에서 속도가 붙을 때 나타나는 몸의 관성을 벗어나 보는 것이다. 첫 날, 눈 덮인 비탈길과의 만남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결국 “돈이 아깝지도 않느냐”라는 강사의 꾸지람을 뒤로 한 채 보드를 매고 걸어 내려왔다. 등산을 한 셈이다.

사람과도 경사면과도 새로운 관계를 맺는 건 두렵고 힘든 일이다. 현재 상태가 웬만큼 고통스럽지 않으면 자기가 아는 방식에 안주하게 된다. 하지만 반짝이는 희열의 순간은 익숙함에 생긴 균열로 새어 들어온다. 밤새 끙끙 앓고 이튿 날 친구들에게 끌려 슬로프에 올라간 뒤에도 연방 엎어치기 매치기 당했는데, 순간 마치 계단을 오르듯 단계를 넘어 나는 비질비질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걷는 것보다 느릴지라도, 좀 과장하자면, 경계 밖의 세계를 엿보듯 낯설고 불안한 희열에 코끝이 짜릿했다.

첫날은…등산을 한 셈

앞으로 내려오기가 되면 뒤로 내려오는 걸 배운다. 방법은 똑같은데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두려움은 배가 된다. 이후 옆으로 왔다갔다 하는 낙엽 자세가 기다리고 있다. 돌기까지 되면 보드 타기의 기본은 다져진 것이지만 엉성한 기마자세로 내려오는 것만으로도 유레카를 외칠 만큼 감격한 터라 거기까지는 꿈도 안 꿨다.

희한하게도 몸은 시선에 지배된다. 가고픈 곳을 멀리 응시하면 몸 전체가 그쪽으로 따라간다. 발 끝을 쳐다봤다간 후들후들 주저앉게 된다. 흔들릴수록 꼬일수록 시선은 멀리 고정할 것. 그러면 뒤뚱거렸던 몸이 저절로 균형을 잡는다.

오 오 오…유레카

거창하게 말하자면, 스포츠엔 일종의 잠언이 숨어 있는 듯했다. 나처럼 눈밭에서 서 있는 시간보다 앉아 있는 시간이 길다 보면 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 속에 왔다갔다 한다. 그러다가 너무 많은 삶의 진실을 한꺼번에 깨달아 소화불량에 걸릴지 모르기 때문에 또 보드를 타러 가진 않을 듯하다. 무엇보다 발을 묶고 벌 받을 때나 취하던 기마자세로 비탈길을 내려오는 건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니다. 하지만 한번쯤 ‘자기답지 않은’ 경험은 확실히 깨어있게 한다. 특히 열등감을 망치질 해보거나 껴안는 과정은 더욱 그렇다.

참고로 두 사람이 2시간 강습받는 데 각각 5만원, 리프트 값은 주간 하루 3만원 정도, 보드 대여 값은 1만6천원, 숙박비는 한 사람당 1만원이 들었다. (4만원짜리 방을 스키용품 가게를 통해 구했는데 방음은 절대로 안 됐다.)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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