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철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이 지난 22일 세종시 케이디아이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케이디아이 제공
윤석열 정부는 출범 초부터 교육·노동·연금 등 3대 구조개혁을 강조했다. 그 ‘머리’(씽크탱크) 역할을 하는 이가 조동철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이다.
조 원장은 2016∼2020년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서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을 지내고, 현 정부의 첫 국책 연구기관장으로 선임된 거시 경제 학자다. 코로나19 이전 저물가 시기에 중앙은행의 금리 인하를 촉구한 ‘비둘기파’로 알려졌으며, 과거부터 구조개혁을 주장해왔다. 지난 22일 세종시 케이디아이에서 만난 조 원장은 “이번 정부 5년 동안 연평균 2% 성장만 해도 잘한 것”이라며 기득권 허물기 등을 통해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케이디아이는 지난 9일 올해 한국 경제 성장률이 상반기 1.1%, 하반기 2.4%를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상반기 경기가 예상보다 나쁘겠지만 하반기 들어 회복세를 보이리란 시각이다.
—기획재정부 내에선 한국 경제가 올해 1분기(1∼3월) 중 바닥을 찍을 거라는 말도 나옵니다.
“1분기라고 특정하긴 어렵지만 제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경기 회복이라기보다는 중국의 코로나19 봉쇄 정책, 반도체 가격 폭락 등으로 지난해 4분기와 올해 1분기 급락했던 경제가 그 충격에서 벗어나 정상화되는 정도라고 봅니다.”
—중국의 리오프닝(경제 활동 재개)은 긍정적이지 않나요?
“과거만큼 큰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인구 감소 등으로 중국 경제의 성장세 자체가 계속 내려가고 있습니다. 또 국가 체제 문제가 있죠. 여전히 공산주의 체제가 남아있는 국가 경제가 다른 나라보다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 미·중 갈등까지 더해져 중국이 한국을 포함한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예전만큼 크긴 어렵습니다.”
—수출 감소세가 이어져 걱정이 큽니다.
“‘한국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모든 걸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생산성이 높아지고 경쟁력이 생기면 수출이 잘 되는 거죠. 지금의 무역적자는 일시적인 측면이 커 보여 올해 하반기 흑자로 돌아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지속된 경상수지 흑자는 앞으로 노인이 더 많아지면 언제 적자가 될지 모릅니다. 국가를 개인에 비유하면 40·50대에는 생산을 통해 올리는 소득이 지출보다 많아 남는 돈을 저축하지만, 나이가 들면 그걸 꺼내 쓰게 되는 거죠.”
—일각에선 한국 경제가 올해 반등 대신 ‘L’자형 침체에 빠질 거라고 우려하기도 합니다.
“중국이 열심히 성장해도 우리는 우리 내부의 문제가 있습니다. 고령화와 생산성 저하 문제를 생각하면 2050년 우리가 플러스(+)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없습니다. 2050년이 되기 전에 마이너스 성장세로 갈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번 정부도 5년 동안 연평균 2% 성장만 해도 잘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조동철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이 지난 22일 세종시 케이디아이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케이디아이 제공
조 원장이 강조하는 구조개혁의 핵심은 지난해 말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주최로 열린 ‘리부트 코리아 2022’ 세미나에서 그가 한 기조연설에 녹아있다. ‘기회가 지속적으로 창출되는 열린 사회’를 주제로 한 연설에서 그는 “우리 사회의 경제적·사회적 장애 요인과 기득권의 벽을 타파해야 우리 경제 전반의 생산성이 높아질 수 있다”고 했다.
—‘기득권의 벽’은 무엇입니까?
“기득권은 외부적인 요인과 제도적인 것에 의해 본인의 능력 또는 생산성보다 훨씬 더 많은 보상을 받는 상태가 유지되는 겁니다. 생산성 제고 없이 소유권을 이용해 자신의 몫을 늘리는 것입니다.”
—요즘 학생들이 대학 반도체학과 등록을 포기하고 의대에만 몰립니다. 정작 응급실과 외과 등 비선호과엔 인력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제도적으로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의대 정원을) 늘리자는 데 한 표입니다. 늘릴 수 있을 때 늘려야죠. 사실 대학교 학과 정원을 보면 교수가 있어서 학과가 존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교대 정원도 문제예요. 학생 수가 줄어서 교사를 무한정 뽑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교대 정원을 못 줄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교대 졸업생 중 교원 시험 탈락자를 정부에 보장해 달라고 해요. 그걸 보장할 게 아니라 교대 정원을 줄이는 게 정당하지만 그렇게 안 되는 거죠. 노동시장의 호봉제(나이와 근속연수 등에 따라 임금이 오르는 구조) 역시 경제가 성장하던 시절엔 무리 없이 굴러갈 수 있지만, 예전만큼 성장하지 못하는 지금은 유지하기가 힘듭니다. 그런데도 모든 기득권들이 저항하고 있는 겁니다.”
—윤석열 정부는 기득권·지대 타파를 말하며 가장 우선적으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일자리 양극화)를 개선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론이 모호해 보입니다.
“우선 주 52시간 근무제 등 노동시간의 유연성은 이미 많이 완화했습니다. 다음 과제로 호봉제 등 임금 유연화가 있습니다. 호봉제 개편이 안 되면 정년을 연장하기도 힘듭니다. 궁극적으로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없애고 청년 일자리를 확대하려면 고용 유연화까지 이뤄져야 합니다. 기업의 고용 부담이 줄어야 청년들을 더 많이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현 정부가 그 전 단계(임금 유연화)까지는 갈 의지가 있어 보입니다.”
—정부가 ‘건폭’(건설현장 폭력)과 전쟁을 선포하는 등 노동 정책을 너무 정치 문제로만 푸는 것 같습니다.
“민주노총 강령 등을 보면 한국의 노조 자체가 정치색이 강합니다. 그러니 노조와 관련해 정부가 뭘 하든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 문제는 어떻게 봅니까?
“모방 경제의 끝자락에 간 일본의 1980년대 말 가장 큰 고민이 기초과학이었습니다. 기존 기술 활용엔 자신이 있지만 진짜 기초가 되는 지식을 갖지 못해 항상 불안하다는 겁니다. 우리도 지식 산업과 대학의 경쟁력이 없는 게 큰 문제입니다. 중고등학생들의 학력 저하가 벌써 숫자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교수 연봉을 10년 넘게 동결하다 보니 인재가 오지 않아 대학 경쟁력도 형편없어졌습니다. 교육 정책을 너무 복지 차원으로만 접근해서 벌어진 일들입니다.”
—교육에서 효율성, 시장 논리만 강화하면 학력 격차가 커질 수도 있습니다.
“세종시는 지자체 빚이 4천억원이 넘는데, 반대로 세종시 교육청은 그만큼 적립금을 쌓아두고 있다고 합니다. 나라 전체적으로 보면 교육청에 넘치는 돈을 줄이고 다른 필요한 곳에 투입해야 합니다. 본인이 의지가 있고 능력이 뒷받침되는데도 부모가 못 살아서 못 배우는 일이 없도록 정부가 교육 재정을 이런 곳에 써야 합니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사상 처음으로 0.7명대까지 떨어졌습니다. 저출산 해결을 위해 파격적인 재정 투입이 필요하진 않습니까?
“돈 문제로 어느 정도까지 출산율을 끌어올릴 수 있을지 자체가 불투명합니다. 이 문제의 결정권을 가진 건 여성입니다. 이 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경력 단절입니다. 그 문제를 먼저 해결해줘야 합니다.”
한국은행은 지난 23일 기준금리를 연 3.50%로 동결했다. 조 원장은 이창용 한은 총재와 서울대 경제학과 80학번 동기다. 친분도 두텁다.
—미국의 정책금리 인상 가능성이 큰 데, 한은이 지금 금리를 동결한 건 적절합니까?
“통화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나라 물가의 중장기적인 흐름이 목표 수준에서 크게 벌어지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서비스 물가는 조금씩 안정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기조적인 물가 상승 압력이 지난해보다 낮아지고 있는 만큼 앞으로 기준금리가 3.50% 이상으로 갈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
—미국이 연내 피벗(통화정책 전환)에 나설 가능성이 있을까요?
“지금으로선 연내 피벗 가능성이 크지 않아 보입니다. 노동시장이 여전히 양호하고 미국의 인플레이션 자체도 빨리 내려올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한은의 물가 안정 목표(2%) 상향 조정이 필요할까요?
“미·중 갈등, 공급망 문제 등으로 과거처럼 중국산 저가 상품 공급에 의한 글로벌 물가 안정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주장 등이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를 감안해 한은의 물가 안정 목표를 2%에서 3% 이상으로 올리자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설령 그런 측면에 있더라도 골(물가 안정) 넣기 어렵다고 골대(물가 안정 목표치)를 자꾸 옮기는 건 좋지 않습니다.”
—금융위기가 재발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최근 30∼40년 내 이렇게 금리를 급박하게 올린 적이 없습니다. 금리를 빠르게 올리면 금융시장의 사고 위험도 커집니다. 한국도 집값이 조금 더 떨어지면 국지적인 금융시장 불안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습니다. 다만 큰 틀에서 봤을 때 대규모 금융위기가 올 가능성까지 생각하는 전문가들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국 경제는 일본, 중국과 같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겠습니까?
“저는 한국이 일본보다 조금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고령화 속도는 우리가 더 빠르지만, 한국은 무엇보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작습니다. 미국과 유럽을 비교해 보면 지난 30년간 세계 경제의 혁신 기업들이 다 미국에서 생기며 경제적 격차가 더 벌어졌습니다. 한국의 벤처 기업과 한류 등은 누가 이끈 게 아니라 시장에서 자생적으로 나온 겁니다. 우리에겐 이 같은 저변의 힘이 있고 그런 것들이 희망의 싹이라고 생각합니다. ”
—감세하면서 건전 재정을 이루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재정 정책 기조가 지속 가능해 보이지 않습니다.
“(지난해 추진한 감세는) 이전 정부의 과도한 부동산 보유세 강화 정책 등을 정상화하는 차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랏빚이 늘어나는 속도를 최대한 늦추기 위해 우선 지출 구조조정을 하고,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어느 순간에 가면 증세를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조세 제도는 한 나라 경제 제도의 근간이기 때문에 증세나 감세를 경기 대책으로 쓰는 건 위험하고, 가급적 긴 시계에서 국가 대계를 생각해 결정하는 게 필요합니다.”
—일본은 오는 4월 중앙은행 총재가 바뀌며 ‘아베노믹스’의 핵심인 완화적 통화정책도 수정될 수 있다는 예상이 많습니다.
“일본은행의 수익률곡선통제(YCC, 장기 시장금리를 목표 범위 내로 통제)는 원래 자연스러운 정책이 아닙니다. 이제 와이시시 등 제로금리를 포기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있지만, 그렇더라도 금리를 천천히 올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지금의 물가 상승세가 계속 지속될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외환시장에도 큰 충격을 줄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입니다.”
박종오 기자
pjo2@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