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30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가 서울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점에 차린 ‘배리어 프리’ 영화 홍보 부스. 사진 넷플릭스 제공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영화를 볼 것인가. 극장과 텔레비전을 넘어 인터넷으로도 쉽게 영화를 접할 수 있을 정도로 플랫폼이 다양해진 시대, 하나의 영화를 두고도 선택의 폭이 넓어져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런데 최근 고령자나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의 사회생활을 방해하는 장벽을 허물자는 운동인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기술 도입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극장 산업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제공하는 기술기업들 사이에 뚜렷한 태도 차이가 보여 주목된다.
지난달 30일, 온라인동영상서비스 넷플릭스가 서울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점에서 최근 개봉한 영화 <정이>의 배리어 프리 상영회를 처음으로 열었다. 극장 한켠에는 넷플릭스의 ‘화면 해설 기능’(화면을 눈으로 보듯 음성으로 묘사해주는 기능)을 이용해보는 부스가 차려졌고, 연상호 감독과 김현주 배우 등이 직접 무대인사에 나서 수어로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초대받은 시각·청각 장애인들과 국립서울맹학교 교사 등으로 객석이 찼고, 비장애인들도 다같이 화면 해설 기능을 켠 채로 영화를 관람했다.
배리어 프리 영화를 거의 찾아보기 힘든 국내 극장을 대관해 글로벌 기업이 배리어 프리 기능을 적극 홍보하는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속 장면과 같았다. 미국이 법으로 영화 제작·배급사의 배리어 프리 기능 제공을 강제하고 있는 것과 달리, 한국은 관련 규정이 모호해 현재 시각·청각 장애인들이 극장을 상대로 직접 소송에 나서 법정 싸움을 벌이는 중이다.
미국은 연방통신위원회(FCC)가 정한 연방통신법 규정에 따라 상업용 영화 제작사와 배급사는 시각·청각 장애인을 위한 음성 화면해설 및 자막해설 서비스를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미국 극장 체인 ‘리갈 엔터테인먼트’는 상영관의 80%에 해당하는 6천개의 스크린에 화면해설 시스템을 구축했다. 독일 정부는 독일영화진흥회와 함께 2015년부터 영화관에서 시각·청각 장애인에게 화면해설을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 활용 중이다.
“저는 오늘 좀 다르게 보이고 싶어 가운데 가르마를 했어요.” 지난 달 30일 넷플릭스 ‘배리어 프리’ 상영회에서 영화 <정이>의 감독과 배우들이 시각장애인을 위해 자신의 머리 모양과 복장 등을 설명하며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 넷플릭스 제공
이런 분위기 속에 세계 무대로 나서는 기술기업들은 배리어 프리 기능 도입에 적극적이다. 넷플릭스는 배리어 프리 기능을 담당하는 별도의 팀을 꾸려 음성 화면해설과 청각장애인용 자막을 최대 33개 언어로 제공하고 있다.
유튜브 역시 동영상을 이용하는 전 과정에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화면에 담긴 정보 읽어주는 스크린 리더, 자동 자막 생성, 자막 있는 동영상 찾기 지원 등의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국내 온라인 콘텐츠 플랫폼 왓챠도 2021년부터 음성 해설, 자막 제공 등 배리어 프리 기술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 2023)에서도 삼성전자와 엘지(LG)전자 모두 배리어 프리 기능이 강화된 텔레비전을 선보였고, 시각 장애인을 위한 촉각 그래픽 장치를 만든 국내 스타트업(신생창업기업) ‘닷’이 최고혁신상을 수상했다.
삼성전자가 CES 2023에서 공개한 ‘릴루미노(Relumino) 모드’가 적용된 TV. 화면의 윤곽선, 색채와 대비를 강조해 저시력 장애인들의 시청을 돕는다. 사진 삼성전자 제공
국내 극장가 상황은 이와 반대다. 2016년 시각·청각 장애인들이 씨지브이(CGV)·메가박스·롯데시네마 3사를 상대로 배리어 프리 기능을 도입해달라며 차별구제 소송을 제기했는데, 6년이 지난 지금까지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며 법정 공방을 이어나가고 있다. 2021년 11월 2심 판결에서 법원은 원고들이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총 좌석 수가 300석을 넘는 극장은 상영관 중 1곳 이상에서 총 상영 횟수의 3%에 해당하는 횟수만큼 스피커에서 화면해설이 나오는 방식(개방형)이나 화면해설 수신기기를 구비해 제공하는 방식(폐쇄형)으로 영화를 상영하라고 판결했다.
‘장애인 인권 디딤돌·걸림돌 판결’ 심사위원인 표경민 변호사는 “상영 횟수의 3%에 불과한 2심 판결은 1심 판결보다도 후퇴한 것인데 이마저도 현실에 적용조차 되지 않은 채 시간만 흐르고 있어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한 극장 관계자는 “아직까지 배리어 프리 상영을 확충하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고, 대신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의 가치봄 영화 사업을 통해 장애인들을 위한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배리어 프리에 대한 관심은 장애인에 한정되지 않는다. 지난해 말 영진위가 발표한 ‘장애인 동시관람 상영시스템 시범상영관 운영 및 개선방안 연구’ 보고서를 보면, 설문에 참여한 비장애인 803명 중 90.8%가 영화관에 배리어 프리 기능 도입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보고서는 “선진국들은 장애인의 영화 관람권을 보장하기 위해 상영시스템을 이미 도입한 반면, 우리나라는 국가 차원에서 먼저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 당사자들이 소송을 제기해서 그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이날 넷플릭스 상영회에 참여한 조아라(43)씨는 “2017년 시각장애인이 되기 전까지는 영화광이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중증 시각장애인으로 살게 된 지난 몇 년 동안은 극장에 오기가 너무도 힘들었다”며 “동정이나 시혜 차원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로 영화를 볼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임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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