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화물을 제외하고는 공정위 심사관의 모든 시정조치를 겸허히 수용합니다.”
지난 9일 공정거래위원회 심판정.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인수합병을 심의하는 자리에서 대한항공 대리인의 변론은 이렇게 시작했다. 과징금 몇푼, 시정조치 문구 한두 글자를 놓고 거친 말이 오가는 심판정에서 보기 드문 풍경이 연출된 것이다. 대한항공은 왜 공정위의 제재에 반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걸까.
■ “40개 노선 독과점 우려…34개는 팔아야”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은 2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기업결합 심의 결과를 발표했다. 26개 국제 여객 노선(왕복)과 14개 국내 여객 노선(편도)에서 독과점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시정조치를 부과했다. 기존에 심사관이 내놨던
시정조치안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내용이다. 국제 화물 노선이 아예 조치 대상에서 빠졌다는 게 사실상 유일한 차이점이다.
공정위의 시정조치는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된다. 먼저 40개 노선 중 국내 노선 6개를 제외하고는 해당 운수권이나 공항 슬롯(이착륙 시간대)을 다른 항공사에 넘기도록 했다. 이른바 구조적 조치다. 구조적 조치가 이뤄질 때까지는 가격 인상과 공급량 축소, 서비스 품질 저하를 제한하는 등의 행태적 조치가 부과된다. 구조적 조치 이행 기한은 10년이다. 그 안에 대한항공의 슬롯·운수권을 넘겨받을 항공사가 나타나지 않으면 행태적 조치만 10년간 이행하게 된다.
일부 노선은 완전 독점화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셈이다. 특히 일부 북미 노선의 경우 한국인 여행객 비중이 압도적인 만큼 외국 항공사는 운항하지 않아왔다. 저비용항공사(LCC)가 장거리 노선에 적극적으로 진출할 가능성도 높지 않다. 구조적 조치 중 일부는 이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는 이유다.
대한항공의 미온적 태도의 근저에는 이런 셈법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병희 공정위 시장구조개선정책관은 “대한항공이 (공정위 조치에 대해) 다투기보다는 신속하게 결정되는 것을 원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이 2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기업결합 심의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 마일리지로 저당잡힌 고객들은 어쩌나
국내 소비자들 입장에서는 걱정이 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미 이들 중 상당수는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에 적립된 마일리지로 발목이 잡혀 있어 더욱 문제다. 이런 고착(lock-in) 효과는 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한 뒤 더 강력해질 가능성이 높다. 마일리지가 많이 쌓이는 장거리 노선에서 선택지가 사실상 하나로 압축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울과 뉴욕·로스앤젤레스(LA)·시애틀 간 왕복 노선은 두 항공사의 기존 점유율이 총 100%로 인수합병 후 완전 독점화된다.
행태적 조치에 대한 기대도 크지 않다. 10년 후에는 조치가 해제될 뿐 아니라 내재적인 불확실성이 있어서다. 마일리지의 경우 대한항공이 통합 마일리지 제도를 만들어 공정위의 승인을 받는 방식인데, 아직까지 어떤 기준으로 승인 여부를 판단할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코로나19로 인한 불확실성도 있다. 공정위는 가격과 공급량 모두 2019년 수준으로 유지하되, 코로나19 상황을 반영해 기준을 달리 정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결국 장거리 노선에 다른 항공사가 진입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꼽힌다. 공정위는 ‘황금 시간대’ 슬롯에 기대를 걸고 있다. 공정위는 다른 항공사가 국내 공항 슬롯을 넘겨받겠다고 나서는 경우, 대한항공이 해당 항공사가 신청한 시간대와 1시간 넘게 차이나지 않는 슬롯을 주도록 했다. 외국 항공사 입장에서는 인천공항에서 수익성이 좋은 슬롯을 받을 가능성이 열리는 셈이다.
공정위의 기대가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외국 항공사가 한국 노선에 진출하지 않은 근본적 원인은 국내 소비자들의 국적 항공사 선호 현상에 있다. 여기에는 언어 장벽과 마일리지 문제 등 다양한 요인이 얽혀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공정위는 약 30개 항공사에 진입 의사를 타진했으나, 모두 진입 여부가 불확실하다고 답했다고 한다. 조 위원장이 “신규 진입이 원활히 이뤄질 수 있도록 항공업계 전체가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촉구한 배경이다.
대한항공은 미국과 유럽, 중국 등에서도 심사를 받고 있다. 공정위는 해외 심사 결과가 나오면 이를 반영해 다시 심의를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조 위원장은 “(해외 경쟁당국은) ‘기업의 경영상 위기는 일시적이나 시장의 구조 변화는 영구적’이라는 점에 기반해 엄격한 기업결합 심사 기조를 이어나가고 있다”고 했다.
이재연 기자
ja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