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레이건 유엔세계식량계획(WFP) 예멘 사무소장이 15일 정부 세종청사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종오 기자
세계 최대 인도주의 단체인 유엔세계식량계획(WFP)의 리처드 레이건 예멘 사무소장이 15일 정부 세종청사를 찾았다. 그가 이날 국무총리실 등 정부 기관을 찾은 건 최빈국 중 하나인 중동 국가 예멘을 위한 한국 정부의 지원과 관심을 요청하기 위해서다.
위기의 여파는 상대적이고 불균형적이다. 코로나19 전염병, 가뭄 등 기후변화, 우크라이나 전쟁이 부른 식량위기가 가장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에게 더 큰 타격을 준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국제적으로는 예멘 같은 취약 국가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레이건 소장은 이날 세종청사에서 <한겨레>와 만나 “예멘의 식량 상황은 코로나 사태와 우크라이나 분쟁 이전부터 이미 매우 나빴다”며 “최근 국제적인 식량 가격 급등으로 같은 음식을 구하려면 자원이 30% 더 필요해지는 등 사정이 더 악화했다”고 말했다.
2018년 제주도 난민 입국으로 국내에 사정이 알려진 예멘은 벌써 8년째 내전과 정치·종교적 분쟁을 겪고 있다. 현재는 잠시 휴전 상태다. 중동 지역의 사우디아라비아 남쪽에 위치한 이 나라는 미국 싱크탱크인 ‘평화기금’과 포린 폴리시가 평가하는 ‘취약국가 지수’ 세계 1위 자리를 4년째 유지하고 있다. 북한(올해 32위)보다 순위가 훨씬 높다. 사실상 정상적인 국가 유지가 어려운 상황이라는 의미다.
레이건 소장은 “예멘은 1970년대 인구 700만명에 식량의 15%만 수입했으나 지금은 인구가 3천만명으로 늘고 식량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한다”며 “물 부족과 분쟁 등으로 약 2천만명이 인도적 지원이 필요한 상태”라고 했다. 국민 3명 중 2명이 식량 불안정을 겪는다는 얘기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예멘의 주요 식량 가격은 최근 1년 새 지역별로 38∼77% 급등했다. 예멘 이전에 방글라데시, 네팔, 탄자니아는 물론 북한에서도 현지 구호 활동을 했던 레이건 소장도 “이곳(예멘)이 가장 복잡하고 심각하며 규모가 큰 현장”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한국 정부는 식량계획을 통해 예멘에 연 2만톤(t)가량의 쌀을 지원하고 있다. 이 지역의 연간 식량 수요(400만톤)의 0.5% 남짓이다. 이 쌀은 예멘 남부지역의 분쟁을 겪은 실향민 등 약 200만명에게 가구당 50킬로그램(kg)씩 배급한다. 레이건 소장은 “한국 쌀이 현지에선 수준 높은 식재료에 해당해 사람들도 호감을 갖고 있다”면서 “압력을 통해 밥을 짓는 방법을 알려주는 교육도 한다”고 전했다.
최근 우크라이나 흑해 항구를 통한 밀 등 곡물 수출이 재개되며 식량 가격도 소폭 내림세로 돌아섰다. 예멘에도 다음달 우크라이나에서 보낸 식량이 도착할 예정이다. 그러나 현지 사정이 워낙 열악해 눈에 띄는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리처드 레이건 유엔세계식량계획(WFP) 예멘 사무소장이 지난해 3월 방글라데시 난민캠프 화재 발생 직후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유엔세계식량계획 제공
4년 전 한국에 예멘 난민들이 도착했을 때 국내 여론이 이들에게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 예멘 현지 내전에서 사용되는 무기를 한국의 방산 기업들이 일부 공급하는 등 우리의 이해관계도 복잡하다. 레이건 소장은 “매우 불행한 건 (최빈국에 무기와 식량을 동시에 공급하는) 이런 일이 어디에서나 발생한다는 것”이라며 “이런 경우 인도적인 지원은 상처에 붙이는 밴드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레이건 소장에게 한국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당부의 말을 물었다. “한국 국민들은 전쟁이라는 아주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한국 전쟁 이후 국제 사회의 많은 지원이 있었어요. 분쟁의 희생자이자 전쟁을 이해하는 한국의 후대가 그런 기억과 정신을 예멘의 난민 등 다른 이웃을 위한 베풂으로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박종오 기자
pjo2@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