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은 올해 고속도로 휴게소 12곳에 350kW급 충전기 48기 등 모두 72기를 설치했다. 현대EV스테이션 전경. 현대차 제공
“현대자동차그룹은 초고속 충전인프라 20개소 120기 구축한다.”(지난 14일 현대차그룹 보도자료)
“(올해 국토부가 설치하는 충전기에) 초급속 충전기가 100기 이상 포함될 예정이다.”(지난 14일 국토교통부 보도자료)
전기차 충전 인프라의 보급 열기가 한창이다. 주무 부처인 환경부뿐 아니라 국토부나 완성차 업계도 앞다퉈 보도자료를 내고 충전소 설치 계획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이들 자료만 봐서는 어떤 충전기가 얼마나 많이 설치되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숫자가 실제와 다르게 부풀려진 탓이다. 차종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충전기가 다르지만 그런 점에 대한 설명도 빠져 있다. 충전 인프라는 전기차 구매를 고려하는 소비자 입장에서 가장 궁금한 점 중 하나인데도 왜곡된 정보만 판치고 있는 셈이다. 올해 충전기 설치 현황을 하나하나 뜯어봤다.
이달 환경부와 국토부, 현대차그룹은 전기차 충전기 보급 계획을 각각 발표했다. 특히 고속도로 상의 350kW급 초급속 충전기 설치 계획이 관심을 모았다. 전기차 운전자 입장에서는 장거리 주행 여부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부 부처가 나서서 거짓 정보를 확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국토부는 지난 14일 낸 보도자료에서 “올해 고속도로 휴게소 12곳에 초급속 충전기 6기씩 총 72기를 설치했다. E-GMP 기반의 차종은 18분 내에 80% 충전이 가능한 것이 특징”이라고 밝혔다. 이는 현대차그룹이 설치한 충전기를 가리키는데, 실제 350kW급 충전기는 72기가 아닌 48기에 그친다. 각 충전소에서 6기 중 4기만 350kW 출력이 가능하고, 나머지 2기는 100kW로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이들 충전기에서는 “18분 내에 80% 충전”도 당연히 불가능하다.
아직까지 초급속 충전을 규정하는 구체적인 기준이 없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아예 보도자료에 ‘초급속’이 아닌 ‘초고속’이란 표현을 쓰며 혼란을 더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고속도로 72기, 도심 48기 등 초고속 충전기 120기를 설치한다고 밝혀왔지만, 이 중 40기는 100kW급이 될 전망이다. 주무 부처인 환경부에서 일관되게 50∼200kW급을 ‘급속 충전기’라고 지칭해온 점을 감안하면 문제의 소지가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100kW급 충전기에 ‘초급속’ ‘초고속’이란 표현을 쓰는 것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각 부처 자료에 다른 부처의 숫자를 중복 집계해놓은 경우도 있다. 국토부가 올해 추가하겠다고 밝힌 100기 중 일부는 환경부에서 직접 설치할 충전기를 가리킨다고 한다. 국토부 관계자는 “현대차에서 설치한 72기와 환경부가 설치할 32기를 합산해 100기 이상이라고 표현한 것”이라며 “환경부에서 같은 내용으로 이미 보도자료를 냈다고는 들었다”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올해 설치되는 350kW급 충전기는 이미 설치 완료된 것을 포함해 현대차그룹 총 80기, 환경부 32기 등 112기가 될 전망이다. 지난 1월 개소한 `현대 스테이션 EV 강동'은 제외한 숫자다. 이밖에 민간 충전 사업자들이 초급속 충전소를 설치할 가능성도 있다. 충전 사업자에 충전기 구축 비용을 지원하는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초급속의 경우 설치 비용이 수억원인 만큼 (보조금 지원 건수가) 많지는 않을 전망”이라고 말했다.‘
일부 운전자들에게는 또다른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다. 테슬라 운전자들은 초급속 충전소를 이용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 테슬라가 국제 표준이 아닌 충전기를 쓰는 탓에 일어난 불가피한 결과라는 게 환경부와 현대차그룹 쪽 얘기다. 이들의 설명은 100% 진실일까.
먼저 급속 충전소의 현황을 알아보자. 전기차 급속 충전의 경우 국제표준화기구(ISO)에서 DC콤보1과 차데모, AC3상 등 3가지를 표준으로 인정하고 있다. 국가기술표준원은 2018년 이 중 DC콤보1을 단일 표준으로 통일했지만, 최근까지도 대부분의 급속 충전소는 3가지 충전기를 모두 구비해왔다. 급격한 변화로 인해 운전자들이 불편을 겪을 수 있다는 이유다.
반면 테슬라는 국제 표준에 없는 충전기 ‘슈퍼차저’를 쓴다. 슈퍼차저에서 다른 브랜드의 차량을 충전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테슬라 운전자들은 이제까지 정부나 민간 사업자가 설치한 충전소를 모두 이용할 수 있었다. 테슬라 운전자들을 위한 차데모 어댑터가 시중에 출시돼 있기 때문이다.
초급속 충전소의 경우 이야기가 달라진다. 350kW급 초급속 충전기는 대부분 올해 아이오닉5를 출시한 현대차그룹 주도로 설치되고 있는데, DC콤보1 충전기로 단일화돼 있다. 세계적으로도 DC콤보1 방식이 대세인 점을 고려했다고 한다. 테슬라도 이런 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테슬라코리아는 올해 중에 KC인증을 받아 DC콤보1 어댑터를 출시할 계획이다.
그러나 어댑터가 출시된 후에도 테슬라 운전자들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현대차그룹이 자사 충전소에서 해당 어댑터 사용을 허용하지 않을 방침이기 때문이다. 최근 현대차그룹은 테슬라코리아의 어댑터가 인증을 받지 않아 허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인증을 받으면 그때 여러 전략적 측면에서 검토를 하게 될 것 같다”고만 말했다.
환경부가 직접 설치하는 초급속 충전기 32기도 DC콤보1으로 통일된다. 환경부 관계자는 “급속 충전의 표준이 DC콤보1인 점을 고려했다”며 “(테슬라의 DC콤보1 어댑터 허용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결정된 게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정부의 이런 계획에 명확한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초급속 충전만 놓고 보면 아직 국내 표준은 물론 국제 표준도 없다. 국제표준화기구는 내년 초에 표준을 채택할 전망이며, 국가기술표준원도 국제 표준이 결정된 후에 조치를 취할 계획이다. 국가기술표준원 관계자는 “초급속은 표준이 없기 때문에 DC콤보1도 표준이 아니며 KC인증이 없기는 마찬가지”라며 “내년까지는 애매한 상황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테슬라의 충전 시설 ‘수퍼 차저’는 국제 표준과는 거리가 있다. 테슬라 제공
전기차 구매를 고려하는 소비자들 입장에서는 불확실성만 커지고 있는 모양새다. 특히 완성차 업계의 충전기 표준 싸움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어서 우려가 높다. 대다수 완성차 업체들이 DC콤보1의 범용성을 택한 반면, 테슬라는 국제 표준이 아닌 충전 시스템을 고집하고 있다. 슈퍼차저를 통해 다른 전기차와는 차별화된 충전 경험을 제공해 매니아 고객층을 공략한다는 전략이다.
각국 정부가 전기차 대중화를 추진하는 목적이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역설적인 현실이기도 하다. 지난해 1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는 전자제품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스마트폰과 노트북 등 전자기기의 충전기를 한 가지로 통일하라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지난 10여년간 미국 애플의 반대로 지지부진했던 충전기 표준 통일을 다시 추진하는 셈이다. C타입 단자를 쓰는 안드로이드 스마트폰과 달리 애플은 라이트닝 8핀을 사용한다. 충전기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 집행위는 “매년 전세계에서 한 사람당 6㎏ 이상의 전자제품 쓰레기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이재연 기자
ja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