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스지(ESG) 바람이 거세다.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의 책임을 회피하는 기업은 앞으로 글로벌 금융자본의 선택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커졌다. 경영 환경이 급변하면서 기업들의 발등엔 불이 떨어졌다. 이에스지는 측정 지표나 평가 기관에 따라 큰 편차를 보이고 일부 기업의 홍보 수단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이에스지가 생존을 위한 뉴노멀이 되어가는 시대, 정부와 기업, 시민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은 ‘이에스지 쟁점과 과제’를 짚는 기획시리즈 마지막 순서로 송경용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 이사장,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남재인 에스케이(SK) 소셜밸류(SV)위원회 부사장의 좌담회를 마련했다. 성공회 신부이기도 한 송 이사장은 지난 40년 동안 나눔을 실천하며 사회적 가치를 일깨워왔으며, 국내 의결권 자문과 컨설팅을 해온 류 대표는 일찍이 이에스지의 중요성을 간파한 이 분야 전문가로 꼽힌다. 남 부사장은 국내 기업 중 이에스지 경영에 한발 앞선 것으로 평가받는 에스케이그룹의 관련 전략을 맡고 있다. 좌담은 지난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3층 회의실에서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 사회로 진행됐다.
지난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주최로 열린 이에스지(ESG) 전문가 좌담회를 앞두고 참석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송경용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 이사장, 남재인 에스케이(SK) 부사장,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사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은 한달 동안 세차례에 걸쳐 최근 들어 가장 뜨거운 주제인 이에스지의 현황과 과제를 살펴봤다. 이번 좌담으로 기획시리즈를 마무리 지으려 한다. 먼저 이에스지 열풍의 배경을 짚고 가자.
류영재 근인과 원인이 있는 거 같다. 원인이라면 1970년대 초 ‘로마클럽’에서 성장의 한계와 지구자원, 환경에 대한 경고가 있었고 이후 환경과 개발에 관한 ‘리우 선언’, ‘교토 의정서’ 등이 잇따랐다. 또 한 축은 동구권 몰락과 신자유주의의 등장으로 양극화가 심화하고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새로운 자본주의에 대한 모색이 있었다. 이에스지는 유럽 중심으로 지난 20년에 걸쳐 발전한 개념인데 조 바이든이 미국 대통령이 되면서 트리거(촉발)됐다고 볼 수 있다.
남재인 큰 흐름은 기업을 둘러싼 이해관계자들이 원한다는 것이고, 기업은 바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근간은 지속가능 경영이라고 생각한다. 준비가 된 기업은 쉽게 적응을 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기업은 충격일 걸로 본다.
송경용 지속가능보다 생존이 더 솔직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국제사회가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우리 기업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이제 새로운 방식의 투자가 생겨나고 국제기준이 달라졌다. 바이든의 등장으로 현실의 문제가 됐다. 계기가 어떻든 함께 고민하고 대처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겠나.
사회 기업마다 ‘이에스지 위원회’를 설치하고 목표를 세워 ‘이에스지 경영’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변화의 가장 큰 동인은 무엇으로 봐야 하나?
남재인 에스케이에 한정한다면 정부, 고객, 사회, 엠제트(MZ) 세대, 투자자들…. 저희 쪽에선 ‘이해관계자’라고 표현하는데 이들과 소통이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건 이해관계자들이 원한다는 것이다.
류영재 투자를 주도하는 연기금과 펀드 등의 영향을 받아온 외국에 비해 우리나라는 독특한 발전 경로를 보인다. 특히 언론의 관심이 굉장히 높다. 오너나 최고경영자(CEO)들이 언론에 어떻게 보도되는지 중요하게 여긴다. 제가 사외이사로 있는 상장사의 경우 유럽 회사들과 거래 중인데 “이에스지 안 하면 내년부터 거래 안 한다”고 통보 올 정도다. 이런 게 모두 동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회 이에스지 경영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지표에 맞춰 성과를 보여주기보다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기 위해 사업과 조직을 바꿔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송경용 기업의 속성은 생존과 이익 추구다. 아무리 좋은 철학을 갖고 있어도 이익에 위협이 된다면 못 한다. 너무 급하게 기업을 몰아쳐선 안 된다. 사회적 환경을 고려한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시민사회와 노동이 참여하는 거버넌스 구조가 필요하다.
류영재 성과 위주로 경영하다 친환경, 이에스지, 사람 중심으로 가려면 패러다임, 체계, 문화, 철학을 바꿔야 한다.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고 고통이 동반된다.
사회 당위는 느끼지만 현실은 따라주지 않으니 조금이라도 좋게 보이고 싶은 욕심에 ‘그린 워싱’(위장 환경주의) 유혹에 빠지는 것 아닌가?
남재인 이에스지 핵심은 비즈니스 모델을 찾는 것, 달리 말하면 혁신이라고 생각한다. 국내에서 에스케이가 이에스지 공부를 조금 먼저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내부에선 이에스지를 ‘착한 경영’이라고 오해를 한다. 저는 이에스지를 이해관계자들이 원하는 비즈니스 모델로 바꾸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는 건 시간이 참 오래 걸리고 리소스가 많이 들어간다.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업 입장에선 생존과 연결된 문제가 맞다. 사회의 관심이 높고 또 포커스를 맞추니 우리도 이런 걸 하고 있다고 알려야 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에스지 워싱, 그린 워싱은 금방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조금만 지나면 쭉정이는 걸러진다.
류영재 기업들이 워싱하고 싶어도 하기 어려운 상태로 가고 있다. 엠제트 세대는 공정성, 에코틱, 평등, 포용성 등 가치 체계가 다르다. 조직 내에서 소비자로서, 동학개미로서도 있기 때문에 기업이 감시를 당한다. 워싱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롱터미즘’(장기주의)이다. 전세계 자산운용자들이 부러워하고 벤치마킹하는 캐나다 국민연금은 2006~2007년도에 개혁을 했는데, 가장 먼저 내세운 것이 롱텀을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1년 수익률이 마이너스라고 난리 피우면 긴 호흡으로 투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지난 12년 동안 연평균 수익률이 11%나 됐다.
‘장기주의 문화’ 캠페인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회 장기적인 관점에서 성과를 포장하려 하지 않고 내부의 시스템을 바꿔나가는 노력들이 중요하다는 말로 이해된다.
송경용 인류는 큰 전환의 기로에 서 있다. ‘정부, 기업, 시민이 어떤 구조를 만들고 역할을 할 것이냐’라는 관점에서 논의가 필요할 때다. 기업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건강한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국가의 역할은 커져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기업·국가·시민·노동의 각자 역할이 정립돼야 하고 네 분야가 사회적 협력체계를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
사회 기후위기로 인한 환경 문제가 부각되면서 상대적으로 에스(사회책임)·지(지배구조)는 핵심에서 비켜나 있는 듯하다. 예컨대 재벌의 불투명한 지배구조는 여전하고 쿠팡 등 유니콘 기업의 노동환경은 열악한데 어떻게 봐야 할까?
남재인 엠제트-기성세대 갈등이 기업 내부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다양성, 형평성, 공정성과 연관이 있다. 이해관계자 쪽으로 넓히면 협력사, 협력사의 협력사들, 지역사회와 공존할 수 있는지의 문제다. 협력업체들이 만들어내는 탄소도 다 같이 줄여야 한다. 에스란 결국엔 기업 혼자만이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서로가 함께, 균형감 있게 풀어가야 한다.
류영재 핵심에서 비켜나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이에스지라는 프레임 자체가 서구 유럽 중심에서 만든 것이다. 유럽은 주요 변화와 이슈를 글로벌 담론으로 만들어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 재무분석 방법 같은 건 거기서 가져올 수 있겠지만 사회적 책임 같은 이슈는 다르다.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맥락에 맞게 만들어야 한다.
사회 기업들은 평가 지표들이 다 달라서 어떤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표준화된 지표 체계가 없기 때문인가?
남재인 에스케이그룹 안에서 평가해봐도 산업군마다 다르다. 일괄적으로 적용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평가기관마다 기준이 다르지만 공통된 항목은 비슷하다. 지표는 기업의 가이드라인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표를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성적이 돼선 안 되고 지표를 따라가며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류영재 이에스지 정보공개와 관련된 가이드라인은 필요하다. 표준화 작업도 필요하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다. 다양한 평가기관과 다양한 생각을 가진 투자자들이 있다. 중요한 건 평가기관의 독립성과 전문성이 아니겠는가? 정부도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시장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이런 게 잘 작동하면 워싱 문제는 상당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 국제적으로 보면 그런 것들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인 것 같다. 글로벌 금융시장에선 투자 지표가 투자의 기준이 되는 건데, 이(환경)와 달리 에스와 지는 한국적 특성이 강하다고 했다. 한국적인 상황을 어필해야 하는 건지?
류영재 그게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고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사다리 걷어차기 비슷한 게 된다. 그들의 기준으로, 예컨대 유럽의 가치관, 관점으로 세팅이 되어버리고 거기에 맞추게 된다. 글로벌 이니셔티브를 쥐려면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송경용 문제는 우리가 주장하는 게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일 것이다. 한국적 특수성을 이야기했지만 나라마다 특수성이 있는데 이것이 지향하는 가치와 해결하는 방식이 보편적일 수 있느냐? 보편적 설득력을 가지면 된다고 본다. 유럽에선 노동당이든 보수당이든 건들 수 없는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생명, 민주주의, 인권이다. 우리도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류영재 우리나라 상장회사 주주의 35% 정도가 외국인 투자자들이다. 주주총회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은 아이에스에스(ISS, 글로벌 의결권 자문기관) 같은 회사들의 가이드라인에 근거해 안건 분석을 한다. 한국적 특수성은 고려하지 않는다. 이들의 찬반 권고에 외국인 투자자들은 영향을 받는다. 이에스지 평가도 평가지만 자본시장이 ‘아이에스에스 식민화’가 될지도 모른다. 금융지주 같은 경우 70%가 외국인 투자자다. 아이에스에스를 설득하지 못하면 중요 안건을 통과 못 시킨다. 심각한 문제다.
사회 그런 일들은 누가 견제해야 하나?
송경용 누가 국제기준을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질서가 바뀐다. 이에스지 가이드라인도 마찬가지다. 공공, 기업, 민간이 상황을 공유하고 투자도 해야 한다. 제3세계까지 고려한다면 한국이 대전환의 시기에 세계무대에서 책임 있고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류영재 이에스지위원회 만들고 홍보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얼마만큼 리소스를 배분하고 투자해야 하는가이다.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예산을 세웠나 들여다보면 부끄럽다. 이에스지 예산? 거의 없다.
사회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세 도입을 둘러싼 논란은 어떻게 봐야 하나? 지금까지 온실가스를 다량 배출해온 국가는 산업화를 먼저 이룬 선진국가들이라 ‘사다리 걷어차기’ 논란이 있는데?
류영재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고 있다. 피할 수 없는 길이라면 즐겨야 한다. 어차피 할 거라면, 리더십을 발휘해 앞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앞으로 20년간 시대 화두는 ‘넷제로’가 될 것이다. 기회라는 부분에서 더 생각해야 한다.
남재인 기업 입장에서 답은 정해져 있다. 당연히 능동적으로 접근하고 기회를 찾는 게 숙명이다. 수많은 기업들이 여러 종류의 다양한 리스크에 직면해 있고 이를 뚫고 나간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탄소세, 플라스틱세 등 앞에서 대기업들도 휘청하는데 중소 규모의 협력사들은 더 큰 충격이다. 이에스지로 전환하려면 우리 사회가 다 함께 노력해야 한다. 특히
대기업·중소기업·정부 3자가 맞아 들어가야 한다.
사회 기업이 제대로 할 수 있게 광의의 거버넌스, 그런 생태계를 만들 수 있을지? 시민사회는 기업과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가?
남재인 우리는 ‘소통’을 많이 이야기한다. 비즈니스 측면에서 바라봐도 이해관계자들의 니즈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게 간섭이다? 글쎄.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표명하고 알려주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송경용 그동안 성장주의 패러다임에서 무시당했던 사람의 가치, 생명의 존엄성, 안전의 소중함이 좀 더 강조되고 이런 것들이 이에스지의 가치나 방향이 되면 좋겠다. 대전환의 시기, 어떻게 정의로운 사회로의 전환을 이룰 것인가? 이런 관점에서 시민사회도 기업도 상호 이해하고 존중해서 이에스지의 구체적인 목표 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 또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다양한 층위의 논의와 협의의 틀을 만들어가야 한다.
홍대선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어젠다센터장
hongds@hani.co.kr, 녹취 김슬아 보조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