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경제동반자협정(DEPA) 협상에 나선 싱가포르(가운데), 칠레(왼쪽), 뉴질랜드(오른쪽) 대표들이 2020년 1월21일 실질적 합의에 도달한 뒤 공동성명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 칠레 외교부 누리집
글로벌 디지털무역의 규칙과 표준을 선점하기 위한 각국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디지털무역은 전자상거래를 의미하는 정도였지만 이제 애플리케이션(앱), 플랫폼, 클라우드 컴퓨팅 서비스, 영화·음악·교육 콘텐츠, 데이터 등이 모두 교역 대상으로 떠올랐다. 기존 무역 규범으로는 담아내기 어려운 수많은 영역이 새로 등장한 것이다. 해결해야 할 과제도 그만큼 많아졌다. 하지만 글로벌 전체로 합의한 디지털무역의 규칙은 아직 없다. 무법지대, 혹은 무주공산인 셈이다.
디지털 규범이 국가별·지역별로 파편화되고 분절된 상황에서 인구 590만 명의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역할이 도드라져 보인다. 최근 미국도 가입을 저울질한다는 보도가 나온 디지털경제동반자협정(DEPA·Digital Economy Partnership Agreement)이 특히 주목받고 있다. DEPA는 싱가포르·뉴질랜드·칠레 3국이 디지털경제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맺은 협정이다. 2019년 5월17일 협상을 시작해 6개월 만인 2020년 1월21일 실질 타결했으며, 그해 6월20일 서명을 거쳐 2021년 1월7일 발효됐다.
DEPA가 디지털무역의 이정표로 불리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형식적 측면에서 보면 디지털경제 분야만 다루는 협정이라는 의미가 있다.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 등은 디지털무역을 자유무역협정(FTA) 내의 한 챕터 형식으로만 다뤘다. 또한 DEPA는 최초의 복수국가 간 디지털무역 협정이다. 미국과 일본, 싱가포르와 오스트레일리아가 각각 양자 디지털 협정을 맺기는 했지만 DEPA는 앞으로 회원국을 확대할 수 있게 개방형 플랫폼을 지향한다.
내용으로 보면 전자상거래 같은 무역협정 성격을 넘어 인공지능(AI) 등 새로 등장하는 기술에 대한 윤리적 원칙과 표준에 대한 국가 간 협력 증진을 내세운다. 대기업 중심 전통적 무역거래에서 벗어나 전자상거래의 상호운용성을 증진해 중소기업들의 디지털무역 참여를 지원한다는 목표도 내걸었다. 데이터 이전 자유, 로컬 서버 금지 등 디지털무역의 쟁점이 ‘한 상 차림’ 형태의 패키지가 아니라 뷔페식으로 ‘모듈’화돼 있다. 각국이 처한 국내 사정과 준비 수준에 따라 다양하게 메뉴를 고를 수 있다. 다만 협력 규정이 많아 구속력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디지털경제의 모든 문제를 포괄하고 규범화 방식이 혁신적이어서 많은 국가가 DEPA에 발을 담그려 한다. 코로나19로 디지털경제로의 전환이 빨라져서 새 규범의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한국도 뉴질랜드, 싱가포르, 칠레와 기술 협의를 통해 가입 절차 등을 논의하고 있다. 영국과 캐나다도 공식 가입 협의를 시작했다. 유엔에서 실시한 2020년 전자정부발전지수 평가에서 한국 2위, 싱가포르 11위, 뉴질랜드 8위, 영국 7위, 캐나다 28위, 칠레 34위로 DEPA에 참여했거나 참여하려는 대부분 국가가 디지털기술 분야 상위권에 올라 있다.
베트남의 움직임도 DEPA에 변수가 될 수 있다. 미 외교전문 사이트 <디플로매트>는 최근 “베트남과 싱가포르가 6월21일 디지털 파트너십을 위한 기술워킹그룹을 설치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베트남의 참여는 싱가포르의 디지털무역 조건이 어느 나라에나 열려 있다는 신호를 개도국에 줌으로써 다른 아세안 국가들의 관심을 촉발할 수 있다. 베트남은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중국과 갈등이 잦기 때문에 지경학적 맥락에서도 시사점이 있다.
미국도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 2021년 7월 <블룸버그> 통신과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이 DEPA를 출발점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 동맹국들과 디지털무역 협정 체결을 검토 중이라고 잇따라 전했다. DEPA가 인도·태평양 지역 디지털무역에 미국이 관여할 수 있는 좋은 모델로 언급된다는 취지였다. ‘당연히’ 중국은 제외한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입장에서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을 모아 ‘디지털경제 영토’를 구축하는 일은 시급하다. 중국과 ‘일대일’ 싸움을 펼쳤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 달리, 바이든 행정부는 동맹을 끌어들여 중국과 세력싸움을 하는 쪽이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가 2017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탈퇴해버려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국 견제 전략 가운데 무역 부분은 빠져 있다.
또한 중국 정보기술(IT) 기업인 화웨이, 알리바바, 텐센트가 최근 몇 년 동안 동남아시아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 동남아 지역 디지털경제가 빠른 속도로 중국 시스템에 편입되고 있다. 심지어 중국 정부가 한때 ‘미국의 포위 전략’이라며 맹비난했던 CPTPP에 가입하기 위한 협상을 추진하고 있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7월 전했다. 미국 입장에서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확산되는 이런 흐름을 마냥 지켜만 볼 수는 없다.
바이든 행정부가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체결한 TPP(현재 CPTPP)에 재가입하는 게 가장 손쉬운 해결책처럼 보인다. 하지만 속사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민주당은 자신들을 자유무역의 최대 피해자로 인식하는 백인 노동자들의 민심 이반으로 트럼프에게 정권을 내줬다. 2022년 중간선거, 2024년 대선을 앞두고 CPTPP 가입은 정치적 부담이 적지 않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미국의 DEPA 가입은 그나마 미국 내 자유무역에 대한 반발이 덜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매슈 굿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경제담당 선임부회장은 누리집에 올린 기고를 통해 “(DEPA에 가입해도) 미국은 시장 접근을 추가로 양허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며 “디지털 쟁점에 대한 부문별 합의는 의회의 공식적인 비준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나 국무부는 DEPA 가입에 적극적이지만, 무역대표부(USTR)는 아직 신중한 입장이라고 외신들은 전했다. 막상 협상이 시작되고 협정이 체결되면 미국의 노동, 농업, 서비스 등 여러 분야에서 어떤 불이익이 발생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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