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중국 충칭에서 열린 취업 박람회에서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고 있다. 충칭/AFP 연합뉴스
‘102조원(5819억 위안)’
올해 한국 정부 예산의 약 6분의 1에 달하는 이 금액은 중국의 최대 부동산개발업체였던 헝다(에버그란데)그룹이 지난 17일 공시한 2021∼2022년 순손실액이다. 이 회사는 2021년 채무 불이행과 경영난으로 중국 부동산시장 위기의 도화선이 됐다. 헝다그룹에 이어 이번에는 또다른 대형 부동산업체인 완다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다롄완다상업관리집단이 채무를 제때 갚지 못하는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 지난해부터 유동성 위기를 맞은 완다는 오는 23일이 만기인 채권 4억달러(약 5천억원) 중 최소 2억달러(약 2500억원)가 부족한 상태라고 17일 채권단에 밝혔는데, 중국 부동산시장에서 연쇄 디폴트 우려가 확산하는 중이다.
중국이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이후 10여 년 만에 다시 0%대 저물가를 겪으며 국내외 경제 안팎에 우려를 낳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에 힘입어 기지개를 켜던 중국 경제가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의 늪에 빠지는 게 아니냐는 거다. 가계·기업 등 경제 주체들이 소비·투자보다 빚 갚기에 몰두하면서 1980년대 거품 붕괴 뒤의 일본처럼 이른바 ‘대차대조표 불황’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19일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지난 6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전년동월 대비)은 0%에 그치며 2021년 2월(-0.2%) 이후 2년 4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올해 3월부터 넉 달 내리 0%대에 머물며 둔화폭이 커졌다. 기업이 구매하는 원자재 등 도매 물가를 반영해, 소비자물가의 선행지표 역할을 하는 생산자물가는 지난해 10월부터 9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 중이다. 6월 생산자물가는 1년 전보다 5.4% 내리며 7년 반 만에 최저치를 찍었다.
문지영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국경제통상팀장은 “중국의 리오프닝 효과가 예상보다 좋지 않고 경기가 둔화하며 디플레이션 우려가 수면 위에 오른 것”이라고 말했다.
물가 둔화를 부채질한 건 올해 초에 반짝 오른 뒤에 다시 식어가는 중국 내수 경기다. 소매 판매는 지난 3∼5월 두 자릿수 증가세(이하 전년 대비)를 보이다 6월 들어 증가율이 3.1%로 확 내려앉았다. 올해 상반기(1∼6월) 고정자산 투자는 3.8% 늘었지만, 국유기업 투자를 뺀 민간 투자는 오히려 0.2% 뒷걸음질했다. 앞으로 물가 하락이 본격화하면 민간이 소비·투자를 나중으로 미루며 구조적인 불황에 빠질 수 있다는 게 디플레이션의 각본이다.
이런 디플레이션, 장기 불황 조짐의 한복판에는 헝다그룹과 완다그룹까지 휘청이게 한 중국의 부동산시장 침체가 있다. 국내 한 증권사의 중국담당 분석가는 “중국은 현재 사업 개시 후 미준공 주택 물량이 연간 신규 공급 물량의 10년 치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부동산·인프라 중심의 투자 주도 성장을 지속하면서 부동산 시장 구조조정을 뒤로 미뤘다가 이제 부동산 경기 침체, 부채 부담 등으로 소비와 투자가 둔화하는 디플레이션 초기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짚었다.
집값 하락과 과잉 공급, 부동산 기업 부채 등의 여파로 상반기 중국의 부동산 개발 투자도 7.9% 줄었다. 상품별로 보면 지난달 민간 소비를 끌어내린 것도 주로 부동산과 관련 있는 가구(1.2%), 건축·장식 재료(-6.8%), 문화 사무용품(-9.9%) 등이다. 중국 가계·소비자들은 당국의 금리 인하 등에도 소비를 꺼리며 은행 저축을 늘리는 경향이 뚜렷하다. 코로나 당시의 극단적인 봉쇄 경험과 자산가격 하락 등으로 당장 지갑을 열기보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하려는 심리가 강해진 셈이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 타임스>는 전날 “올해 중국 상황이 1980년대 부동산 거품이 터진 후의 일본 상황과 비슷하다는 주장이 있다”며 “기업과 가계가 모두 부채 상환에만 집중하며 경제 성장이 하향 곡선을 그리는 일본식 ‘대차대조표 불황’의 발판이 마련됐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부동산발 수요 부진이 장기간의 물가 하락, 경기 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부동산 시장의 반전 없이는 올해 중국 당국이 목표한 5% 성장률 달성도 어렵다는 것이 시장 분위기”라며 “중국 당국이 대대적인 부동산 대책을 내놓지 않는다면 시장의 실망감도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은 이달 말 중국 공산당 지도부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부동산시장 안정 등 경기 부양책이 나올지에 주목한다.
중국의 부동산발 디플레이션 진입 징후는 한국 등 주요국 경제에도 악재다. 인구 14억명의 세계 2위 소비재 시장이 쪼그라들고 한국과 같은 중간재 위주 대중국 수출에도 악영향이 예상돼서다. 세계 경제위기 때마다 구원투수 역할을 했던 중국이 이번엔 국내외 경기 회복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중국경제의 디플레이션과 디플레발 경기침체 가능성을 단정하기엔 아직 성급하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지만수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중국이 지금도 5%대 성장을 하는 만큼 도매 물가 하락만 보고 디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를 말하긴 이르다”면서 “최근의 도매 물가 하락은 지난해에 있었던 공급 쪽 물가 상승 요인이 사라진 기저효과 영향이 크고, 아직 높지 않은 정부·가계의 부채 수준 등을 고려할 때 대차대조표 불황도 중국의 부동산부문에 주로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박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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