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민생 물가 안정 관계 장관 회의를 시작하고 있다. 연합뉴스
물가에 다시 비상등이 켜졌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전쟁이 불러온 세계적인 ‘1차 고물가 파동’에 이어 이스라엘-하마스 사태에 따른 ‘2차 물가 파동’ 우려다. 올 하반기 들어 물가 안정을 최대 정책 목표로 삼고 있는 정부도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뾰족한 수단이 없는 상황이다.
기획재정부·농림축산식품부·해양수산부 등 정부 부처 장차관들은 17일 서울청사에서 ‘민생·물가 안정 관계장관회의’를 열어 물가 동향을 점검하고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전날 윤석열 대통령이 “중동 정세 불안 등으로 또다시 물가 상승 우려가 커지는 만큼 민생·물가 안정에 모든 부처가 만전을 기해달라”고 주문하자 긴급히 마련한 자리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회의에서 “최근 국제유가 상승과 기상 여건 악화 등으로 물가 불확실성이 재차 확대되는 모습”이라며 “업계는 원가 절감 등을 통해 가격 인상 요인을 최대한 흡수해주시고 각 부처도 실효성 있는 물가 안정 대책을 마련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정부는 먹거리 물가를 잡기 위해 이번주부터 2주간 배추 2200톤을 공급하고, 이달 말부터 천일염 1천톤을 50% 할인한 금액에 풀기로 했다. 망고·분유·고등어 등의 수입 관세를 인하하고, 배추·대파·사과 등 12개 농산물도 오는 19일부터 최대 30% 할인 판매를 지원하기로 했다. 내년 총선 전초전인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당정이 민생 경제를 부쩍 강조하며 물가 안정에도 팔을 걷어붙이는 모양새다.
사정은 녹록지 않다.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전년 동월 대비)은 지난 7월 2.3%로 연중 저점을 찍고 8월 3.4%, 9월엔 5개월 만에 최고치 3.7%로 다시 올라섰다. 국제유가 상승 여파다. 한국의 지난달 물가 상승폭은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을 겪는 미국과 같다. 한국 물가 오름폭이 미국과 같거나 높아진 건 6년여 만이다.
중동 지역 갈등이 꿈틀대는 국제유가에 다시 불붙여 물가의 공급 쪽 압력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국제금융센터는 전날 펴낸 ‘이스라엘-하마스 사태 시나리오별 영향 점검’ 보고서에서 “사태가 단기간에 종료되면 국제유가가 연말까지 배럴당 100달러 이내에서 움직이고, 이스라엘과 이란 간 무력 충돌, 이란의 원유 수출 중단, 호르무즈해협 봉쇄 등으로 확산하면 최대 150달러까지 급등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현재 배럴당 90달러를 밑도는 국제유가가 최악의 경우 지금보다 50% 가까이 뛸 수 있다는 얘기다.
주류·우유·설탕 등 주요 소비재 기업들의 가격 인상, 전기·가스요금 등 공공요금 추가 인상 가능성도 부담이다. 가격이 경직적이어서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 수요 쪽 물가 압력도 여전히 만만치 않다. 한겨레가 통계청 ‘고용동향’ 통계와 고용노동부의 사업체노동력조사를 활용해 구매력(취업자 수×월 임금 총액)을 추산해보니, 소비자들의 구매력은 올해 들어 매달 전년 대비 뚜렷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수요 쪽 물가 상승 압력을 보여주는 ‘식료품 및 에너지 제외 지수’(근원물가 지수) 변동률도 지난해 3월 이후 지난달까지 18개월 연속 3%를 웃돌고 있다. 최근의 고용 호조세가 물가엔 오히려 악재로 작용하는 셈이다.
조영무 엘지(LG)경영연구원 연구위원은 “유가와 원-달러 환율 모두 올라가는 요인으로 작용해 수입 물가를 중심으로 물가 부담이 가중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천소라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전망실 전망총괄은 “유가 상승 등으로 사람들의 기대 인플레이션(경제 주체들의 물가 상승률 전망)이 높아지면 다시 물가가 올라가는 2차 파급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고 했다.
박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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