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동 서울대 교수가 13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연구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산업정책 부흥기라고 해야 할까. 정부는 간섭 말고 기업 자율에 맡기라던 소리는 쏙 들어간지 오래다. 국가 간 산업정책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가 나올 지경이다. 공급망 안정화, 기술주권, 경제안보 따위를 명분으로 삼아 ‘내가 쓰는 건 내가 만들겠다’는 태세다. 미국의 반도체·과학법(8월 시행), 인플레이션 감축법(IRA·8월 시행)이 그 앞자리를 차지한다.
한국도 산업정책 경쟁 대열에 서 있다. 국가첨단전략산업법(일명 ‘반도체특별법’·8월 시행)을 제정한 데 이어 반도체 사업장에 대대적인 지원을 해주는 방안도 마련해놓고 있다. ‘산업정책 대전환’을 가속화하겠다는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 산업의 미래에 대한 서울대 공과대 교수 26명의 제언을 담은 책 <축적의 시간> 저자 이정동 서울공대 교수(기술경영경제정책)는 <한겨레>와 만난 자리에서 국가 간 경쟁적인 산업정책 전개가 “사교육에서와 같은 극장 효과로 이어질 것 같다”며 걱정했다. 이 교수는 <축적의 시간>에 이어 산업 혁신의 길을 모색한 <축적의 길>, <최초의 질문>을 잇달아 펴냈다.
“전세계적으로 비슷비슷한 분야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어 똑같은 기술 개발을 하게 되는 꼴이다. 극장에서 앞자리 사람이 일어나면 모두 일어나서 볼 수밖에 없듯이, 누군가 대치동 학원에 아이를 보내면 너도나도 보내면서 모두 잃는 게임을 하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인터뷰는 지난 7일과 13일 두 차례에 걸쳐 서울대 연구실에서 2시간가량 진행됐다.
―산업정책 경쟁 분위기에서 경제안보와 함께 기술주권이 부각돼 있다.
“기술주권이란 게 문 닫아 거는 쪽으로 가면 안된다. 그저께(10월5일) 국제포럼을 열었는데, (여기에 참석한) 미국의 전문가도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미국이 자기만 살자고 나서니 ‘리더 국가인가?’라는 의심을 받기 시작하고, ‘여러 나라중 하나’로 인식되는 순간, 미래 기술의 표준을 이끌어가는 리더로서의 힘을 잃을까 걱정한다. 어느 나라든 기술주권을 명분으로 문을 닫아 걸면 (국내) ‘이류 클래스’로 자원이 흐른다. 일종의 지대추구 효과가 나타난다. 기술주권(개념)이 오염돼 보호주의로 흘러 우려스럽다.”
―너도 나도 나서는 판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인구나 땅 크기로 보아 미국이나 유럽은 자기네 영역, 블록 안에서 공급망 안정화나 완결형 기술주권을 이루는 게 가능하다. 중국도 나름의 방식으로 가능할 수 있다. 우리나라나 일본, 대만은 다르다. 문 닫아 걸면 죽는다. 기술주권, 기술독립 얘기 나오니 그걸 명분으로 마치 장섰다는 듯 여기저기서 정부한테 돈 달라, 기술독립할 수 있다는 식으로 나온다. ‘국뽕’으로 엄청난 왜곡현상이 빚어질 수 있다.”
이정동 서울대 교수가 13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연구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이 교수는 “현대 기술 어떤 것도 ‘스탠드 얼론’(나홀로) 할 수 있는 건 없다”며 “기술 개발에선 협력의 가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코로나19 대유행 억제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받는 메신저리보핵신(mRNA) 백신 개발에 “전세계 온갖 사람들의 지식이 더해진” 것을 한 예로 들었다. 팬데믹 극복, 기후위기 대응과 마찬가지로 기술개발에서도 한 나라만의 힘으로는 문제를 풀 수 없다는 설명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산업경쟁에서 자국 이익을 추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나, 한편으로 과학기술의 혁신에서는 국제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한국이 주도해 제시할 필요가 있다. 다 문 닫아걸자고 나서는 상황에서 한국이 글로벌 시각으로 이슈를 제기하고 나가야 한다. 그럴만한 위상이 된다. 예전의 가난한 국가가 아니다. 선진국의 일원으로 세계를 향한 우리만의 독자적인 ‘서사’를 제시해야 한다.”
이 교수는 “인류가 공유하는 지식을 창출하는 데 협력이 더 필요하다는 우리 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대미 협상의 지렛대를 만드는데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중국 견제용으로 일컬어지는 미국 주도의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5월 출범), 미 인플레 감축법을 두고 협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일컫는 대목이다. 문 닫아거는 기술개발이 아니라, “힘을 합쳐 협력의 가치에 바탕을 두고 혁신을 이루자, 제3의 대안이 있다는 식으로 담론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이 교수는 강조했다.
“현대적인 의미의 기술주권은 15세기 때와 다르다. 혼자 하기 어려워 상호의존적 내지 상호연계적 기술주권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같은 배를 타는 것이다. 2인3각으로 발을 묶으면 서로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태를 만드는 게 진정한 현대적인 의미의 기술주권이다. 한국의 처지에선 특히 더 개방하고 손잡고 가는 방식이어야 한다. 국가 간 경쟁 분위기를 온전히 무시할 순 없지만, 혁신 정책 구상에서 협력의 방식을 바탕에 깔아야 한다는 거다. 나라별 처지가 다른 데 다른 나라가 하니 우리도 한다는 ‘미투’ 방식은 곤란하다. 특히 미국과 유럽의 자기완결형 산업혁신정책을 그대로 벤치마킹하는 것은 실패로 가는 길이다.”
그는 상호 연계적 기술주권 추구에서 한국의 좋은 상대로 유럽, 특히 독일을 꼽았다. 보유 기술을 비교할 때 상호 보완의 성격을 가장 강하게 띠고 있는 나라라는 점에서다. 독일은 기계 분야, 한국은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서 강점을 띠어, 미래 기술의 퍼즐을 맞춰 가는데 최선의 상대라고 설명했다.
“당연히 미국과 적극적으로 손잡되, 대안으로 협력의 대안적 고리를 자꾸 늘려가야 한다. 산업정책, 과학정책, 혁신정책에서 다른 나라들과 경쟁을 벌인다며 ‘미투’로 해서는 산업정책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 제3의 길을 찾아야 한다. 획기적이고 놀라울 정도로 협력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열린 국가가 되는 게 살아남는 길이다. 우리도 줄 게 있다. 다른 나라들이 갖지 못한 것을 제공할 여지가 있다.”
김영배 선임기자
kimy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